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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진)

진시황 병마용은 왜 투구를 쓰지 않았을까?

by 중은우시 2018. 2. 28.

글: 기점문사(起點文史)





1974년 3월, 진시황 병마용이 섬서성 임동현에서 다시 해를 보게 되었다. 규모가 거대하고, 살아있는 것같아서 병마용은 세계제8대기적이라고도 일컬어졌다. 최근 들어 일부 고고학자는 이해되지 않는 한 가지 현상을 얘기했다: "많은 사병의 머리에는 베로 만든 두건을 쓰고 있고, 군관모양의 병마용은 소가죽으로 만든 판상모자(板狀帽子)를 쓰고 있다. 그리고 많ㅇ느 사병은 긴 머리카락을 머리 위에 묶어서 상투를 틀었다."


사병이든 군관이든 진군은 일률적으로 투구를 쓰지 않았다. 그들은 투구만 쓰지 않은 것이 아니라, 몸에 걸친 갑옷도 매우 간결했다. 갑편(甲片)은 최소한도로 줄였다. 주력보병의 갑옷은 그저 앞가듬과 뒷등만 보호한다. 그리고, 가장 앞줄에 서 있는 노(弩)병부대의 몸에는 갑편이 하나도 없다.


진나라는 군대의 갑옷 투구는 충분히 갖춰줄 늘역이 있었다. 역사기록을 보면, 상앙변법(商鞅變法)이래로 진나라는 당시 제후국들 중에서 가장 부유했다. <사기>에 따르면, "진(秦), 대갑백만(帶甲百萬)"이라고 했다. 그 뜻은 백만의 갑옷을 입은 군대가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눈앞에 펼쳐진 이 복제된 진군은 전혀 의외이다. 무슨 이유에서 전쟁이 제일선에서 돌진하는 사병과 장령들이 투구를 쓰지 않았을까? 진나라가 육국을 통일할 수 있었는데, 왜 병사들에게 투구조차 공급해주지 못했을까? 이 괴이한 현상의 배후에는 어떤 역사의 진상이 숨어 있을까?


이천여년전에, 진나라에서 업무를 보던 현의 법률담당공무원 희(喜)는 사람들에게 이 수수께끼에 대한 해답의 단서를 제공해줄 지 모른다. 희는 세번에 걸쳐 군대를 따라갔고, 그는 죽간(竹簡)에 진나라군대가 형구(刑丘)를 공격할 때 부대에서 발생한 두 건의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형구를 공격하는 전투에서, 사병 갑은 적의 수급을 하나 베었다. 사병 을은 사병 갑을 죽이고 그 수급을 가지려고 기도했다. 그런데 사병 병이 이것을 발견하여, 사병 을은 그 자리에서 체포되어 입건되었다. 그외에 다른 죽간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두 사병이 수급 하나를 놓고 서로 주먹질을 했다. 진나라군대는 전쟁터에서 적군의 수급 하나를 놓고 자기들끼리 죽고 죽이는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도대체 무엇때문에 그들은 적군의 수급을 이토록 갈망했던 것일까?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기 135년전에, 개혁가 상앙은 진나라를 위하여 다른 어떤 나라에서도 도저히 참을 수 없을 것같은 가혹한 법률를 제정한다. 그후 전체 진나라는 엄격하게 이 법률에 따라 운영되고, 그 이후 6대의 진나라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쳐 진시황에 이른다.


상앙은 이렇게 규정했다: "진나라사병은 적의 수급 하나를 획득하기만 하면 작위1급, 밭과 집 한 곳과 노비 몇 명을 획득할 수 있다  참살하는 수급이 많으면 많을수록 획득하는 작위는 더 높아진다." 이것이 바로 상앙의 유명한 군공수작제도(軍功授爵制度)이다. 만일 한 사병이 전쟁터에서 두 개의 적군 수급을 획득하면 그는 죄를 지어서 갇혀있는 부모를 즉시 자유인이 되게 할 수 있다. 만일 그의 처가 노예라면 평민이 될 수 있다. 가족전승을 중시하는 중국인에게 군공작은 아들에게도 전해질 수 있다. 만일 부친이 전쟁터에서 전사하면, 그의 공로는 아들에게 부여된다. 한 사람이 군공을 획득하면, 온가족이 이익을 누리게 된다.


