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사회/중국의 성씨

구(丘): 구씨사당은 세계최대규모이다.

중은우시 2018. 7. 9. 18:21

글: 천지사화(天地史話)





중국의 성씨는 황제(黃帝)시기에 기원하고, 춘추전국시대에 대량으로 발생한다. 주(周)나라가 건립된 후 자신의 종족, 공신, 상고성현의 후예를 분봉하여 제후국으로 삼는다. 이들 소국이 멸망한 후에 현재의 대다수 성씨가 생겨난다.


주나라의 공신 강태공(姜太公)은 제(齊)나라에 분봉된다. 주무왕이 죽은 후, 강태공과 장남 여급(呂伋)은 함께 호경(鎬京)으로 가서 주성왕(周成王)을 보좌한다. 강태공의 셋째아들 구목공(丘穆公)은 제나라를 지킨다. 그리고 제나라의 수도인 영구(營丘)를 건설한다. 후세의 자손들은 그리하여 "구(丘)"를 성씨로 삼는다. <공자가어> <좌전>등에 모두 기록이 있다.


구씨는 제나라의 종실이다. 몇대가 내려간 후 왕위쟁탈의 내전이 벌어진다. 구루가(丘婁嘉)는 화가 미칠까 우려하여, 제나라를 떠나 초(楚)나라로 가서, 초나라의 좌사관(左史官)을 맡아, 역사기록을 책임진다. 구루가의 후대는 대대로 초나라의 좌사관을 맡는다. 그래서 구(丘)성을 좌(左)로 바꾼다. 초나라에서도 군권쟁탈의 내란이 발생하자 구루가의 13대손인 좌성(左成)은 노(魯)나라로 도망가 태사(太史)를 맡는다. 좌성의 아들이 바로좌구명(左丘明)이다. 그는 부친의 관직을 세습받아 노나라의 태사가 된다.


좌구명이 사관으로 있을 때, <춘추>를 기반으로 하여, <주지>, <진승>, <정서>, <초올(楚杌)>등의 열국자료를 참조하여, 사서 <좌전(左傳)>을 쓴다. 좌구명은 말년에 두 눈을 실명한다. 관직을 사임한 후 수십년동안 보고 들은 것을 가지고 각 제후국의 이야기를 기술하기 시작한다. 이를 모아 저명한 역사명저 <국어(國語)>를 저술한다. 이 두 부의 사서는 중국초기의 가장 중요한 사서이다. 좌구명의 저작 및 그의 학술사상은 유학문화의 중요한 구성부분이 된다. <좌전>은 아주 높은 사학, 문학적 가치가 있다. 또한 저명한 군사저작이기도 하다.


좌구명은 공자보다 나이가 약간 어렸다. 일찌기 공자와 함게 관료를 지낸 바 있다. 공자는 좌구명과 호오(好惡)가 같다고 말했고, 좌구명도 공자의 정치를 지지한다. 그는 품행이 고결하여 공자로부터 높이 평가받는다: "좌구명이 부끄러운 짓이라고 여기는 것은 공자도 부끄러운 짓이라고 여겼다."


좌구명의 후인에는 좌(左)성과 구(丘)성이 있다. 삼국시대, 조위의 관구검(毌丘儉)의 아들 종(宗)등 4명이 구(丘)씨성으로 바꾸었다. 한(漢)나라이후 흉노, 선비족 중에서 구림(丘林), 구내돈(丘乃敦), 구목릉(丘目陵)등이 구씨로 성을 바꾸었다. 송나라이후 구씨는 남방의 대성이 되고, 주로 복건, 호남, 강소, 절강, 하남, 하북, 안휘, 강서 등지에 분포한다. 구씨는 대만의 대성이기도 하다.


한나라이후, 공자의 이름을 피휘(避諱)하여, 속속 구(丘)씨는 구(邱)씨로 고친다. 청나라 옹정3년, 조서를 내려 선사 공자의 이름을 피휘해야 한다며 무릇 성씨, 지명에 구(丘)자가 있으면 일률적으로 읍부(邑部)를 추가하여 구(邱)로 고치도록 한다.


신해혁명후, 민항(閩杭_의 거인 구하공(邱荷公) 및 대만의 진사 구봉갑(邱逢甲)은 원래의 구(丘)씨로 되돌아가자고 주장하며, 광주등보에 일족은 성을 구(丘)로 되돌리자고 호소한다. 일부 구(邱)씨는 구(丘)로 되돌렸지만, 여러가지 원인으로 아직 고치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 현재는 구(丘)씨와 구(邱)씨가 모두 존재한다.


구씨성이 많은 곳은 하남(河南), 오흥(吳興)이다. 구씨성의 주요 당호에도 하남(河南), 문장(文莊)등이 있다. 하남당은 구씨의 가장 왕성한 한 갈래이다. 역대로 명인을 많이 배출한다.


하남군은 현재의 낙양시이다. 근대에 구씨성의 하남당 발원지이기도 하다. 낙양시 언사(偃師)에는 중화구씨총사(中話丘氏總祀)가 있다. 현장이 고향과 당공릉의 중간에 있는 구하촌(邱河村)에 있다.


중화구씨총사의 부지면적은 200여무에 달하며, 건축면적은 8,600평방미터이다. 현재 전세계에서 단일성씨로는 최대의 사당이다.


역사상 구씨성의 중요인물로는 남조 양나라의 문학가 구지(丘遲), 당나라의 우무후대장군, 기섬이주자사 구행공(丘行恭), 시인 구위(丘爲), 남송의 학자 구부국(丘富國), 원나라의 장춘연도주교 진인 구처기(丘處機), 명나라의 예부상서, 문연각대학사 구준(丘濬), 대장 구복(丘福), 청나라의 희곡작가겸 화가 구원(丘園), 작가 구심여(丘心如), 시인 구봉갑(丘逢甲)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