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미월)

미팔자(芈八子): 역사상 최초로 태후신분으로 나라를 다스린 여인

중은우시 2015. 2. 15. 07:32

글: 조염(趙炎)

 

 

 

 

상앙변법이후, 진나라의 국력은 크게 늘어나, 고속발전궤도에 접어들었다. 진혜왕이 즉위한 후 20여년동안 파촉을 취하고, 한중을 차지하며, 함곡관을 장악하여, 황하동안에 전초기지를 건설한다. 진나라의 확장세에 동방의 각국은 소진의 합종술을 취한다. 광범위한 국가동맹을 형성하는데 이는 진나라를 막고 견제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봉쇄를 돌파하기 위하여, 진혜황은 장의의 연횡술을 채택하여, 원교근공의 원칙에 따라 계속하여 합종의 헛점을 파고 들어, 혹은 초와 혹은 제와 혹은 연과 접촉하며 합종의 와해를 꾀한다.

 

미팔자의 아들 영직(嬴稷)은 바로 이런 배경하에서 인질로 연나라에 보내어진다. 미팔자는 이름그대로 진혜왕의 여덟째 첩이다. 지위는 그다지 높지 않았다. 다만 가족의 정은 지위의 고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모자연심(母子連心)이라고, 영직이 모친을 떠날 때는 아직 어렸다. 그 몇년이 미팔자에 있어서는 "종차무심애양야(從此無心愛良夜), 임타명월하서루(任他明月下西樓)"의 생활이었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모자이별의 고통으로, 미팔자는 연활술이 국가의 미래에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지 알게 되었고, 최종적으로 역사상 최초로 태후의 신분으로 나라를 41년간이나 다스리는 전설적인 여인이 된다.

 

기원전311년, 진혜왕이 병사하고,다시 3년후 진무왕이 사고로 사망한다. 영직은 외삼촌 위염(魏冉)의 적극적은 지지하에 귀국하여 진소양왕(秦昭襄王, 이하 진소왕이라 함)에 오른다.미팔자도 화려하게 변신하여, 스스로 선태후(宣太后)라 칭한다. 역사기록에 따르면, "왕이 나이가 어려서, 선태후가 스스로 나라를 다스렸고,위염에게 정치를 하게 하니 위세가 진나라에 떨쳤다."

 

진소왕이 즉위한 후 초기 2년간, 국내정국은 불안정했다. 선태후의 대외방침은 기본적으로 타협이었다. 전쟁을 가볍게 시작하지 않았다. 그녀는 앞장서서 초나라와의 우호관계를 회복했고, 극력 북방의 심복지환인 의거국(義渠國)을 회유한다. 의거융왕(義渠戎王, 義渠駭)이 함양으로 와서 조하하는 기간동안 미팔자는 그와의 사이에 2명의 아들까지 낳는다. 그리고 무수(武遂)의 땅을 한나라에 돌려준다. 소왕2년, 초회왕이 한나라 옹지(雍氏)를 포위하고, 한양왕은 여러번 진나라에 도와달라고 청한다. 그러나 그녀는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그리고 사신에게는 왕사정이 '음탕'한 말이라고 비판바든 말을 한다. 기실 그녀의 뜻을 종합하면, '이익이 없으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위염이 공자장 및 일부 대신의 반란을 진압한 후, 그녀의 대외정책은 즉시 변화한다. 원교근공의 흔적이 아주 분명하다.

 

소왕4년, 제, 위, 한의 3국이 초나라를 공격한다. 선태후도 신속히 병력을 파견하여 초나라를 공격하고, 큰 성과를 거둔다. 무수를 수복하였을 뿐아니라, 양춘, 봉릉등지를 진나라의 판도로 끌어들인다. 그리고, 포판은 초나라에 주어 인심을 얻는다. 그러나 초나라가 기뻐하기에는 너무 일렀다. 악몽이 금방 따라온다. 소왕6년, 그녀는 막내아들 경양군을 제나라에 인질로 보내며 성공적으로 제, 한, 위와 연합하여 초나라를 공격하는 연합군을 결성한다. 그 몇년간, 선태후는 뛰어난 외교수완으로 초나라를 혼내준다. 대장 당매, 경결이 피살되고, 중구, 양성등 18개의 성이 점령당한다. 병사들은 10여만이 사망하고, 초회왕 자신도 기망당하여 몇년간 감옥생활을 하다가 타향에서 죽는다.

