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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위충현)

위충현(魏忠賢): 양심전에서 업무를 본 최초의 인물

by 중은우시 2009. 10. 10.

글: 양국선(楊國選)

 

1772년, 옹정제는 침궁과 집무실을 양심전(養心殿)으로 옮긴 후, 그는 양심전에서 정무를 본 첫번째 황제가 된다. 이때부터 양심전은 유명해지고, 청나라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에서 양심전이 많이 나오는 바람에 삼척동자도 다 아는 곳이 되었다. 많은 관광객들은 고궁에 가면 처음에 금난전 즉 태화전을 보고, 두번째로 보는 곳이 양심전이다. 그러나, 옹정제는 양심전에 신성한 사명을 부여한 첫번째 인물은 아니다. 그가 이곳에서 집무를 보기 100년전에 황제가 아닌 사람이 이미 양심전을 제국통치의 중심으로 삼은 바 있다. <<명관사>>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양심전....전의 문안에는 북쪽으로 사례감장인병필(司禮監掌印秉筆)의 치방(値房)이다. 그 뒤층으로 큰 방이 연결되어 있는데, 융도각의 뒤이다. 조상대대로 궁중의 선방(膳房)이었다. 위충현은 선방을 이신전(怡神殿)으로 옮기고 이 곳을 병필치방으로 삼았다." 양심전에서 집무를 한 첫번째 사람은 바로 중국역사상 그 이름도 유명한 환관 위충현(魏忠賢)이었다.

 

만력17년(1589년), 하북 숙녕(肅寧)에 사는 위(魏)씨성의 청년이 처와 딸과 작별하고 있었다. 온 가족이 마련해준 은량을 짊어지고 북경을 향하여 떠났다. 그의 목적지는 자금성이었다. 이때 그의 꿈은 그곳에서 환관이 되는 것이었다. 가는 길이 하늘에 도와달라고 기도를 했다. 왜냐하면 그에게 이미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22세에 환관이 되는 것은 나이가 너무 들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위씨청년은 키도 크고 잘생겼다는 점이 작용했다. 명나라때 사람 담천(談遷)의 <<조림잡저>>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객(客)모는 용모가 특이했고, 동궁에서 일했다" 이 신비의 중간인물은 위충현이 후일 득세한 후, 조용히 숨어지냈고, 성명이 전해지지 않는다. 위씨청연은 입궁한 후에 주인에 의하여 아무렇게나 이름이 붙여진다. 이진충(李進忠). 그는 성격이 호방하고, 몸매가 튼튼하고 멋있어서 다른 사람들의 호감을 샀다. 그러나, 그는 그야말로 문맹이었다. 전체 환관의 권력체제에서 그는 가장 하층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 그가 성공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였다. '태감'이 되는 것만도 그에게는 머나먼 꿈이었다. 오늘날, 사람들은 '태감(太監)'이라고 하면 거세를 하고 황실에서 일하는 모든 남자노비를 가리킨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 명나라때에는 최고등급의 환관만을 '태감'이라고 불렀다.즉, 자금성 이십사아문수령이 되어야 비로소 '태감'이라고 불리웠다. 태감의 아래에는 소감(少監)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각 아문에서 태감의 조수를 맡았다. 어떤 때에는 각 지방으로 나가서 지키기도 했다. 제3등급은 감승(監丞)이라고 불렀다. 이상은 모두 고급환관이다. 문화수준이 있고, 어느 정도 경력(일반적으로 입궁한지 30년이상)이 있는 환관이 비로소 맡을 수 있는 자리였다. 경력이 일천한 자들은 그저 전부(典簿), 장수(長隨), 봉어(奉御), 당차(當差), 청사(聽事)등등을 맡았다. 가장 하층은 오목패(烏木牌), 수건(手巾), 소화자(小火者)라고 불리우는 류인데, 잡일을 하는 노비와 같았다.

