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청청자긍(靑靑子矜)
진나라의 선태후는 이름이 미팔자(羋八子)이다. 진나라 혜문왕(惠文王)의 비(妃)이며, 헤문왕이 죽은 후 태자인 무왕(武王)이 등극하였고, 무왕이 죽은 후 자식이 없어서, 그의 동생인 소왕(昭王)이 등극했다. 소왕의 모친인 미팔자는 자연히 선태후에 올랐다. 사상 첫번째로 태후(太后)라고 불린 인물이다. 이 여인은 아주 대단했다. 그 이후 뛰어난 정치수완으로 진나라의 정치를 36년간 손안에 쥐고 있었다. 이 여인은 또한 아주 독특했다. 다른 여인들도 남자들과 어울려 즐기지만,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요조숙녀인 것처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태후의 자리에 앉은 미팔자는 공공연히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성생활을 털어놓곤 했다. 이는 중국의 수천년간 봉건사회역사상 유일무이한 경우이다.
<<전국책. 한책>>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초(楚)나라가 한(韓)나라를 포위했다. 그러자 한나라는 사신을 진나라로 보내어 지원을 요청했다. 진나라에서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한나라에서는 다시 상근(尙靳)을 보낸다. 상근은 순망치한의 관점에서 진나라를 설득한다. 선태후는 다 듣고 난 후, 상근의 말은 이치에 맞는다고 보고 그를 단독으로 들어오게 해서 접견했다. 이때 그녀는 이런 말을 한다: 내가 선왕과 잠자리를 할 때, 선왕이 엉덩이로 내 몸을 누르면 내가 무거워서 견디기 힘들었다; 그러나 선왕이 온몸으로 내 몸 위에서 누르면 조금도 무겁게 느껴지지 않았다. 왜 그런지 아느냐? 바로 그 자세는 나에게도 이롭기 때문이다. 만일 한나라를 구해주느라고 천금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면 나에게 무슨 이로운 게 있는가?
선태후의 비유나 말은 정말이지 태후가 해서는 안되는 말일 것이다. 사마천의 견해에 따르면, 소왕이 막 즉위한 후, 선태후는 자신이 초나라사람이므로, 이때 한나라를 도와서 자기의 친정인 초나라를 힘들게 하고싶지 않은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도와주지 않을 것이면 그냥 도와주지 않으면 되지, 왜 하필이면 아들도 있고, 대신들도 있는 앞에서 자기와 선왕과의 잠자리 얘기까지 꺼내는가? 이런 음탕한 말을 하면 아들의 입장이 곤란해지지 않겠는가? 역시 <<전국책>>에서는 그녀에 대하여 한마디 했고, 후세의 문인들도 이것을 빌미로 그녀에 대하여 좋게 말하지 않았다. 이게 무슨 국사를 논하는 자리인가? 분명히 약간은 성희롱하는 것같다. 상근이 경박한 인물이었다면, 아마도 선태후가 적막을 이기기 힘들어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선태후를 유혹하고자 했을지도 모른다.
선태후가 이처럼 거리낌없이 행동하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진나라에서의 지위가 너무나 확고하고 대단했기 때문이다. 그녀에게는 두 남동생이 있는데, 하나는 부친이 다른 동생인데 양후(穰侯)이며, 이름은 위염(魏冉)이었다. 또 하나 부친이 같은 동생은 화양군(華陽君)이었다. 소왕의 모친이 같은 동생들(즉, 선태후가 낳은 아들들)로는 고릉군(高陵君), 경양군(涇陽君)이 있었다. 이들 형제들 중에서는 위염이 가장 뛰어났다. 그는 혜왕, 무왕시기에 조정에서 관직을 지냈다. 무왕이 죽은 후, 여러 동생들이 왕위를 놓고 싸울 때, 소왕은 위염의 도움을 받아 왕위에 순조롭게 오를 수 있었다. 위염은 장군에 임명된 다음 해에 소왕의 여러 동생들을 제거함으로써 진나라에 위세를 날렸다. 선태후가 순조롭게 수렴청정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충성스러운 동생인 양후 위염과 뗄레야 뗄 수없는 관계에 있었다. 선태후는 비록 수렴청정을 하였지만, 흉금이 넓은 편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아들인 소왕에게 일정한 권력의 공간을 남겨주었다. 그리하여 소왕은 혼자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은 어느 정도 할 수가 있었다. 위에서 언급한 한나라를 지원해주는 일과 관련하여 말하자면, 한나라사람들은 선태후의 말에 정면으로 반박할 생각은 없었다. 그리하여 나중에 몰래 단독으로 젊은 소왕을 만나서 이해관계를 설명한다. 소왕은 선태후가 좋아하든 말든 관여치 않고, 나중에 군대를 보내어 한나라를 도와준다. 그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이렇게 하더라도 그를 사랑하는 모친이 이 일로 그를 힘들게 하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만일 그가 무측천과 같이 자기의 아들마저 죽이는 어머니를 두었다면, 감히 그렇게 할 수 있었겠는가?
