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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위충현)

위충현은 동림당을 어떻게 물리쳤는가?

by 중은우시 2009. 8. 7.

글: 유병광(劉秉光)

 

노신(魯迅) 선생이 일찌기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중국에서 항상 써먹는 수법으로 자신과 뜻이 다른 사람을 배제하고자 할 때, 자주 상대방에게 듣기 좋지 않은 별명 혹은 별호를 붙여준다." 중국의 옛사람들은 사회심리측면을 잘 알았던 것같다. 거기에서 상당한 심득을 얻었던 것같다. 만일 한 사람의 이름을 그냥 불러버리고, 그의 행적을 보지 않으면, 사람들은 그가 좋은 사람인지 아닌지를 파악하기 힘들다. 만일 이름 앞에 흉악하고 질나쁜 별명을 붙여버리면, 사람들은 앞에 붙어있는 이 "검은 모자"를 보고서 그의 악행을 보지 않고도 이 자는 절대로 좋은 인물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해버리는 것이다. 명나라 천계(天啓) 연간에 위충현을 우두머리로 하는 "엄당(黨, 은 환관이라는 뜻)"이 "동림당인(東林黨人)"을 제거할 때, 이 소위 '항상 써먹던 수법'을 사용했다.

 

엄격하게 말하자면, "엄당"과 "동림당"은 무슨 정당이 아니다. 기껏해야 방파수준이다. 서로 정치적입장이 달랐고, 서로 공격했고, 권력을 두고 다투었기 때문에, 양당간의 갈등과 충돌은 계속 되었다. 명광종이 죽은 후, "동림당"은 주유교(朱由校)를 즉위하도록 하는데 공을 세웠기 때문에, 군사, 정치, 문화, 감찰과 인사의 대권을 장악한다. 그리하여 조정을 주재하는 중견역량으로 성장한다. <<명사>>에서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표현한다: "동림당의 세력이 강성하여, 그들 무리가 조정을 가득 채웠다(東林盛勢, 衆正盈朝)". 권력은 누구에게 있어서나 항거할 수 없는 유혹력을 지니고 있다. 더구나 야심이 극도로 팽창해있던 위충현은 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권력의 자리는 유한한 것이다. "동림당"을 몰아내야지만 위충현과 그의 무리들은 빈 자리를 꿰차고 들어갈 수 있었고, 조정의 대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동림당인"은 "명궁삼대사건"을 계기로 등장했으므로, 위충현은 우선 그 사실을 왜곡하고, 이를 기화로 "동림당인"들의 공로를 부정하고 명성을 깍고자 했다. 그런데, 이 수법은 실패한다. "동림당인"들이 황제의 신임을 깊이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위충현은 다시 황제의 유모인 "객씨(客氏)"를 통하여 황제에게 '동림당인'에 대한 나쁜 말들을 하도록 만든다. 이 수법은 아주 효과적이었다. 이후 명희종(주유교)은 동림당인들을 점점 멀리하기 시작하고, 위충현이 자연스럽게 그들이 차지했던 위치를 대체한다. 이리하여 위충현은 명희종이 가장 신임하고 가장 믿은 신하가 된다.

 

황제라는 큰 나무가 뒤를 받쳐주고, 객씨라는 믿을만한 산이 뒤를 받쳐주는데다가, 사례감병필이라는 직위, 동창제독이라는 실권을 지니고 있었고, 거기에 동림당인들에게 쫓겨났던 사람들이 속속 그의 아래로 몰려들었다. 그리하여, "엄당"의 실력은 급격히 성장한다. 위충현이 "동림당인"을 제거하려는 생각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위충현이 보기에, "동림당인"들은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운 자들이었다. 그러나, 확실한 증거가 없이는 이들 강직하고 기개있는 지식분자들에게 손을 쓰기가 어려웠다. 어쨌든 명분이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송사때 상대방에게 악명을 붙이거나 '모자씌우기'를 하는 수법을 본떠서, 위충현은 동림당인들을 능멸하는 악독한 수단을 사용한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한 사람을 띄우는데는 3년, 5년의 시간도 부족하지만, 한 사람을 망가뜨리는데는 이,삼일이면 충분하다. 하물며, 음험한 수법을 쓰고, 뒷발목을 잡고, 블랙리스트를 만들고, 모자를 씌우는 등은 역대이래로 소인이나 간신들이 잘 써먹던 수법이다. 누구를 막론하고, 이런 자들이 노리게 되면, 결코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 "엄당"의 내외에, 이같은 모함의 고수가 적지 않았다. 위충현의 손에 동림당인의 "블랙리스트"를 몰래 올린 사람은 다름아닌 '동림당'과 사이가 나빴던 대학사 고병겸(顧秉謙)이었다. 이 블랙리스트에는 모든 "동림당인"과 그들에 연루된 관리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는데, 모조리 "사인(邪人)"으로 칭하고 있다. 위충현은 이 블랙리스트를 보물처럼 여겼다.