 

최하층에 있던 이진충이 31년후에 위충현이 된데에는 확실히 운도 따랐다: 그는 동궁(東宮)에서 일했고, 태자 주상락(朱常洛) 일가를 돌왔다. 그가 모신 사람은 용모가 뛰어나지도 않은 왕재인(王才人)이었다. 그러나 누가 알았으랴. 이 여주인이 황장손 주유교(朱由校)를 낳을 줄. 그리고 만련48년(1620년)에 황제할아버지, 황제아버지가 1달내에 차례로 죽으면서, 그의 손으로 키운 주유교가 황제가 될 줄을. 그가 성공하지 않기도 힘들게 되었다. 운 이외에 그는 확실히 주인에게 충성을 다했다. 노황제 만력제가 죽기 전에, 주인일가는 계속 냉대를 받아왔다. <<조림잡저>>의 기록에 따르면, "만력때, 궁에서 녹봉도 내려주지 않아서, 황손(주유교)이 아주 힘들게 살았다" 이때, 안목이 없는 환관들은 심지어 이 어린 주인을 조소하기까지 했다: "폐하(만력)도 만세이고, 전하(태자 주상락)도 만세이니, 우리들이 소관자(小官子, 주유교)가 등극하기를 바라는 것은 황하의 물이 맑아지는 것을 기다리는 것과 같다" 그저 위충현만이 어린 주인을 잘 모셨다. "혼자서 공손하고 받들어 모시며, 수시로 그가 먹을 거리를 올렸다. 주유교가 원하는 것을 해주었다" 그리하여 어느날 과연 '황하의 물이 맑아졌다' 고생을 겪은 소관자가 등극을 한 것이다. 그러자 그는 즉시 이진충에게 원래의 성 위(魏)씨로 회복하도록 하고, "충현(忠賢)"이라는 이름도 하사했다. 그리고 그를 사례감에 들어가도록 해주었다. 이미 53세가 된 늙은 문맹에게 이것은 가장 좋은 자리였다. 그러나, 좋은 운은 막을래야 막을 수도 없었다. 관운(官運)과 동시에 도화운(桃花運)도 따라왔다. 위충현을 사랑하게 된 것은 바로 어린황제 주유교의 유모인 객씨(客氏)였다. 자금성내에 수천의 궁녀가 있는데, 황제의 은총을 바라고 있지만, 마음이 가는 곳이 있기 마련이다. 어쩔 수 없는 경우에는 환관에게 마음을 준다. 환관은 이미 '거세'되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여인에 대한 갈망이 있다. 두 사람의 결합을 당시 사람들은 "대식(對食)" 혹은 "채호(菜戶)"라고 부렀다. 주유교의 유모인 객씨는 원래 또 다른 환관 위조(魏朝)와 '대식'으로 맺어졌다. 위조는 위충현보다 문화수준도 있고, 권세도 있었다. 그러나, 개인적인 매력은 위충현만 못했다. 위조와 위충현이 객씨를 놓고 다투게 된다. 어느날 밤, 건청궁 밖에서 두 사람이 서로 주먹질까지 한다. 황제 주유교까지 놀라서 잠에서 깨어난다. 주유교는 유모 객씨를 아주 좋아했다. 친모인 왕씨가 죽은 후에 객씨를 거의 모친으로 모셨다. 그는 잠에서 깬 후에 화를 내지도 않고, 그냥 객씨에게 물었다: "객유모가 마음 속으로 누가 일을 맡았으면 좋을지 말해주면, 내가 대신하여 결정하겠다" 객씨는 위조가 경박한 것이 싫었다. 그리하여 위충현을 가리킨다. 그리하여 위충현은 자금성내에서 가장 권세있는 여인을 얻었을 뿐아니라, 꿈에도 그리던 사례감병필태감의 직위까지 얻어낸다.