중국역사상, 진나라의 문화와 성격은 독특하다. 이것은 진나라사람들의 역사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진나라사람은 서북의 초원 출신이고, 유목민족과 혼거했다. 당시 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중원국가의 눈에, 그들은 낙후되고 야만적인 민족이었다. 비록 진나라사람들이 중원문명을 열심히 배우고 익혔지만, 그들은 중원문명의 윤리도덕을 진정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진나라사람들이 보기에 상무(尙武), 이익을 위하여 경쟁하는 것이야말로 삶의 이치였다. 


한비자는 전국시대의 대사상가인데, 그는 자기가 처음 접촉한 진나라사람에 대한 느낌을 이렇게 기록했다: 진나라사람들은 싸우자는 말만 들으면, 바로 웃통을 벗고 맨팔로 덤벼들어 생사를 도외시한다...당시 한 유명한 유세객이 전쟁터에서의 진나라군대를 이렇게 묘사했다. 그들은 맨머리에 맨팔로 용맹스럽게 앞으로 나간다. 육국의 군대와 진나라군대를 비교하면, 계란으로 바위치는 격이다...그들은 왼손에 사람머리를 들고, 오른 팔에 포로를 끼고, 자기의 상대를 뒤쫓아가서 죽인다. 유세객이 쓴 생생한 장면을 보면 진나라군대의 무서움은 정말 사람을 전율시킨다.


상앙의 저작에서 군공수작제도는 하나의 특수부대에 대하여 두터운 상을 규정했다. 상앙은 이를 "함대지사(陷隊之士)"라고 불렀다.


병마용갱에는 한 무리의 병사가 아주 특별하다. 그들은 손에 근접전에서 쓰이는 찌르는 류의 병기를 쥐고, 갑옷은 전혀 입고 있지 않다. 전체 지하군단중에서, 그들의 모습은 아주 특수하다. 이 부대의 사병은 도대체 무엇을 하였을까? 연구원도 계속 알아내지 못했다. 하나의 가능성이 있는 추측은, 전투에서 극히 위험한 임무를 띄고 기본적으로 전쟁터에 나서면 살아서 돌아오지 못하는 병사일 것이다. 큰 상을 받고서 전혀 생사를 도외시하는 사람들이 가담했고, 이들 사병은 아마도 결사대식의 함대지사일 것이다.


"희"의 죽간에는 이런 기록도 있다: 진나라군대는 전투전과 전투후에 모두 술을 엄청나게 마신다. 큰 사발의 술은 피를 빠르게 돌게 하고, 신경을 흥분시킨다. 전투명령이 하달되어 전쟁이 시작되면, 전쟁터에서 죽거나 아니면 관작이 오른다. 이런 때 술은 모든 사병들에게 한 가지 충동을 불러 일으킨다: 용감하게 싸워서 적을 죽이고 공을 세우자.


다시 투구를 쓰지 않고 호갑이 많지 않은 이들 병마용을 보자. 마치 한 가지 이유만이 이렇게 목숨을 돌보지 않는 행위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나치게 무거운 투구와 호갑은 그들이 적군을 죽여서 작위를 얻는데 방해가 된다. 그뿐만 아니라, 사마천은 <사기>에서 이렇게 기록했다: 전쟁터에서의 진군은 가슴을 드러내고 맨 팔로 싸웠다. 아예 그나마 입은 갑옷마저도 벗어던지는 것이다.


이들 병마용의 전사들이 후인들에게 전해주는 것은 진나라사람들의 강렬한 상무정신이다. 진나라사람들은 선진적이고 강대한 공격무기를 가졌지만, 갑옷투구는 중시하지 않았다. 이는 전군의 규정이었을까? 아니면 병사들이 스스로 그렇게 한 것일까? 아마도 진나라사람들의 싸움을 좋아하는 본성에서 아래 위가 컨센서스를 이루었을지도 모르겠다. 확실한 증거가 나오기 전에는 우리는 그저 추측할 수밖에 없다. 상앙이 제정한 군공수작제도는 아래에서 위까지 20급인데 이것은 오늘날의 군대계급을 연상시킨다.


기원전238년, 22세의 진왕 영정은 진나라의 대권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영정은 13살때 왕위를 계승한다. 그러나 나이가 너무 어려서, 국가대사는 계속 태후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장엄한 함양궁 안에서 그가 면류관을 쓰는 의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는 권력교체의 의식이다. 이때부터 진나라이 운명은 이 젊은이의 손에 쥐어진다.


