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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미월)

진선태후(秦宣太后) 미월(羋月)과 의거왕(義渠王)이 이야기는 사실일까?

by 중은우시 2018. 11. 9.

글: 정보(程步)


의거국은 진나라의 도성 함양(咸陽)의 서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지금의 감숙성 경양(慶陽)이다. 민족은 고강족(古羌族)의 한 갈래이며, 험준한 산속에서 수렵과 유목을 위주로 했다. 사서에 의거에 관한 기록은 많지 않다. <사기.흉노열전>에는 36글자의 의거와 진선태후 미월과의 관계가 언급되어 있다.


"진소왕시(秦昭王時), 의거융왕여선태후란(義渠戎王與宣太后亂), 유이자(有二子). 선태후사이살의거융왕어감천(宣太后詐而殺義渠戎王於甘泉), 수기병벌잔의거(遂起兵伐殘義渠)"

(진소왕때 의거융왕이 선태후와 통간하여, 두 아들을 낳는다. 선해누는 감천궁에서 의거융왕을 속여서 죽이고, 병력을 보내어 남은 의거를 토벌한다.)


TV드라마 <미월전>에서는 이 36글자를 가지고 여러 편에 걸친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 여기에 살을 붙였다. 영향력이 비교적 컸던 글을 보면 이렇게 쓰고 있다:


"기원전306년, 진소왕이 국군이 되었는데, 나이가 아직 어려서, 모친인 선태후가 섭정한다. 그녀는 의거융왕을 정면으로 정벌하려는 책략을 바꾸어, 회유하여, 구슬리고, 부식시켜, 융왕의 의지를 타락시키는 정책을 채택한다. 그녀는 의거왕에게 서신을 보내 감천궁으로 초대하고, 장기간 감천궁에 머무르게 한다. 그리고 편안하고 잘 살도록 대접해준다. 나중에 의거왕이 선태후와 음란한 관계를 맺어 두 아들을 낳아, 

 34년후(기원전272년), 선태후는 감천궁에서 의거왕을 죽이고, 이어서 병력을 일으켜 의거를 친다. 이렇게 의거는 멸망하고, 영토는 진나라에 편입된다."


시간, 장소, 인물, 사건이 모두 갖추어져 있다. 마치 근거가 확실하여 의심의 여지는 없을 득하다. 이 해석에 따르면, 원래 선태후는 의거왕과 간음한 것이 아니라,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친 것이다. 진나라가 의거국을 멸망시킨 것은 전쟁터에서가 아니라 침상에서였다.


이런 견해가 맞을까? 당연히 아니다.


상상은 가능하고, 추리도 가능하지만, 반드시 분명히 밝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속이는 것이고, 속이는 것은 비도덕적이다. 그래서 독자들은 오해에 빠지고 거짓을 진짜라고 믿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죄악이다.


"그녀는 의거융왕을 정면으로 정벌하려는 책략을 바꾸어, 회유하여, 구슬리고, 부식시켜, 융왕의 의지를 타락시키는 정책을 채택한다." 이 말에 근거가 있는가? 없다.

"그녀는 의거왕에게 서신을 보내 감천궁으로 초대하고, 장기간 감천궁에 머무르게 한다." 이 말에 근거가 있는가? 역시 없다.

"의거왕으로 하여금 진나라에 대한 경계심을 완전히 풀도록 한다." 이 말에 근거가 있는가? 없다.

"34년후(기원전272년), 선태후는 감천궁에서 의거왕을 죽이고" 이이 34년후(기원전272년)"에 근거가 이ㅏㅆ는가? 없다. 의거왕이 언제 처음 감천궁에 들어갔는지 역사서에 기록이 없다. 더더구나 그가 감천궁에 장개간 거주했다는 말도 없다. 진소황36년에 한 마디 문구가 있을 뿐이다: "금의거지사이(今義渠之事已)"(이제 의거의 일은 끝났다). 이것을 가지고 이 해에 의거왕을 죽였다는 결론을 끌어낼 수는 없다.

"이어서 병력을 일으켜 의거를 친다. 이렇게 의거는 멸망하고, 영토는 진나라에 편입된다." 이 말에 근거가 있는가? 없다. <흉노열전>에서는 그저 "수기병벌잔의거(遂起兵伐殘義渠)"라고만 했ㅇ르 뿐이고, 이때 의거국이 멸망했다고 하지는 않았다.

이 짧은 글에서 다섯 곳이나 억측이 포함되어 있다.