 

53세의 일자무식의 문맹이 사례감병필태감이라는 고위직에 앉게 된 것이다. 명나라제국의 가장 중요한 관방문건이 모두 그의 손을 거쳐서 내려갔으니, 정말 괴이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사실 이것이 이상할 것도 없다. 왜냐하면 황제 본인도 전통적인 기준에 따르면 준문맹이다. 주유교가 출생했을 때, 마침 부친 주상락의 태자자리가 위험한 때였다. 만력제는 태자를 좋아하지 않아서, 손자에게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만련48년(1620년)에 이미 16세가 된 주유교는 아직도 황태손의 봉호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심지어 시종 책을 읽지도 못했다. 이해 칠월 이십일일, 만력제가 죽는다. 죽기 직전에야 이 자격도 없는 할아버니는 비로소 생각이 났는지, '황장손을 책립하고 학문을 익히게 하라'고 지시한다. 40일후, 부친마저 세상을 떠난다. 이때, 주유교는 양친도 없을 뿐아니라, 궁안에 상징적인 황태후마저도 없었다. 완전히 아무런 속박도 받지 않는 아이와 같았다. 이 아이는 공부를 싫어했고, 인형처럼 봉천문앞에 앉아있는 것도 싫어했다. 조정대신들이 하는 말은 그가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외에, 주씨집안의 여러 조상들과도 달리 그는 호색하지도 않았다. 궁사(宮詞)에 "육궁심쇄만요요, 다반소화원리소(六宮深鎖萬妖嬈, 多半韶華怨裏消)" 그러나, 이를 가지고 주유교가 청심과욕(淸心寡慾)의 재미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그것도 잘못이다. 전혀 반대이다. 그는 생활을 즐기고, 정력이 넘치고, 마음씀씀이와 손재주가 뛰어나며 놀기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명나라때 건청궁의 단계(丹階) 아래에는 일찌기 노호동(老虎洞)이라는 석동(石洞)이 하나 있었다. 석동 안에는 돌을 쌓아서 벽을 만들고, 석동을 끝까지 걸어가면, 바로 후궁에 이어진다. 노호동의 구체적인 위치는 청나라때 이미 확실하게 알지 못했다. 오늘날에야 더더욱 알기 힘들다. 아마도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넘어갈 때 막아버린 것같다. 가장 먼저 이 비밀통로를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아마도 황제의 시종이나 후궁이 다른 사람에게 들키지 않고 오가기 편하게 만들었던 것같다. 아니면 일단 건청궁이 습격등을 받으면 황제가 몸을 피하게 하기 위하여 만들었던 것일까? 어쨌든 천계황제가 건청궁에 살기 시작한 후, 노호동을 완전히 새로운 기능으로 개발했다. 술래잡기. 그는 자주 달밝은 밤이면, 그 속에 숨고서 환관들에게 찾아보라고 시켰다. 그러나 이런 놀이는 너무나 싱거웠다. 환관들은 황제의 소매에 든 향낭(香囊)의 향기를 쫓아가서 쉽게 찾아낼 수 있었다. 그래도 황제를 즐겁게 해주기 위하여, 그들은 다른 곳을 떠들썩하게 둘러보다가 나중에서야 노호동내로 들어오곤 했다. 주유교는 운동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주마지희(走馬之戱)를 즐겼는데, 이것은 당시에 명나라 상류사회에서 유행하던 것으로 오늘날의 폴로와 비슷하다. 매번 겨울이 되면, 서원의 호수에 얼음이 언다. 그는 홍목나무판으로 자리를 만들고, 사방에 낮은 난간을 설치한 다음 주유교가 그 가운데 앉는다. 태감들은 양쪽에서 밧줄이나 막대를 이용하여 앞에서 끌고 뒤에서 민다. 빠르기가 번개와 같았다. 주유교는 동물도 좋아했다. 특히 고양이를 좋아했다. 궁중에 묘아방(猫兒房)을 두고, 많은 좋은 고양이를 길렀다. 고양이에게 "모소(某小)", "모아두(某丫頭, 아두는 여자시녀를 가리킴)"라고 불렀다. 심지어 고양이에게 관직이나 작위를 내려서 "모노야(某老爺, 노야는 어르신이라는 뜻임)"라고 부르기도 했고, 환관의 예에 따라 상을 내리고 돈을 하사하기도 했다. 한번은 그가 서원(西苑)에서 놀고 있는데, 나무 위에서 새들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순식간에 기분이 나서, 바로 나무위로 올라가서 새집에서 새끼를 잡았다. 그런데, 호사다마라고 실족하여 땅에 떨어졌고, 얼굴에 상처를 입었다. 이 장난꾸러기황제에 대하여 위충현은 부친처럼 사랑을 아끼지 않았다. 황제가 준마(駿馬)를 좋아하니, 위충현은 변강에서 바친 말들 중에서 고르고 골라서 황제에게 바쳤다; 황제가 산수(山水)를 좋아하니, 위충현은 어용감(御用監)에 오채색의 병풍을 만들게 해서, 서호(西湖), 호구(虎丘)등 강남의 풍경을 그리게 해서 어탑의 좌우에 두게 했다. 주유교에 대하여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그가 목수일을 좋아했다는 것이다. 이 방면에서 그는 천재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친히 칠기, 연상(硯床), 소갑(梳匣)등을 만들기도 했는데, 모두 오채색의 장식을 하고, 예쁘고 교묘했다. 기분이 좋을 때는 이들 공예품을 팔기도 했다. 한번은 호등소병(護燈小屛) 8폭을 만들었는데, 그 위에 한작쟁매희(寒鵲爭梅戱)를 조각했다. 그는 어린 환관에게 자금성 밖의 시장에 가지고 나가서 팔아오라고 시켰다. 그리고 이것은 '어제지물(御製之物, 황제가 만든 물건)"이라고 하면서, '1만전'의 가격을 매겼다. 다음날 환관이 그 가격을 받아와서 바치자, 아주 기뻐했다. 주유교는 자신의 공예세계에 탐닉했다. 그는 친히 아주 멋있는 문을 만들었다: 그 문안에서는 예술적인 창의가 번득였고, 문밖에서는 재미없고 무서운 황권정치가 있었다. 아쉽게도 이 문은 그다지 견고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이 문을 지켜줄 사람이 필요했고, 위충현이 가장 적합한 사람이었다.