황궁의 밖에는 오래전부터 준비된 반란이 개시된다. 노애(嫪毐)라는 자가 자신의 인마를 이끌고 함양궁으로 쳐들어온다. 그는 이런 위험을 무릅쓰고 권력을 탈취하려 했다. 그러나, 음모는 성공하지 못하고, 반란은 실패로 끝난다. 노애는 극형에 처해진다. 사마천은 이렇게 기록한다: 이번 무장반란은 수백명을 참수했다. 반란을 도모한 노애는 군대의 지지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반란에 참가한 사람은 겨우 수천명의 심복들 뿐이었다. 그들은 금방 일망타진된다.


노애의 권세는 국군의 바로 다음갈 정도였다. 20급작위의 꼭대기에 올라앉아 있었다. 사마천의 묘사로 우리는 알 수 있다. 진나라의 크고 작은 일은 모두 노애가 결정했다. 다만 그는 시종 군대를 움직이지는 못했다. 그는 심지어 국왕과 태후의 인장을 가지고 군대를 동원하려 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인장도 쓸모가 없었다. 진나라에서 군대를 움직이는 권한은 누가 가지고 있었을까?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것은 중국역사의 전환점이다. 다만 진나라가 멸망하는 기점이기도 하다. 진제국은 겨우 15년간 존속된다. 일찌기 백전백승의 진나라군대는 진제국이 망하면서 연기처럼 사라진다. 진나라가 무너질 때, 진군은 싸운 적이 있다. 그러나 그들의 전투력은 15년전과 비교했을 때 이미 천양지차가 있었다.


진군의 마지막 나날은 모든 중국인이 잘 알고 있는 바로 그 역사이다. 그것은 큰 비가 내리는 밤이었다. 변방을 지키기 위하여 가는 900명을 이끌고 가다가 큰 비로 기한을 놓치게 된다. 진나라법률에 의하면 기한을 어기면 참형이다. 그래서 그들은 반란을 일으킨다. 각지의 민중들이 즉시 호응한다. 반란은 마른 장작에 불이 붙은 것처럼 제국의 구석구석으로 퍼져간다. 반란자들이 함양을 짓밟고 들어올 때, 떨쳐 일어나서 저항한 것은 제국의 정규군이 아니라, 죄수를 모아서 만든 부대였다.


진시황이 매장된 후, 규모가 큰 지하능묘공사는 여전히 완공되지 못했다. 수십만의 죄수는 계속 처리하는데 바빴다. 이 도편에 새겨진 이름은  바로 그들 노동의 증명이었다. 반란군이 진시황릉에서 10리 떨어진 곳에 도착했을 때, 즉위한 진이세는 이들을 사면하고, 그들에게 무기를 들고 반란을 진압하라고 명령한다. 문제는 진나라의 주력부대는 도대체 어디에 있었느냐는 것이다.


진나라가 통일한 후, 군대는 두 번 크게 집결한다. 광서 계림 부근에 엄관(嚴關)이라는 요새가 있다. 50만진군이 일찌기 이곳으로 남하하여 토착민들과 전투를 벌인다. 반란이 돌연 일어났을 때, 이부분 진군은 막 평정한 남부영토를 지키고 있었다. 제국이 존망의 위기에 처했을 때 그들은 침묵을 선택한다. 사마천은 이렇게 기록한다. 현지의 최고지휘관은 명령을 내려, 남북으로 통하는 모든 통로를 봉쇄한다. 군대가 북상하여 전투하는 것을 엄금한다. 남부진군은 이렇게 철저히 자신의 손으로 창건한 제국을 포기한다.


진제국이 돌연 성립되었다가 순식간에 연기처럼 사라지는 운명은 마치 항거할 수 없는 역량이 주재한 것같다. 이 심장불로(深藏不露)의 역량은 마찬가지로 이 군대의 부침을 결정한다.


중국역사상, 진나라문화는 유일무이하다. 진나라사람들은 공리적이고 실용적이었다. 개척정신과 진취정신이 풍부했다. 그들은 규칙과 질서를 숭배하고, 무력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다. 아마도 이런 문화전통이 진나라가 굴기하기 전에 이후의 굴기를 결정했는지도 모르겠다. 동시에 복멸(覆滅)이 씨를 심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진시황이 이 군대를 이끌고 얻은 휘황한 업적을 이룬다. 그러나, 이 제왕의 시대를 초월한 야심은 제국의 국력을 소진시킨다. 어찌 되었건 한 군대의 운명은 그 나라에 매어 있다. 진군의 최후 순간에 제국의 질서는 이미 붕괴되었다. 병사들이 전방에서 죽기살기로 싸우고 있을 때, 그들의ㅡ 가족은 이미 아무도 돌봐주지 앟게 되었다. 복멸의 운명은 거스를 수가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