여인은 일단 권력의 정점에 서게 되면, 그녀의 몸은 마치 권력이 쓰러지지 않게 보호하는 방패처럼 된다. 다른 사람의 앞에서 그녀가 자신을 마치 발정난 암늑대처럼 하는 것만 보아서는 안된다. 권력과 욕망이 충돌할 때 어느 것을 중요한가의 문제에 있어서, 여성정치가인 미팔자는 아주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의거왕(義渠王)과 사통하던 시기에도 그녀는 음탕하기는 했지만 국가를 잊지는 않았다. 나중에 그 의거왕에게 싫증이 나자 그녀는 바로 아이디어를 내어 피한방울 묻히지 않고 처치해 버린다. 이어서 쾌도난마식으로 병력을 일으켜 나라까지 집어삼킨다. 이는 진나라가 혜왕이 의거국의 15개 성을 빼앗은 이래로 진나라가 흉노에 대하여 거둔 아주 중요한 승리이다. 나중에 진시황에 천하통일하는데 좋은 기반을 마련해주었다고 할 수 있다. 그녀의 이에 대한 이야기를 사마천은 그의 <<사기. 흉노열전>>에서 아주 상세히 기록했다: "....진소황때, 의거융왕(義渠戎王)과 선태후가 놀아났고, 두 아들을 두었다. 선태후는 속임수를 써서 의거융왕을 감천에서 죽인다. 그리고 병사를 일으켜 의거의 잔당을 토벌한다. 그리하여 진나라는 농서, 북지, 상군을 차지하고, 장성을 쌓아 호(胡, 흉노)를 막는다."
역대에 많은 학자들은 그녀가 의거왕을 죽인 데 대하여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해를 하지 못한 것이다. 그녀가 이렇게 한 데에는 분명히 다른 이유가 있을 것으로 보았다. 그렇지 않다면 의거왕과의 사이에 이미 두 아들이나 낳은 그녀가 하룻밤에 만리장성도 쌓는데, 어떻게 죽일 수가 있단 말인가? 사실 필자의 생각으로 이 점은 이해하기가 어렵지 않다고 본다. 선태후의 마음 속에는 영원한 애인도 없고 단지 영원한 이익만 있을 뿐이다. 자기의 아들을 위하여, 그녀는 뭐든지 할 수 있었다. 자기의 사사로운 정을 포함한 모든 것은 반드시 그녀와 아들이 이 국가를 통치하는데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쓰여야 했다.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눈물콧물을 흘리는 그러한 멍청한 여인이 아니었다. 남자란 그녀가 보기에 그저 언제든지 즐기고 바꿀 수 있는 맛있는 요리와도 같았다. 약간의 취미생활이었던 것이다. 그녀가 진정으로 좋아한 것은 권력이다. 여러해동안의 궁중투쟁을 거쳐, 그녀의 마음 속에서 '여인네의 여린마음(婦人之仁)'은 일찌감치 독랄한 마음과 손속으로 대체되었다. 그렇지 않다면 그녀는 권력의 꼭대기까지 오를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하물며 그때 그녀에게는 위추부(魏醜夫)라는 새로운 애인이 생겼었다. 옛것을 버리지 않고서야 어찌 새것을 얻겠는가?
그러나 호랑이가 아무리 사나워도 조는 때는 있기 마련이다. 나중에 진나라로와서 소왕의 총애를 받는 위나라출신의 유세객이 있는데, 이름이 범수(范睢)이다. 그는 소왕을 통해서 부귀영화의 꿈을 실현하고자 했고, 이를 위하여 기회를 틈타 이들 모자간을 이간질한다. 선태후의 권세가 마침표를 찍을 때가 온 것이다.