 

<<명통감>>에는 이렇게 쓰고 있다: "황상(주유교)는 성격이 집을 짓는 것을 좋아했다. 스스로 도끼와 톱을 가지고 자르고 깎았다. 날로 도문포, 갈구사등의 무리들과 아침저녁으로 만들었다. 다 만들면 기뻐하고, 오래지 않아 버렸다; 버리고는 다시 만들었는데, 싫증도 내지 않았다. 그가 도끼로 내려치고, 칼로 깍을 때면, 옷을 벗고 일을 했다. 가까운 자들이 아니면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왕체건(사례감태감, 위충현의 충실한 조수)등이 매번 나쁜 짓을 하려고 할 때면, 곁에서 문서를 들고 아뢰었다. 다 아뢰고 나면, (황제는) 바로 말했다: 너희들이 생각해서 처리해라. 알겠다'. 그리하여 태아검(太阿劍)이 아래로 내려가고, 위충현등이 마음대로 조종하게 되었다."

 

위충현은 충실한 개와 같았다. 대문을 지키면서 주인을 귀찮지 않도록 아무도 문안으로 들이지 않았다. 그런데, 더 많은 사람들은 대문의 뒤에 있는 신비한 주인은 보기가 어려웠다. 그러다보니, 문을 지키는 개를 주인을 대하듯이 모시게 된다. 오문(午門)을 들어가서, 동쪽으로 가면, 동화문(東華門)에 가까워졌을 때, 고궁의 남쪽 성벽을 따라 장방형의 집들이 한줄로 늘어서 있다. 이곳이 바로 명나라 청나라 두 왕조에 걸쳐 조정대신들이 자금성내에서 집무를 보던 기구인 내각(內閣)이다. 500여년동안, 대학사와 그들의 조수들은 매일 이곳에서 많은 상소문을 처리했고, 황제의 뜻에 따라 신하들의 상소에 대한 회신을 초안하고, 대랑의 정무서류를 처리했다.

