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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제갈량)

제갈량은 관직에 나가기 전에 농사를 지었을까?

by 중은우시 2018. 5. 8.

글: 장공성조(長空星照)





제갈량을 얘기하자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가 유비의 삼고초려(三顧草廬, 중국에서는 三顧茅廬라 한다)로 관직에 나섰다는 것을 알고 있다. "초려(草廬, 중국에서는 茅廬)라는 단어가 사람들에게 주는 인상은 바로 농촌의 초가집이다. 그렇다면 그 집에 사는 사람은 당연히 농민이다. 사서에서도 제갈량은 남양(南陽)에서 "궁경농무(躬耕隴畝)"했다고 하고, 제갈량도 스스로 자기는 원래 "포의(布衣)"라고 말해서 더더욱 사람들로 하여금 제갈량은 관직에 나오기 전에 농사를 지었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실제로 그러했을까?


제갈량은 낭야 양도 사람이다. 조상은 한나라의 사례교위(司隷校尉) 제갈풍(諸葛豊)이다. 그는 제갈량의 시대보다 200여년 앞선 시대에 살았다. 그러나 이 8대도 넘는 조상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그가 제갈량에게 미친 영향은 거대하다. 유비가 더욱 먼 중산왕의 후예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얘기를 하면 사람들이 놀라게 된다. 한나라는 집안과 출신을 매우 중시한 완조이다. 비록 "거효렴(擧孝廉)"으로 관직에 나갈 수 있지만, 만일 강력한 가족의 배경이 없다면, 누가 너를 추천해 주겠는가? 바로 그러하기 때문에, 그의 동오(東吳)에 있는 형이나 위(魏)에 있는 동생도 모두 추천을 받아 관직에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제갈량이 낭야에서 남양으로 온 것에서 더더욱 가족의 명망이 얼마나 강력한 힘을 가졌는지 알 수 있다.


제갈량의 부친은 제갈규(諸葛珪)이다. 한나라말기에 태산군군승(泰山郡郡丞)을 역임했고, 제갈량이 아주 어렸을 때 사망한다. 제갈량의 숙부인 제갈현(諸葛玄)은 원술이 추천하여 예장군태수(豫章郡太守)가 된다. 제갈량과 그의 동생 제갈균(諸葛均)은 숙부를 따라 임지로 간다. 마침 조정에서 별도로 주호(朱皓)를 예장태수로 임명하여, 제갈현은 예장태수가 되지 못한다. 제갈현은 형주목(荊州牧) 유표(劉表)와 교분이 있어서 그에게로 가서 의탁한다. 이렇게 하여 제갈량일가는 남양으로 와서 남양군의 섭현(葉縣)에 거주한다. 제갈현은 건안2년에 병사한다. 이때 제갈량의 나이 16살이다. 숙부가 죽은 후, 제갈량은 남양군의 등현(鄧縣)으로 가서 양양성(襄陽城)에서 서쪽으로 이십리 떨어진 곳에 거주한다. 구체적인 지명은 융중(隆中)이다. 제갈량은 이곳에서 글을 읽고 농사를 짓는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원래, 태수의 관직을 받은 숙부를 따라갔는데, 숙부가 태수로 취임하지 못하자, 다른 사람에게 의탁한다. 그리고 얼마후 죽는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그 후의 생활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제갈량은 유리걸식하지도 않고, 농사지을 땅도 있었다. 한 곳에서 지내기 힘들면 다른 곳으로 옮겨서 여전히 농사를 지었다. 그리고 이 토지도 규모가 적지 않았다. 일가족의 생계를 유지할 수 있을 뿐아니라, 여유가 있어 글을 읽고 유학까지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책'에 대하여 말하자면, 현재는 비싸서 사지 않으려는 사람은 있어도, 비싸서 살 수 없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삼국시대때는 달랐다. 일반 사람들은 책을 살 수 없었다. 농촌에 사는 사람들은 책을 어디에서 파는지도 알지 못했다. 해방전까지만 하더라도 한 마을에서 아무도 학교에 다니지 않는다거나, 책 한권도 없는 일이 아주 드문 일은 아니었다. 전란의 시대에 종이는 사치품이고, 고적(古籍)은 서간(書簡)이고 비단에 편지를 쓰던 시대에 편안하게 글을 읽을 수 있다면 어떤 집안이겠는가? 당연히 제갈량의 책은 아마도 조상으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것일 수도 있다. 다만, 조상이 가치가 엄청난 서적을 남겨줄 수 있다면, 단순히 농사짓는 집은 아니었을 것이다.


