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 역사인물 (유선)

유선(劉禪) 외도사건: 가정폭력사건으로 불거지다

중은우시 2013. 9. 14. 00:30

글: 섭지추(葉之秋) 

 

건흥12년 이월, 즉 234년, 촉한(蜀漢)의 도성에는 조야를 깜짝 놀라게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아직 미모다 남아있는 중년의 호씨(胡氏)가 남편인 유염(劉琰)을 가정폭력으로 고발한 것이다. 조사를 하다보니, 이것은 당금황제 촉한의 후주 유선의 외도사건으로까지 발전한다. 그리하여 촉국의 상하에서는 의론이 분분하고, 심지어 전선에서 전투를 지휘하고 있던 제갈량까지 놀라게 만든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사건일까?

 

처음에 사건을 보고받았을 때, 성도태수(成都太守)는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다. 그러나 유염의 이름을 듣고는 바로 정신을 차린다. 촉한의 개국공신 유염에 관련된 사건이니 보통 사건이 아니다. 그렇다면 유염은 어떤 사람인가?

 

촉한 초기, 유염은 대명이 자자한 인물이다. 일찌기 유비가 예주자사(豫州刺史)로 있으면서, 산동,하남 일대에서 힘들게 싸우고 있을 때, 유염은 손건(孫乾), 미축(麋竺)과 함께 유비를 따라다녔다. 촉한의 여러 관리들 중에서, 관우, 장비를 제외하고는 이들 3명의 배분이 가장 높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이다. 유비가 사천을 평정한 후, 유염을 고릉태수(固陵太守)에 봉한다. 지역이 협소한 촉한에서, 그것은 이미 실권이 큰 주요관직이었다. 나중에 유비가 황제에 오르면서, 유염은 후장군(後將軍), 거기장군(車騎將軍)에 봉해져서 조정에서 지위가 상서령(尙書令) 이엄(李嚴)에 바로 다음가는 고위직이 된다.

 

그러나 관직이 높다고 하여 도덕적 덕행이 높은 것은 아니다. 고위직에 있는 유염이 도대체 호씨에게 어떻게 했기에 호씨가 체면에도 불구하고 직접 나서서 집안의 추악한 내용을 까발린단 말인가.

 

성도태수는 호씨를 만나서 그 연유를 물어본다.

손에 곤봉을 든 자들이 둘러싸고 있고, 엄숙한 표정의 성도태수가 앞에 앉아있는데도, 호씨는 전혀 두려운 기색이 없었다. 호씨의 진술에 따르면, 호씨는 근검절약하며 집안을 꾸려가고, 분수를 지켜서 생활했다. 그러나 유염은 사람들 앞에서 결발처자(結髮妻子)인 자신을 무욕하고, 처인 호씨를 강제로 버리고자 한다. 호씨가 따르지 않자, 유염은 주먹질을 했다는 것이다. 호씨는 울면서, 성도태수에게 이를 바로잡아달라고 호소한다. 부인에게 폭력을 행사한 악덕 남편을 혼내달라는 것이다.

 

성도태수는 묻는다. 도대체 유대인이 어떤 악덕한 짓을 했고, 왜 구타를 하게 되었는지? 그러자 호씨는 3가지 이유를 말한다.

 

첫째, 남편 유염은 촉한에서 십여년이 되었지만, 업무에서 중용받지 못하자 마음 속으로 원한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부인에게 화풀이를 한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유염은 거기장군에 올라 삼공(三公)의 지위에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선제 유비시대에는 유염에게 어느 정도 실권이 있었지만, 승상 제갈량이 정권을 장악한 후로는 유염이 비록 군내에서 고위직에 있었지만, 수중에 병마는 하나도 없었으며, 고위회의에도 참석할 수 없었다. 제갈승상은 여러번 북벌했지만, 거기장군 유염은 모두 배제된다. 유염은 마음 속으로 울적해서 마누라를 두들겨패곤 한 것이다.