 

여기서 서북으로 한참을 올라가면, 황제의 침궁인 건청궁이다. 건청궁의 대문인 건청궁의 안쪽 서편에, 한줄의 방들이 늘어서 있는데, 명나라때 이곳은 궁내환관의 당직방이었다. 서쪽으로 양심문을 지나 양심전으로 들어가면, 환관의 본부인 사례감이다. 내각과 사례감은 실제로 모두 황제의 비서역할이다. 단지 한 쪽은 업무를 담당하고 한쪽은 생활을 담당하는 것뿐이다. 그러다보니 지위의 고하는 분명해진다. 환관은 내각의 앞에서는 원래 머리를 들 수가 없다. 전해지는 바로는 자금성이 만들어진 후, 한번은 영락제의 어가가 내각으로 간 적이 있다. 내각에 서서 그를 따라오던 환관들에게 말했다: "이곳은 세 선생(내각대학사 양사기, 양영, 양박 세 사람을 가리킴)이 있는 곳이니, 너희같은 자들은 여기를 지나다녀서는 안된다" 당시 황제가 환관을 육부에 보내어 말을 전하게 할 때는, 반드시 관리들로부터 1장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읍례(揖禮)를 하도록 했다. 영락제의 중손인 명영종 주기진의 시대에 이르러, 처음으로 권력을 농단하는 환관 왕진(王振)이 나타난다. 처음에 왕진은 그저 심부름을 하는 노비였다. <<명통감>>에는 이런 이야기가 실려있다. 정통2년, 주기진의 조모인 태황태후 장씨가 왕진을 내각에 파견하여 일을 물어보게 했다. 대학사 양사기는 아직 충분히 논의하지 못했다고 하였다. 왕진은 마음이 급해져서 '기다릴 수 없으니, 직접 가서 하면 안되겠는지' 물어보았다. 양사기는 크게 노했다. 그 일이 태황태후에게까지 알려졌다. 그녀는 즉시 왕진을 채찍으로 때린 다음, 그로 하여금 양사기에게 사죄하도록 시켰다. 그리고 왕진을 훈계했다: "다시 한번 이런 일이 있으면 반드시 죽임을 당할 것이다" 왕진은 태황태후와 내각의 삼양(양사기, 양영, 양박)이 죽은 후에 비로소 주기진이 나이가 어려서 잘 알지 못함을 이용하여 점차 득세하게 된다. 이후 각신(閣臣)과 환관(宦官)의 지위에 본질적인 변화가 발생한다.

 

가정연간에, 한 환관이 얘기한 각신과 환관이 만났을 때 상호간의 예의를 주제로 논한 것은 의미가 깊다: "우리는 문을 지킨지 오래 되었고, 사정이 변해가는 것을 보았다. 옛날에 장선생이 조정에 들어올 때는 우리가 허리를 숙였다. 나중에 하선생이 들어올 때는 우리는 그저 서로 눈으로 보기만 했다. 지금 엄선생은 우리에게 공수(拱手)를 하고서야 들어간다." 이 세 사람은 차례대로 장총(張璁), 하언(夏言), 엄숭(嚴嵩)을 말한다. 가정연간에 내각수보를 지낸 세 사람이다. 짧은 수십년만에, 내각대신의 체면이 환관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하락한 것을 볼 수 있다. 위충현시대에 그 상황은 최고조에 달한다. <<명조소사>>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태감 위충현은 온 조정이 아부했다. 그의 뜻에 따르는 자들은 그를 의부로 보시고, 오배삼고(五拜三叩)의 예를 올렸으며, 구천구백세(九千九百歲)라고 불렀다." 위충현이 환관이 되기 전에 딸이 하나 있었다. 누가 알았으랴. 쉰이 넘어서 졸지에 무수한 자식을 가지게 될 줄은. 그리고 그 자식들은 모조리 조정에서 대단한 지위에 있는 문무관리였다. 조정의 문무관리는 거의 모두 위씨의 문하에 들어왔다.

