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 역사인물 (유선)

제갈량 사후 유선이 30년이나 촉한을 통치할 수 있었던 이유는...?

by 중은우시 2018. 11. 15.

글: 지역사(知歷史)


유비(劉備)의 아들 유선(劉禪)을 얘기하면 세상사람들은 모두 멸시한다. 왜냐하면 세상사람들의 눈에 유선은 "도저히 안되는 아두(阿斗)"이기 때문이다. 심한 사람은 그를 "망국(亡國)의 혼군(昏君), 상방(喪邦)의 용인(庸人)"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진실한 유아두는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유비가 백제성에서 병사한 후, 유선은 촉한의 황제가 된다. 그는 모두 41년간 황제로 있었다. 삼국시기의 각국 황제들 중에서 재위기간이 가장 긴 황제이다. 그중 제갈량은 유선을 11년간 보좌했다. 제갈량이 오장원에서 죽은 후, 유선은 30년이나 더 황제로 있었다. 군웅이 할거하던 동란의 시대에 멍청한 그가 어떻게 이렇게 오랜기간 황제로 있을 수 있었을까?


그래서 천여년이래로 세상사람들은 유선을 오해했고, 유선의 진면목을 몰라봤던 것이다. 그렇다면, 유선은 도대체 어떤 남모르는 뛰어난 점이 있었을까?


첫째, 유선은 대용약겁(大勇若怯)했다.


유선은 황제에 등극했을 때 나이가 겨우 17살이었다. 유비는 임종때 특별히 당부한다: "너는 승상과 일하면서 부친처럼 모셔라!" 그 뜻은 유선으로 하여금 제갈량을 부친처름 여기라는 말이었다. 그리고, 유선에게 "정무를 볼 때 큰 일이건 작은 일이건 모두 제갈량에게 결정하도록 하라"고 한다. 즉 모든 일은 한가지 원칙을 따르라는 것이다 승상께서 말씀하시는대로 해라. 그래서 당시의 제갈량은 대권을 손에 움켜쥐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통이 큰 유선도 확실히 모든 일에 겸양하며, "부친으로 보셨다" 황제로서 이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나중에 유선의 나이가 점점 들면서, 왕조의 통상적인 법도에 따라, 제갈량은 당연히 권력을 점차로 유선에게 넘겨주어야 했다. 유선이 순조롭게 '전정(轉正)' 즉 진정한 황제가 되도록 해야 했다. 나중에 제갈량은 북벌을 주장한다. 유선은 비록 찬동하지 않지만, 그래도 제갈량에게 힘을 실어준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유선은 "군주와 신하가 불화하면, 반드시 내부에 변고가 생긴다.'는 이치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유비의 가르침과 어른에 대한 존중을 엄격하게 이행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가 내부의 지도부를 단결시켜서 통치집단의 안정을 꾀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유비는 대지약우(大智若愚)했다.


유선은 집정기간동안 사람을 잘 골라서 썼다. 처음에는 전권을 제갈량에게 맡겼다. 이것은 그의 총명한 점이다. 제갈량은 나라를 잘 다스렸다. 제갈량이 죽은 후에도 유선은 여전히 제갈량의 방침을 따른다. 심지어 제갈량이 선발해놓은 후보들을 기용한다. 동시에 그는 정치적 두뇌가 있었다. 제갈량이 죽은 후, 유선은 승상제도를 폐지하고, 비위를 상서령 겸 대장군으로 삼고, 장완을 대사마로 삼는다. 두 사람은 권력이 서로 교차했고, 서로 견제했다. 다만 각자 치중하는 면은 있었다. 장완은 정무를 위주로 하며 군사를 겸했고, 비위는 군사를 위주로 하면서 정무를 겸했다. 궁정과 내정의 대권을 한 사람의 손에 들어가게 하지 않은 것이다. 이런 새로운 정치국면은 유선이 절대로 다시 크고 작은 모든 일을 승상 한 사람이 결정하도록 하여 자신이 대권을 쥐지 못하는 난감한 국면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게 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장완이 죽은 후, 유선은 더 나아가 스스로 국사를 처리한다. 그가 직접 촉한의 정권을 장악해서 처리한 기간이 19년에 달한다.


이 일련의 조치와 배후의 치국이념은 모두 유선이 절대로 IQ낮은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더더구나 혼군은 아니다. 오히려 대지약우의 총명한 사람이다.


세상사람들은 후주 유선에 대한 평가를 8자로 개괄했다: "연약무능(軟弱無能), 현우불변(賢愚不辨)" 그중 주요한 이유는 바로 유선이 싸우지도 않고 항복해서 구차하게 목숨을 연명했으며 포로로 잡힌 후에는 "낙불사촉(樂不思蜀)" 했기 때문이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유선이 위나라에 투항한 후, 사마소가 연회를 베풀어 촉국의 군신을 접대한다. 그때 특별히 촉 지방의 음악을 연주하게 한다. 이를 통해 유선의 반응을 관찰하고자 한 것이다. 촉나라의 옛 신하들은 고국음악을 듣고는 비통한 모습을 보인다. 오직 유선만이 슬퍼하지 않고 웃음을 보이며, 기뻐했다. 사마소는 당시에 옆에 앉은 사람에게 이렇게 말한다: 사람이 심간(心肝)이 없어도 어찌 저 정도일 수 있는가. 나중에 사마소는 유선에게 물어본다. 촉국이 그립지 않느냐고. 유선은 즉시 6글자로 대답하여, 후세인들에게 욕을 먹는다: "차간락(此間樂), 불사촉(不思蜀)"


바로 이런 이유로 "낙불사촉"이라는 성어는 유선을 철저히 체면도 없고 기개도 없는 멍청이로 규정짓게 된다. 그러나, 당시의 객관적인 상황을 결합해서 살펴보면,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유선의 '낙불사촉'은 그가 연약하고 무능해서가 아니다. 그가 능굴능신(能屈能伸)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당시 조위는 성도를 포위했고, 유선은 쌍방의 실력을 고려한 후, 분명하게 알았다. 자기가 죽어라 저항하면 병사들에게 사상자가 많이 발생하게 되고, 아마도 조위는 도성(屠城)하게 될 거라는 것을. 그렇게 되면 백성들에게 해가 미친다. 심사숙고를 거친 후, 유선은 문을 열고 투항한 것이다. 그후 포로가 되어 낙양으로 끌려갔고, 안락공에 봉해진다.


그렇다면, 이것을 가지고 유선이 겁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다. 그는 자신의 개인적인 이익을 위하여 백성들이 자신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게 할 수도 있었다. 마지막에 나라는 멸망하더라도, 자신은 포로로 잡혀서 여전히 낙불사촉할 수 있다. 그러나 유선은 스스로 투항하여 매국이라는 오명을 얻는다. 그러면서 백성들의 목숨과 재산을 지켜주었다.


망국이후, 유선은 자신의 생명도 다른 사람에게 장악되어 있었다. 살아남기 위하여, 유선은 반드시 바보인 척 해야 했다. 매번 자신의 재능을 감추어야 했다. 그래서 '차간락, 불사촉'이라는 6글자는 바로 자신을 보전해주고 선종(善終)할 수 있게 해준 법보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