 

둘째, 유염은 생활이 사치했다. 업무능력을 평범했다. 물자에서는 호화사치를 누리고자 했다. 가마이건 말이건 의복이건 아니면 음식도구이건 모두 가장 좋고 가장 귀한 것을 찾았다. 이 점은 전체 촉한에서 모두 알고 있는 것이다. 집안에 약간의 돈이 있으면 유염이 모조리 써버렸다. 실권이 없으므로, 유염에게는 급여외에는 다른 수입이 없었다. 집안일을 하는 여주인으로서, 호씨는 여러번 유염에게 근검절약할 것을 얘기하였지만, 유염은 그 말을 듣지 않았을 뿐아니라, 오히려 호씨에게 주먹질을 해냈다. 남성우월주의가 아주 심했다.

 

셋째, 유염은 성격이 풍류를 좋아했다. 이전에 선제를 따라 남북으로 싸우러 다닐 때는 그래도 조금 자제했었는데, 선제가 붕어한 후, 유염은 곳곳에서 수십명의 젊고 아름다운 여자들을 찾아와서, 하루종일 먹고마시고 놀았다. 그리고 비천한 시첩들과도 함께 노래하고 춤을 췄다. 조정대신의 체통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제갈승상이 유염의 사정을 알고 난 후, 유염을 찾아서 혼을 낸 바 있다. 유염에게 집안에서 잘 책이나 읽고 마음을 수양하라고. 그러나 유염과 그 수십명의 시첩은 함께 소리높여 호화사치한 생활을 노래한 <노영광전부(魯靈光殿賦)>를 불렀다. 이는 승상대인도 전혀 눈아래 두지 않는 행동이다. 호씨는 여러번 남편에게 권했으나, 오히려 남편에게 질투한다고 욕을 먹었고, 더 얘기하면 친정으로 돌려보내겠다고 말했다.

 

말을 마치고 호씨는 눈물을 주루룩 흘린다. 호씨는 말했다. 가장 미운 일은 유염이 집안에서 자신을 구타할 뿐아니라, 이번에는 여러 하인들이 앞에서 자신을 구타했다는 것이다. 부하 사병에게 신발로 자신의 얼굴을 때리게 시켰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 본인에 대한 모욕일 뿐아니라, 조정의 예법에 대한 모역이라는 것이다. 더더구나 자신은 당당한 거기장군의 부인임에야.

 

호씨의 가족은 호씨를 집으로 데려가서 상처를 치료했고, 반달 후에야 그녀는 건강을 회복한다. 몸이 약간 좋아지자, 호씨는 바로 성도태수의 관아를 찾아가서 고발한 것이다. 호씨는 자신의 뺨을 가리키며, 이렇게 오래되었는데도 붉게 부어오른 것이 아직도 빠지지 않았다고 말한다.

 

성도태수는 그녀의 말을 듣고 화가날 수밖에 없었다. 유염은 여색에 빠져서 조강지처를 구타했다. 그것도 이렇게 미인인 부인을. 그리고 선제의 은총에도 위배되고, 제갈승상의 가르침에도 어긋나는 짓을 하다니 말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성도태수는 소환장을 보내어 유염을 성도태수의 아문으로 불러 심문을 한다.

 

유염은 소환장을 받고 성도태수의 관아로 간다. 유염은 차가운 눈으로 한켠의 등받이없는 의자에 앉아있는 호씨를 쳐다보며 꼿꼿이 서 있었다. 성도태수로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유염은 호씨가 자신을 고발한 이유를 듣고는 가가대소를 하며 호씨가 후안무치하다고 욕을 한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유염은 자신의 이유를 설명한다.

 

유염은 인정했다. 자신이 여러해동안 업무에서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 가끔 성질을 낼 때가 있었다는 것을 그러나, 자신은 나이가 자신보다 이십여세나 어린 호씨를 계속하여 보살펴왔다는 것이다. 비록 자신에게 수십명의 희첩이 있지만, 처는 처이고, 첩은 첩이다. 자신은 이를 확실히 구분해서 대했다는 것이다. 호씨의 여주인으로서의 지위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호씨가 스스로 창피한 짓을 저질러 유염에게 부끄러운 짓을 하지 않았다면 유염이 어찌 호씨를 두들겨 패고, 호씨를 버릴 생각까지 했겠느냐는 것이다.