 

먼저 내각부터 얘기해보자. 천계4년, 내각수보 고병겸(顧秉謙)은 아들을 데리고 와서 위충현에게 고두(叩頭)하며 말했다: "원래 슬하에 의탁하고 싶었지만, 백발 늙은이를 좋아하지 않을 것같으니, 저의 어린 아들을 손자로 삼아주셨으면 합니다"

 

또 다른 내각대학사 위광징(魏廣徵)은 고병겸처럼 우회적이지 않았다. 위충현과 같은 성이라는 것을 기화로 스스로 조카가 되었다. 내각과 위충현간에 문서가 오갈때는 "모두 행서로 쓰고 바깥에 제목은 '내각가보(內閣家報)'라고 적었다" 당시의 내각대학사들은 통칭하여 "위가각로(魏家閣老)"라고 불리웠다. 내각이 이러하니, 육부, 구경, 사방의 총독 순무는 말할 것도 없다. 자칭 의자, 의손자가 수두룩했다. 그중 유명한 것은 오호(五虎), 오표(五彪), 십구(十狗), 십해아(十孩兒), 사십손(四十孫)이 있다. 당시 사람들은 이 광경을 <<백자도연의(百子圖演義)>>로 썼으니, 얼마나 성황이었겠는가? 자금성의 동남쪽 모서리에 있는 내각과 건청궁의 한켠에 있는 양심전, 두 건물의 운명은 이제 완전히 역전되었다. 내각은 고무도장에서 진흙으로 만든 보살로 바뀌었다. <<명사>>의 기록에 따르면, 한번은 위충현이 모 대신의 곤장을 치고자 했다. 일부 조정대신이 이의를 제기했지만, 수백명의 어린 환관들이 내각의 내당으로 밀고 들어와서, 팔을 휘두르며 마구 욕을 해대었다. 여러 내각의 신하들은 머리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양심전 사례감집무실은 기세가 당당했다. 가장 대단한 때는 매년 정월이었다. 왜냐하면 위충현의 생일이 정월삼십일이기 때문이다. 십오일만 지나면 각 아문과 환관들이 생일축하를 하느라고 주변에 사람이 가득찼다. 그에게 축하할 때는 "천세천세, 구천세"라고 소리쳤다. 이렇게 아부하는 자들은 바로 건너편에 있는 천계황제에게 들릴 것도 신경쓰지 않았다. 그는 왜 조정의 글을 읽은 문관들이 자신을 아버지나 할아버지로 모시려 하는지 잘 몰랐다. 심지어 국자감의 감생들이 자신을 공자와 나란히 놓고 모시는 것도 이해하지 못했다. 자신은 그저 백화(白話)로 번역해주어야만 이들과 의사소통이 가능했었다.

 