제갈량의 토지는 어떻게 생긴 것일까? 아마도 두 가지 방법일 것이다. 하나는 구매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유표가 그의 집에 준 것일 것이다. 후자의 가능성은 아주 적다. 왜냐하면 그의 숙부가 처음에는 융중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일 전자라면 그의 집안은 돈이 많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비록 당시는 전란의 시대여서, 노는 땅이 많았겠지만, 형주는 달랐다. 형주는 상대적으로 안정되어 있었고, 많은 외지인구들이 이곳으로 피난을 와 있었다. 특히 양양성의 근처는 토지가격이 절대로 싸지 않았을 것이다. 이를 보면 우리는 알 수 있다. 제갈량이라는 이 농사짓는 선비는 아주 돈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다시, 제갈량이 사귀던 사람을 보자. 최균(崔鈞, 자는 州平), 석도(石韜, 자는 廣元), 서서(徐庶, 자는 元直), 맹건(孟建, 자는 公威)의 4명을 '제갈사우(諸葛四友)"라 칭했다. 이 4명은 서서가 '단가자(單家子)'라고 칭해지는 외에 나머지 3명은 모두 직접 관직에 오를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최균의 부친은 더더욱 한나라의 태위(太尉)였다. 이를 보면, 제갈량의 이 관료집안 후대는 유비처럼 몰락하여 '신발를 팔고 돗자리를 만드는 것을 업으로 삼을' 정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사마덕조(司馬德操)는 '덕공(德公)'으로 칭해지고, 방덕공(龐德公)은 '방공(龐公)'으로 칭해졌는데, 이렇게 '공(公)'으로 칭해지는 것은 사회에서 존경받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유표, 조조, 유비같은 제후들에게 중시되는 사람이라는 것인데, 모두 제갈량과 교분이 있었다. 이를 보면 제갈량이라는 이 농사짓는 포의는 절대 일반 사람이 아니다.


그리고 제갈량가족의 혼인관계도 있다. 방덕공의 아들인 방산민(龐山民)은 제갈량의 둘째언니를 처로 취했는데, 방통(龐統)은 바로 방덕공의 조카이다. 이렇게 보면, 제갈가와 방가는 인척관계에 있다. 제갈량의 처인 황씨(문학작품에서는 黃月英이라고 불린다)는 현지호족인 황승언(黃承彦)의 딸이다. 이 황승언에 대하여 얘기하자면, 형주의 최대가문인 채씨(蔡氏)가족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채풍(蔡諷)의 누나는 한나라의 태위인 장온(張溫)에게 시집을 갔고, 채풍의 큰 딸은 황승언에게 시집을 간다. 둘째딸은 유표에게 시집을 갔다. 유표의 계실(繼室)이다. 그리고 채풍의 아들이 바로 채모(蔡瑁)이다. 제갈량을 기준으로 보면, 황승언은 장인이고, 유표는 이장인(姨丈人)이다. 그리고 구장인(舅丈人)은 채모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황승언이 딸을 제갈량에게 시집보낸 것은 딸이 못생겨서라고 한다. 그러나, 황씨집안과 같은 지위에서 아무리 못생겼더라도 보통 지주에게 시집보내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말도 있지 않은가 "황제의 딸은 시집못갈 걱정은 없다." 호족집안의 딸도 마찬가지이다. 시집못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하물며 이 혼인은 황승언이 먼저 제안한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되려면 반드시 두 가지 조건이 만족되어야 한다. 첫째, 두 집안은 문당호대(門當戶對)해야 한다. 즉 비슷해야 한다. 둘째, 황승언이 제갈량이라는 사람을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첫째 요건은 제갈량이 낭야의 명문집안 후예라는 것을 알 수 있고, 형주에 와서도 절대로 몰락한 지주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요건은 제갈량이라는 외래인이 형주의 상류사회와 밀접하게 교류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사마휘(司馬徽)도 절대 그를 "와룡"이라고 칭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제갈량이라는 이 농사짓는 인물은 그저 잠시 관직을 맡지 않았을 뿐인 것이다. 반대로 형주의 일반적인 하급관리는 근본적으로 제갈량과 비교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는 마치 사마휘나 방덕공과 마찬가지로 관직을 맡지 않았을 뿐인 것이다. 설사 관직은 맡지 않았지만, 그들이 형주 상류사회의 신분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사서에는 왜 제갈량의 '궁경농무'를 강조하고, 그 자신도 '포의'신분을 강조했을까? 결국 이는 제갈량의 큰 뜻을 더욱 돋보이게 하기 위한 것이다. 제갈량의 역사적인 공적은 자신의 학문 지혜와 천하대세에 대한 정확한 판단과 장악에 있고, 정무를 보는데 근면하고 공정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가족배경이나 처족배경은 이후 위대한 정치가가 된 제갈량에게 있어서 실로 큰 작용을 하지 못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