 

동방대국 제나라가 선태후의 눈에 들어온다. 이용할 수 있으면 이용하고, 이용할 수 없으면 버리는 역할이었다. 초나라가 참혹하게 당하였지만 제나라는 별다른 이익을 얻지 못한다. 선태후는 원래 제나라에 이익을 나눠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제선왕은 대노한다. 그리하여 진소왕11년, 한, 위, 조, 송, 중산국등 5국이 연합하여 진나라를 공격한다. 그러나, "종약장(縱約長)"이 되지 못하자 그는 염지(鹽氏)까지 진군하다가 물러난다. 그러나 진나라는 가만있지 않았다. 손을 안쓰면 몰라도 한번 손을 쓰면 목숨을 거둔다. 연나라의 악의는 제나라를 토벌할 것을 준비했는데, 직접 진나라에 요청하지 않고, 약간의 계책을 써서 조나라로 하여금 나서서 요청하게 만든다. 선태후는 흔쾌히 응락한다. 그리하여 제선왕의 아들 제민왕이 당하게 된다. 천리대국이 겨우 2개의 자그마한 성만 남기게 되어, 하마터면 멸망할 뻔한다.

 

선태후 집권시기에 외교관계에서 유일하게 우호관계를 상대적으로 유지했던 나라는 연나라이다. 연나라는 '합종쇄진'의 발기국이다. 진나라의 최대의 적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선태후는 진혜왕의 책략을 그대로 승계하여, 적극적으로 연나라와 우호관계를 맺고 일방적으로 인질을 보낸다. 소위 일방적이라는 것은 연나라가 인질을 교환조건으로 보낼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이렇게 하여 진나라는 연나라를 침범하지 않겠다는 맹약의 효력을 보장해 준 것이다.

 

확실히 이런 실용주의적인 외교는 진나라가 한동안 완전히 고립되지 않게 해주었고, 제, 초, 위, 한, 조등의 나라들이 자주 스스로 혼란에 빠지고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게 만들었다. 한때는 합종으로 한때는 연횡으로 오갔다. 진나라는 이를 이용하여 영토를 늘여간다.

 

소왕34년, 진나라는 중원에서 위나라와 조나라의 군대를 격파하고, 중대한 승리를 거둔다. 진소왕은 후원문제를 해결할 때가 도래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범수에게 말한다: "과인이 명을 받은지 오래되었고, 의거의 일이 시급하다. 과인이 스스로 태후에게 청하겠다" 즉, 그는 후원의 우환을 제거하기 위하여 모친의 지지가 필요했다. 다음 해 "선태후는 거짓으로 속여서 의거융왕을 유인하여 감천궁에서 죽이고, 병력을 일으켜 의거국의 잔여세력을 토벌한다. 그리하여 진나라는 농서, 북지, 상군을 갖게 되고, 장성을 축성하여 오랑캐를 막는다." 이는 미팔자의 아들이 한 마지막 일이다. 소왕41년, 진소왕은 모친의 권력을 회수하고, 위염등을 축출한다. 다음해 십월, 선태후는 사망하고 지양(芷陽) 여산(酈山)에 묻힌다.

 

우리는 지금 미팔자가 글을 읽었는지 여부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초나라의 귀족으로서, 그녀의 자질은 분명 보통이 넘었을 것이다. 궁정에서 묘당까지 그리고 묘당에서 '국제'로 그녀의 한걸음한걸음은 종용(從容)하고 진정(鎭定)되었다. 연환술을 교묘히 써서, 안정과 부국강병을 이루고 발전한다. 천하의 제후들이 모두 제나라에 머리를 숙이게 만든다. 마비백(馬非百) 선생의 그녀에 대한 평가는 아주 높다. "공로는 장의, 사마촉이 파촉을 공격하여 얻은 것에 비하여 손색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