그는 자신이 갑자기 이렇게 천하의 권력을 쥐어잡을 줄 몰랐다. 이 권력은 원래 그가 충심으로 모시던 어린 주인의 것이었다. 자신은 원래 약간의 콩고물을 얻어먹는 태감의 직무에 만족했다. 위충현은 원래 위충현이 되어서는 안되었다. 그는 왕진의 학식도 없고, 왕직(汪直)의 심기도 없었으며, 심지어 유근(劉瑾)의 야심도 없었다. 그저 호방하고 후덕했기 때문에, 환관들이 바보라고 여겼던 위충현이 천계원년이후에 7년동안 움켜쥐게 된 모든 것들은, 사실 그 자신이 애를 써서 빼앗아 온 것이 아니었다. 그저 못이기는 척 받아온 것일 뿐이다. 이렇게 많은 것을 그에게 가져다 준 사람들은 양심전의 앞에서 '아버지, 할아버지 구천세'를 외치는 제국의 문신들이었다. 천계초기에 막 주인으로부터 새로운 이름을 받은 위충현은 조심스럽게 사례감의 대문을 드나들었다. 이때 대명제국의 문신들은 전례없는 분열과 내분을 겪고 있었다. 문관들의 당쟁은 자고이래로 멈춘 적이 없었다. 그러나 천계연간처럼 심각한 적은 없었다. 사실상, 일찌기 만력초기에 장거정이 사망한 후 청산당한 때로부터 제국문관들의 당쟁은 갈수록 심해졌다. 만력은 나중에 30여년간 정무를 돌보지 않았다. 그리하여 당쟁의 격화를 종용했다. 소위 당쟁은 처음에는 그저 조정신하들이 고향사람들끼리 모이고, 마음에 맞는 사람들끼리 모인 느슨한 결맹에 불과했다. 먼저 제당(齊黨), 초당(楚黨), 절당(浙黨)이 있었다. 세 당이 다툰 것은 제도측면은 적었고, 인사측면이 많았다. 그러나 시비와 이해는 어쩔 수 없이 서로 얽혀 있다. 만일 정상적으로 변론하는 무대가 마련되었고, 각측이 승복할만한 권위자가 중재를 하였더라면, 이런 당쟁은 정치를 깨끗하고 밝게 하는 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만력제때부터, 이 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당쟁이 이리떼가 서로 물어뜯는 것처럼 되면서 당화(黨禍)로 발전하였다. 나중에 소위 "동림당(東林黨)"이 전투에 뛰어든다. 이들은 도덕적인 권위를 내세우는 선생들이었다. 원래의 제도다툼, 인사다툼이 정사(正邪)의 다툼, 의기(義氣)의 다툼으로 변모했다. 당쟁의 피비린내는 갈수록 짙어졌다.

 

원래의 삼당과 유사하게 동림당도 그다지 엄밀한 조직은 아니었다. 최초에는 고헌성(顧憲成)이라는 이부낭중이 만력22년 삭탈관직되어 무석으로 되돌아간다. 그리고 동림서원에서 강의를 했다. 그러면서 여러 조정신하들에게 영향을 주고 명성을 얻는다. 동림당의 핵심가치관은 학술, 정치와 윤리가 불가분이라는 것이다. 고헌성은 이렇게 말했다: "관직이 중앙정부에 있으면서 뜻을 군주에 두지 않고, 관직이 지방관리로 있으면서 뜻을 민생에 두지 않고, 물가 숲아래에 거주하면서 뜻을 세상의 도리에 두지 않는다면, 그것은 군자가 취할 것이 아니다" 동림당 사람들은 스스로를 군자라고 자부했다. 자신들과 의견이 맞지 않으면 모조리 소인, 사당(邪黨)으로 치부했다.  정상적인 의견교환마저도 도덕적인 판단으로 끌어올리니, 동림당의 빙청옥결(氷淸玉潔)의 정치이상은 확실히 문제가 많았다. 만력이 죽은 후, 동림당인은 조정에서 득세한다. 일시에 그들이 경멸하는 사람들은 모조리 사악한 소인으로 몰린다. 심지어 웅정필, 원숭환과 같은 사람들까지도 이단으로 몰리게 된다. 동림당에 의하여 도덕적인 방망이에 얻어맞아 몰리게 된 사람들은 원래 황제를 찾아가서 호소할 수 있었다. 그러나 주유교는 목수일로 바빴다. 그들은 할 수 없이 황제의 문을 지키는 위충현에게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동림당인들의 가치판단으로는 위충현은 유근의 잔당이다. 그리하여 위충현과 '사당(邪黨)"은 연합하여 동림당에 공격을 가하게 된다.