 

성도태수는 멍해졌다. 도대체 어떻게 된 사건이란 말인가. 태수는 유염 장군에게 상세히 설명해달라고 요청한다. 유염은 말을 하면 할수록 화를 냈고, 말의 앞뒤가 섞여 조리는 없었다. 성도태수는 들으면 들을수록 후회가 되었고, 들으면 들을수록 화가 났다. 자신이 당초에 왜 호씨의 사건을 접수했단 말인가?

 

원래, 이 해의 정월, 조정대신이 조정으로 가서 후주 유선의 축수를 빌었고, 그후 조정공경의 부인들이 입궁하여 오태후,장황후에게 문안인사를 했다. 유염의 처인 호씨도 입궁하여 문안인사를 해다. 관례에 따르면, 오전에 입궁한 후, 태후가 연회를 베풀고, 점심식사를 마치면 돌아오는 것이다. 그러나, 저녁이 되어도 호씨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유염은 아주 초조해져서 사람을 보내어 궁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보게 했다. 그러나, 자신의 처는 실종된 것처럼 아무런 흔적이 없었다. 3,4일후,  궁중에서 사람을 보내와서 말을 전하는데, 오태후가 호씨를 아주 좋아해서, 호씨에게 궁중에 며칠 더 머물라고 했으니, 유대인이 신경쓰지 말라고 했다. 유염은 오태후는 거의 육십이 되었고, 평소에도 적막하게 지냈다. 만일 자신의 처가 오태후와 좋은 관계를 맺으면 자신의 이후 관직에서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유염은 마음 속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그러나 십일이 지나고, 반달이 지나도 호씨는 돌아오지 않았다. 오태후가 호씨와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한단 말인가. 이렇게 시간이 흘렀는데도 호씨를 출궁시키지 않는단 말인가? 한달여가 지난 후에 호씨는 집으로 돌아온다. 호씨가 돌아오는데 아주 기뻐서 어쩔 줄모르는 모습이었다. 유염은 마음 속으로 의혹이 생겨났다. 유염은 이때 이미 육십여세였다. 처인 호씨는 성도에 도착한 후에 혼인했다. 호씨는 삼십여세에 불과했다. 그리고 공인된 미녀였다. 촉한황제 유선은 이미 이십팔세이다. 유선이 자신의 처를 점찍어서 자신의 처와 관계를 가질 수도 있는 것이다.

 

유염은 호씨에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를 추궁한다. 호씨는 그러나 대꾸도 하지 않고, 유염을 아예 눈아래 두지 않는 태도를 보인다. 유염은 호씨를 때렸고, 호씨는 울면서 집의 문을 나섰다는 것이다. 입궁하여 오태후에게 가서 일러바치겠다고 하면서. 유염은 호씨가 문을 나서는 것을 보자, 대노하여, 즉시 수하 오백사병을 모아서, 호씨의 길을 막았다. 호씨의 길을 막은 후, 유염은 큰 길에서 호씨를 마차에서 끌어내리고, 사병에게 호씨를 붙잡으라고 한 후, 자신이 신발을 벗은 다음 호씨를 흠씬 두들겨팬 것이다. 호씨가 혼절하자, 유염은 휴서(休書. 이혼서류)를 던져버리고, 사람들 앞에서 호씨는 홍행출장(紅杏出墻, 간통)하여 버린다고 선언했다.

 

유염이 이번 가정폭력사건의 배후에는 당금황제가 연관되어 있다는 말을 듣자, 태수는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그래서 급히 소식이 바깥으로 퍼져나가지 못하게 조치한 후, 사람들을 물리고, 유염과 호씨를 모두 구금한다. 태수는 밤을 새워 사건기록을 정리한 후, 유선에게 올려서 친히 결정하도록 한다.