범수는 진소왕에게 이렇게 말한다: "제가 이전에 함곡관 동쪽에 있을 때 제나라에 전단(田單)이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제왕(齊王)이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진나라에는 선태후, 양후, 경양군, 화양군이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대왕께서 계시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국가정권을 통할하고 생사여탈권을 장악한 사람이라야 군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현재 태후가 행정을 마음대로 하여 대왕에게까지 미치질 않습니다. 양후는 사신을 내보내면서도 대왕에게 보고하지 않습니다. 경양군, 화양군은 마음대로 범죄라를 처벌하지만 대왕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고릉군은 사람을 쓰거나 내보내면서 대왕에게 물어보지도 않습니다. 이 네 귀족이 있는데, 국가가 어찌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대왕은 있어도 좋고 없어도 그만인 존재로 전락했습니다. 이런 정권이 어떻게 전복되지 않겠습니까? 대왕이 어떻게 천하를 호령하겠습니까...내가 보기에 대왕은 현재 혼자서 외롭게 조당에 앉아있는 것같습니다. 가장 우려되는 것은 이후에 진나라를 통치하는 사람이 대왕의 후손이 아닐 것같다는 것입니다" 어느 군왕이 자신이 권력에서 소외되는 것을 바라겠는가. 범수의 이 말은 진소왕의 아픈 곳을 제대로 찔렀다. 진소황은 깜짝 놀랐다. 그는 정말 권력을 장악한 형제, 친척들이 자기의 보좌를 빼앗을까봐 걱정되었다. 그리하여 바로 선태후의 권력을 빼앗아버리고, 다른 형제, 친척들의 권력도 빼앗고는 변방으로 보내버렸다. 양후가 서울을 떠날 때, 마차가 천량이나 되었고, 마차에는 진귀한 보물들이 가득 실려서 재산이 나라와 맞먹을 정도였다. 소왕은 범수를 응후(應侯)에 봉하고, 제공이 관중을 중보(仲父)로 부른 것처럼 그를 보(父)라고 불렀다.
진소왕이 그의 모친에 대하여는 인의를 다한 것이라고 할 수 가 있다. 단지 조정에 간여할 권한만을 빼앗았을 뿐, 그녀가 위추부와 사랑놀음을 하는 것에 대하여는 상관하지 않았다. 다만, 애인과 놀 수만 있을 뿐 다른 것은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되었는데, 선태후의 마음이 즐겁겠는가? 그 때이후 선태후는 우울증에 빠져 헤어나지 못했다. 아들에게 지고 싶어하지 않아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죽기 전에 유언도 황당하게 남겼다. 그녀는 자신이 사랑하는 위추부를 자기의 묘에 같이 묻어달라고 한 것이다. 위추부는 이 말을 듣고는 걱정으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진소왕도 난감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모친의 화를 돋굴 생각은 없었다. 그리하여 용예(庸芮)라는 인물을 보내어 선태후를 설득하여, 위추부와 함께 묻히고 싶다는 생각을 거두게 한다. 용예는 선태후에게 이렇게 말했다: "태후께서는 사람이 죽은 후에도 지각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선태후는 "사람이 죽은 후라면 당연히 아무 것도 모르겠지." 그러자 용예가 이어서 말한다: "태후와 같이 이렇게 똑똑한 분이, 사람이 죽고나면 아무런 지각이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아시고 계시는 분이, 왜 아무런 이유도 없이 자기가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으려고 하십니까? 만일 죽은 사람이 그래도 뭔가를 안다고 한다면, 선왕은 일찌감치 태후에 대하여 원한이 뼈에 사무쳤을 것입니다. 태후께서는 속죄하려고 해도 마땅치 않은데, 하물며 위추부를 데리고 함께 선왕을 만나시겠습니까." 선태후는 용예의 말이 이치에 맞다고 생각해서, 더 이상 위추부를 순장해달라는 요구를 하지 않았다.
아들에게 권력을 빼앗긴 선태후는 그후 2년도 되지 않아 병으로 죽는다. 그녀의 음탕한 가풍은 아마도 후대에도 이어진 것같다. 그녀의 손자며느리인 조희에 이르러, 먼저 여불위와 사통하고, 다시 노애와 어울렸다. 그러나, 진시황은 선조인 진소왕처럼 마음을 써주지 않았다. 이것은 뒷날의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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