 

절대적인 고상(高尙)과 절대적인 타락은 모두 정치에서는 암세포이다. 전자는 겉으로 보기에는 아름답기 그지없지만, 치명성에 있어서는 후자와 다를 바가 없다. 타락자는 고상자의 명단을 만들어 위충현에게 바친다. 그리고 이 문맹인 자가 쉽게 읽고 이해하게 하기 위하여, <<동림점장록>>이라는 블랙리스트를 <<수호전>>의 조개, 송강등 109명의 천강지살의 명칭을 당시의 조정신하들에게 붙여준다. 시작부분은 이렇다: "동림개산원수 -- 탁탁천왕 남호부상서 이삼재 (조개); 총병도두령 2명 - 천괴성 호보의 대학사 섭향고(송강); 천강성 옥기린 이부상서 조남성 (노준의) ...위충현은 비록 문자를 몰랐지만, 궁에 들어가기 전에 이야기꾼으로부터 <<수호전>>은 들어보았다. 그는 이 기뻐하며 이 블랙리스트를 천계제 주유교에게 보여준다. 생각지도 못하게 문맹황제는 <<수호전>>이 뭔지도 몰랐다. 위충현은 자신이 기억하는 수호전의 이야기에서 대목들을 얘기해준다. 주유교는 아주 즐거워한다. 그러면서 박수를 치면서 "좋다"고 외친다. "원래 동림당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호한(好漢, 사나이)들이구나!"

 

위충현은 할 수 없이 이 블랙리스트를 감추고 다시는 황제에게 올리지 않게 된다. 그러나 명단에 있는 조정신하들의 살륙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명사>>에는 "위충현이 권세를 부릴 때, 모두 선량한 자들을 모함함으로써 그에게 아부했다. 공격받기 시작한 것은 모두 동림당이었다" 나중에 정치박해의 그물망이 갈수록 커진다. "제거하고 싶은 자는 모조리 동림으로 몰아서 쫓아냈다. 천계4년 10월부터 희종이 붕어할 때까지(천계7년), 죽임을 당한 자가 10여명, 하옥되어 유배간 자가 수십명, 삭탈관직당한 사람이 200여명이었다. 관직을 잃거나 좌천당한 경우는 헤아릴 수도 없었다" 제국문관집단의 당쟁은 결국 환관을 의부로 모시는 지경에 이른다. 그리고 위충현은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돌연 아들 손자를 자처하는 무리들에 의하여 권력의 정점까지 밀려올라간다. 순간적으로 과다한 헤로인을 흡입한 것처럼 그는 눈빛이 흐려졌고, 자금성내에서 자신의 위치를 제대로 찾지 못하게 되었다.

 

1627년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오는 시기에, 7년동안 재미있게 목수일을 하고나서 23살의 주유교는 병석에 눕는다. 어린 주인이 하루하루 말라가는 것을 보면서, 충복 위충현은 마음이 찢어지는 것같았다. 1달후, 천재목수 주유교가 병사한다. 후비들은 모두 3명의 아들과 2명의 딸을 낳았다. 그러나 모조리 요절했다. 그리하여 형이 죽으면 동생이 이어받는다는 법도에 따라, 주유검(朱由檢)이 황위를 승계한다. 연호는 숭정(崇禎)이다. 1627년 한겨울, 어린 주인이 죽은지 겨우 3개월만에, 위충현은 자금성의 새주인에게 좇겨난다. 중도봉양조릉사향(中都鳳陽祖陵司香)으로 쫓겨난다. 차가운 바람을 맞으면서 위충현은 조용히 경성을 지나, 하북 부성(阜城)에 이른다. 그때 황제가 금의위를 파견하여 그를 추살하려 한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음력십일월초육일, 위충현은 혼자서 역참에 앉아 있었다. 벽의 건너편에서는 <<계지아(桂枝兒)>>가 들려왔다: "세거시쇠(勢去時衰), 영락여표초(零落如飄草)...사저반황량야(似這般荒凉也), 진개불여사(眞個不如死)"(세력을 잃고 시기가 지나니, 바람에 흩날리는 풀과 같은 신세이다. 이렇게 황량하다니, 죽는 것만 같지 못하다)

 

이것은 위충현이 인간세상에서 들은 마지막 목소리였다. 그는 도박에 걸었고, 기다렸다. 그리고 모든 것을 따냈다; 그리고 다시 모조리 잃었다. 위충현은 스스로 목을 맴으로써 일생을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