 

유선은 보고를 받은 후 대노한다. 유염은 정말 말이 되지 않는다. 당당한 대장부이고 조정의 고관으로서 길거리에서 자신의 처를 구타하다니, 그것만 해도 체통을 잃은 일인데, 지금은 자신까지 끌어들인단 말인가. 그러나 자신이 결정하기는 불편했다. 일단 유선이 유염을 엄벌해야 한다고 하면, 그것은 바로 유선과 호씨가 간통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꼴이 아닌가. 그래서 자신의 정부를 보호한다는 말을 들을 것이다. 유선은 그래서 사건을 성도태수에게 돌려보내어, 성토태수가 율법에 따라 공정하게 처리하라고 말한다. 그리고 재판의견을 조정에 올려 공의에 맡겨 모든 대신들이 의견을 제시하도록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자신의 군왕으로서의 공정함을 드러낼 수 있고, 자신의 목적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유선의 이 수법은 고명했다. 논의를 금지시키는 것보다는 대신들이 마음놓고 논의하라고 하는 편이 나았다. 성도태수도 좋고, 조정관리도 좋고, 이 사건은 후주 유선과 관련이 있는 것을 알았고, 어떻게 처리해야하는지도 알았다. 대신들은 일치하여, 유염은 생활이 사치하고 태도가 좋지 않아, 이미 심각하게 조정고관이 가져야할 체통을 지키지 못한 점이 있다. 만일 그 자금원을 따진다면, 반드시 부정부패와 뇌물수수의 문제가 있을 것이다. 하물며 처인 호씨가 공중에서 1달을 머물렀을 뿐인데, 호씨가 황제 유선과 간통했다고 의심한 것은 군왕에 대한 모욕이며, 대불경한 죄이다. 이는 사형에 처할 중대범죄이다. 대신들은 하나같이 유염을 죽이지 않으면 군주의 위엄을 세울 수 없을 것이며, 유염을 죽이지 않으면 백성들의 의분도 가라앉힐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 결과에 유선은 비교적 만족한다. 그러나, 유염은 평소에 승상 제갈량과의 관계가 괜찮았다. 거기장군은 군대내의 요직이다. 제갈량의 비준없이, 황제 유선이라고 하더라도, 유염을 마음대로 죽일 수가 없다. 이해관계를 형량해본 후, 유선은 성도태수에게 사건기록과 조정공의결과를 전전에서 전투에 임하고 있는 제갈량에게 보내도록 지시한다.

 

제갈량은 사건기록을 보고는 탄식한다. 유염은 원래 대재자(大才子)이다. 선제 유비를 따라다녔고, 인물을 평가하고, 사풍을 의논하는데 견식이 있었다. 단지 유염은 성격이 방종하고, 명사의 기질이 강해서 율법의 구속을 받지 않으려 했다. 선제가 살아있을 때는 대우는 해주지만 권력은 주지 않았다. 선제가 죽은 후, 제갈량은 그를 다독거리기 위하여 자주 유염을 만났다. 비록 공무를 얘기하지는 않았지만, 승상부에 출입하며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영광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유염은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뒤에서 이상한 말을 하고 다녔다. 선제가 자신에게 박대했다는 것을 원망하고, 제갈량이 의리없다고 비난했다. 일을 하면서 항상 자격을 따졌고, 당시 서주에 있을 때는 어떠어떠했다고 말하기를 좋아하며, 형주와 익주에서 새로 들어온 관리들은 무시했다. 그래서 조정의 상하에서 모두 유염을 싫어한다.

 

이년간 유염과 전군사(前軍師)를 맡았던 위연과는 서로 다툼이 잦았다. 유염은 원래 위연을 무시했다. 사천에 들어온 후, 유염이 고릉태수로 있을 때, 위연은 그저 유비 수하의 하급아장이였다. 그러나 한두번 전투를 거친 후 위연은 하급 아장에서 한중태수(漢中太守)라는 요직에 발탁된다. 게다가 위연도 광인이었다. 당시에 제갈량의 바로 다음가는 군대내의 2인자였다. 유염과 같이 명사의 직함만 가지고 있는 사람은 실권을 가지지 못한 사람과 마찬가지로 무시했다. 하루는 유염이 술을 약간 마시고, 사람들 앞에서 위연을 욕했다. 사람들이 와서 말렸으나, 유염은 위연의 코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욕한다. 위연은 화가나서 하나터면 칼을 뽑아서 찌를 뻔했다. 다행히 제갈량이 적시에 도착하여 큰 화가 생기는 것은 면할 수 있었다.