다시 <흉노열전>의 그 36글자를 살펴보도록 하자. 그 말도 실은 믿기가 힘들다. 이 서른 여섯글자에 숨은 의미는 이러하다. 진나라가 비열한 수단을 쓰지 않았더라면, 선태후가 자기의 몸을 던지지 않았더라면, 선태후가 거짓말로 속여서 의거왕을 죽이지 않았더라면, 진나라는 의거국을 쳐서 무너뜨릴 수 없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이건 말도 안된다. 진소왕때 진나라는 강하고 의거국은 약했다. 이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진나라가 의거왕을 죽이고자 한다면 왜 선태후가 몸을 바치고, 두 아들을 낳고, 그 후에 다시 거짓말로 속여야 비로소 죽일 수 있었을까? 그냥 죽여버리면 되지 않는가? 큰 나라의 국군인 초회왕(楚懷王)도 진나라의 수도 함양으로 끌려와서 갇혀있다가 죽지 않았던가? 의거를 멸하려면 그냥 공격하면 될 것이다. 중원의 대국인 제, 초, 연, 한, 조, 위의 어느 나라를 진소왕이 공격하지 않았던가. 누구를 겁냈던가. 촉만 해도 의거보다는 땅도 크고, 사람도 의거보다 많다. 길도 의거보다 훨씬 멀고, 험하다. 이백이 촉도는 험난해서 하늘을 오르는 것보다 힘들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사마착이 촉을 멸망시켰다. 의거와 같은 소국을 치는데 그다지 힘들게 뭐가 있단 말인가. 굳이 태후의 몸을 바쳐야 했다니, 너무나 황당하지 않은가?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사기>의 기록 자체에도 문제가 있다. <사기. 진본기>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진혜왕11년에 이미 의거국에는 진나라가 현(縣)을 설치하고, 의거왕은 진나라의 신하가 된다. "십일년(十一年), 현의거(縣義渠)", "의거군위신(義渠君爲臣)" 여기에 이미 명확히 말하고 있다. 의거국의 국군은 진나라의 신하가 되었다. 설사 의거왕이 여전히 현지에서 통치한다고 하더라도 그 성격은 완전히 바뀐 것이다. 그는 반드시 진왕의 명을 들어야 한다. 60년전에 진혜왕이 이미 의거국을 멸망시켰는데, 왜 60년후에 <열전>에서는 진소왕 36년에 의거가 다시 나타난단 말인가. 더욱 황당한 것은 <열전>의 진소왕이 "벌잔의거"한 이 위대한 승리가 <진본기>에는 한 마디도 언급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성 하나를 빼앗아도 정중하게 기록해놓았는데. 예를 들어, "4년 포판을 취하다" "칠년 신성을 무너뜨리다." 그런데 제후국을 멸망시켰는데 글자 한자 남기지 않았다니 이상하지 않은가? <진본기>뿐만 아니라, 진나라 장군대신의 열전에서도 이런 위대한 승리에 대하여 한 마디도 적지 않았다. 이는 이상하다. 우리는 누구를 믿어야 하는가?


우리는 알고 있다. <사기>에서 <본기>의 신뢰도는 <열전>보다 높다는 것을. 그래서 <본기>와 <열전>이 모순되면 <본기>의 기재를 믿어야 한다는 것을.


<사기.진본기>의 기재에 따르면, 진나라가 의거국을 병합하는 전쟁은 주로 진혜왕와 진무왕때 일어났다. <사기.표>의 기록에 따르면, 진혜왕7년(기원전331년), 의거국에 내란이 일어나 진나라의 서장조(庶長操)가 병력을 이끌고 가서 평정했다." 


아마도 이번에 진나라에서 쓴 전략은 괵(虢)국을 공격하는 길을 내달라고 했을 것이다. 진나라가 의거의 내란을 평정한 후, 그 기세를 틈타 의거왕과 국가를 모두 지배한다. 그래서 <사기.진본기>에는 4년후인 진혜왕11년에 전체 의거국에 진나라  현이 설치되고, 의거왕은 진나라의 신하로 되었다고 적었다. 여기에서 명확히 말하고 있다. 의거국의 국왕은 이미 진나라의 신하로 되었다. 


다만, 의거국은 험준한 산악지대에 있다. 함양과의 거리가 6백리나 된다. 당시는 교통이 불편하고 통신이 낙후되어 반란이 발생할 수도 있다. 그래서 13년후인 진혜왕 후원10년에 진나라는 다시 한번 의거에 군대를 파견한다. 그리고 25개성을 점령한다. 이는 명목상의 진나라 현, 진나라 신하에서 실질적인 점령으로 바뀐 것을 의미할 것이다.


<진본기>에서 마지막으로 진나라와 의거국의 전쟁이 나오는 것은 진무왕원년이다. 이 해에 진나라는 다시 한번 출병하여 의거를 친다. 이때는 단지 세 글자만 남겼다. "벌의거(伐義渠)"(의거를 정벌했다). 그후에는 진시황이 육국을 멸하고 천하를 통일할 때까지 의거국과의 전쟁이 나오지 않는다. 심지어 다시는 '의거'라는 글저가 진기(秦紀)에 나타나지 않는다. 공성약지는 자고이래로 큰 공이다. <진본기>는 기재가 완비되어 있고, 성 하나를 공략하면 모두 기록으로 남겼다. 그런데 그 후에 의거를 공격한 전공이 그 어느 누구에게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런 결론을 얻을 숭 ㅣㅆ다.


"진무왕 원년에 의거국은 이미 철저히 멸망했다. 진혜왕 진무왕의 부자 2대에 걸쳐 20여년간의 노력으로 마침내 진나라는 의거국을 병합하는 위업을 달성한 것이다. 이 일은 선태후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렇다면, <흉노열전>의 그 36자는 분명 모종의 목적이 있는 것이다. 만일 <흉노열전>의 말을 굳이 믿겠다면, 그것은 40여세의 선태후가 권세를 등에 업고 전의거왕을 능멸한 것으로 봐야 한다. 투항하여 신하가 된 전의거왕은 감천궁으로 불려가서 남첩이 된다. 그저 선태후가 욕망을 푸는 대상이 된 것이다. 전의거왕을 가지고 놀다가 실증이 나자 죽여버린 것이다. 그 뒤의 '벌잔의거'는 그저 사마천이 덧붙인 '찌꺼기'에 불과하다. 


사기를 읽다보면 어떤 역사사건이 진시황을 치켜세우는 경우에는 사마천이 반드시 즉시 그 뒤에 글자를 덧붙인다. 이를 통해서 앞에 끌어올린 것을 다시 끌어내린다. 교묘하게 독자들을 그 방향으로 끌고 가는 것이다. 뒤에 덧붙이는 이 글자는 어떤 경우 멸 글자의 심리묘사일 때도 있고, 어떤 때는 누구에게 말한 것인지도 모르는 몇 마디 말도 있다. 필자는 그것을 '찌꺼기'라고 부른다. 이 찌꺼기는 비록 적지만 작용은 아주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