 

동림당인의 범위가 정해지자, 적군과 아군의 구별이 분명해졌다. 남은 것을 처리하기는 쉬웠다. 위충현은 "동림당인"의 명성에 먹칠을 하고, 악명을 뒤집어 씌우고자 몇몇 심복들로 하여금 적시에 동림당인들을 모함하는 각종 소책자를 올리게 한다. 그중에서 위충현이 가장 먼저 사용한 왕소위(王紹徽) 편찬의 <<점장록(點將錄)>>은 아주 특색이 있다. "동림당인"을 억지로 108명으로 만들어서, 각각 <<수호전>>에 나오는 108명의 양산박호한들과 매치시킨 것이다. 강소순무 이삼재(李三才)는 비록 '동림당인'에 속하지 않았지만, 그가 동림당을 동정하는 입장이라는 것 때문에, 특별히 "탁탑천왕(托塔天王)"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109명. 이들은 위충현이 보기에 중요한 정도에 따라서 배열되었다. 별명은 왕소휘가 고민고민해서 매치시켰지만, 대부분은 견강부회였다. 진란징의 <<가묘습유백영>>의 주석에 따르면, "명희종이 <<점장록>>을 뒤적이다가 '탁탑천왕'이라는 네 글자를 보고는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위충현이 곁에서 조개의 '격계이탑'의 이야기를 얘기하면서, 이삼재의 이름을 가리키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삼재는 혹세무민하는데 능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들이는데 뛰어납니다. 이것은 탑을 옮기는 것과 비슷합니다" 위충현 및 그의 무리들이 '모자씌우기'를 하는데 얼마나 고민하고 머리를 굴렸는지 알 수 있는 장면이다. 그리고 그들의 머리가 민첩하게 돌아가고, 말을 아주 잘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정말 무릎을 치게 만들 정도이다.

 

<<점장록>>은 유머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아주 음험하고 악독한 것이다. 위충현도 그 글자와 행간에 숨어있는 음냉한 살기를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리하여, "필협풍상(筆挾風霜)"이라고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찬탄을 금치 못하였다. "흑선풍 이과도급사중 위대중" "활염라 강서도어사 방진유" "모야차 예부우시랑 장내" "적발귀 좌통정사 유종주" "최명판관 좌통정 도일진"....언뜻 보기에 살기등등한 별명들이고, 뒤를 보면 이름이 나온다. 이는 사람들로 하여금 '동림당인'과 '양산박도적'을 같은 무리라고 느끼게 만든다. 위충현이 기대하던 효과가 바로 그런 것이다.

 

위충현은 왜 양산박도적의 별명을 동림당인들에게 붙였을까? 필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원인이 있다고 본다.

 

첫째, '동림당인'과 '양산박도적'은 수가 비슷하다. 그리하여 쉽게 매치시킬 수 있다.

둘째, 사람들은 수호지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잘 알고 있고, 쉽게 이해한다.

셋째, 명나라조정에서는 <<수호전>>을 반동서적으로 금지해왔다.

넷째, 상층사회는 양산박도적을 홍수마귀로 보았다. 심지어 '동림당인'들도 양산박도적은 멸시했다.

 

위충현이 양자를 억지로 결헙시킨 것은 극력 '동림당'을 조직화, 요마화, 반동화, 실체화시키는 것이고, 그 목적은 이후의 대학살에 정당한 구실을 제공하는 것이다.

 

"검은 모자"는 씌워졌다. 모함이 이어진다. 뒷배경이 없는 '동림당인'은 그저 '어육'이 되어 갈기갈기 찢기는 수밖에 없다. 천계5년, 양련, 좌광두등 6명이 '수뢰죄'로 체포되어 억울한 죽음을 당한다; 천계6년, 위충현은 '장물추적'을 이유로 고반룡, 주순창등 7명을 죽음에 이르게 한다; 짦은 몇년동안 '동림당'의 골간은 거의 다 죽임을 당하게 된다. 이외에 위충현은 전국의 모든 서원을 철거하도록 명령하고, 동림당인비를 세운다. 동림당인들이 재기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명사>>에서는 당시 동림당인들의 참상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줄줄이 묶여나와서, 머리를 나란히 하고 죽임을 당했다(相接, 騈首就誅)"

 

위충현이 '동림당인'들에게 반동이라는 '검은 모자'를 씌움으로써, 자신은 더욱 큰 '관모'를 쓰게 된다. 동림당인들이 숙청된 후, 위충현은 내외의 대권을 장악한다. 내각, 육부에서 총독, 순무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심복을 심어놓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 자신은 "구천구백세"라고 칭하게 된다. 그의 관직이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곳까지 오른 것이다. 이 꿈에도 그리던 '관모'를 위하여, 위충현은 전체 조정을 더럽히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스스로 목을 매어 죽고, 효수되는 결말을 맞이한다. 사람도 죽고, 목도 날아갔는데, 권세를 상징하는 '관모'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