 

제갈량은 좋은 말로 위연을 달랜다. 그 후에 유염에게는 사죄하게 한다. 유염은 술이 깬 후에 제갈량에게 사과서신을 쓰는데, 서신에서 자신이 어떻게 덕행이 없는지 그리고 술을 마시면 어떤 나쁜 버릇이 있는지, 선제를 따라다닌 삼십년동안 선제의 비호가 없었더라면 일찌감치 비명에 죽었을 것이라는 내용등이 들어 있었다. 이 십년동안, 더더구나 승상 재갈량의 도움을 받아서 자신은 마음 속으로 감격한다고 하면서, 유염은 신명에게 맹세했다. 이후 반드시 개과천선하여 사신의 언행을 조심하고 절대로 다시 잘못을 범하지 않겠다고. 제갈량은 서신을 보고 마음 속으로 안타깝게 여긴다. 명사이고 문인이면 약간의 괴벽은 있을 수 있다. 제갈량은 서신을 위연에게 보여준다. 그리고 유염에게 집으로 돌아가서 반성하도록 한다. 다만 관직이나 대우에서는 모든 것이 예전과 같았다. 상사와 싸운 풍파도 제갈량이 나서서 해결해주는 바람에 가볍게 지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황제 유선이 관련되었다. 사정이 약간 달랐다. 유염에게 잘못은 있다. 처를 때린 것도 당연히 잘못한 일이다. 어쨌든 결발처자(結髮妻子)이다. 외도의 혐의는 있지만 혐의는 어쨌든 혐의일 뿐이다. 관건은 유염의 사건에 유선을 연루시켰다는 것이다. 촉한의 최고원수의 명성을 더럽힌 것이다. 유선 개인, 촉한 나라에 대하여 모두 심각한 해를 끼치게 되었다.

 

다만, 군신과 마찬가지로, 유선의 뜻에 맞추어 유염을 이렇게 죽여야 하는가? 그것은 절대 안된다. 유염은 확실히 황제 유선의 명성에 나쁜 영향을 가게 만들었다. 그러나, 유선 본인이 남녀관계를 엉망으로 만들지 않았는가. 유선은 제갈량이 아니나, 생활기풍은 그래도 엄격하고 조심스러웠다. 다만, 제갈량이 집권한 10여년동안, 유선은 괜찮은 편이었다. 제갈량은 유선이 이런 인륜도덕에 어긋나는 짓을 저질렀다고 믿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유염은 자신의 처인 호씨와 황제 유선의 간통사실을 공개하는 것이 자신의 관직생활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몰랐단 말인가? 유염은 바보다 아니니 당연히 알았을 것이다. 유염이 이 스캔들을 공개한 결과를 잘 알았다. 그러면서도 공개했다. 그렇다면 분명히 문제가 있는 것이다.

 

제갈량은 여러가지로 고려한 끝에 성도태수에 이렇게 회신한다. 유염의 사건은 단순한 가정폭력사건으로 처리하라. 있지도 않은 일을 언급할 필요가 없다. 이렇게 하는 것이 신하인 유염, 황제인 유선에 모두 좋은 처리방안이다.

 

제갈량이 회신을 받은 후, 성도태수는 최종 결정을 내린다. 최종 결정에서 호씨가 호소한 유염이 어떻게 부패한 생활을 했는지, 그리고 조정을 어떻게 원망했는지 하는 얘기는 모조리 지워버리고, 유염이 주장한 호씨와 황제 유선의 간통같은 것도 모조리 지워버린다. 단순히 유염이 여러 사람들 앞에서 처인 호씨를 구타한 것만 문제삼는다 .판결에 있는 두 마디 평어는 아주 의미심장하다. 제갈량의 원화에 따른다면, "졸비과처지인(卒非撾妻之人), 면비수리지지(面非受履之地)" 조야를 뒤흔들었던 사건은 유염의 면직과 하옥으로 간단히 처리되고 만다.

 

유선이 아무리 이를 감추려고 하고, 제갈량이 고심을 다해서 조정하려고 해도, 조야의 상하에서는 모두 인정했다. 유선과 호씨는 분명히 간통했을 것이다. 건흥13년부터, 촉한의 백관은 다시는 자신의 처와 딸을 궁으로 들여보내 태후, 황후에게 문안인사를 하지 않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