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유계흥(劉繼興)
장신부는 중국공산당의 주요 창시자중 한 명이다. 그의 지위는 진독수(陳獨秀)와 이대쇠(李大釗)의 바로 다음이었다. 지금 갈수록 많은 사람들은 그를 당의 3대 창시자중 한 명이라고 부른다.
그가 북대도서관에서 일할 때는 일찌기 당시 북대도서관에서 조리원으로 있던 모택동의 '직속상사'였고, 그는 장국도, 주은래의 입당소개인이며, 나중에 주은래와 함께 주덕을 중국공산당에 가입시키기도 했다.
장신부는 20세기 중국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중 한 명이다. 그는 신청년 잡지의 편집위원이고, <매주평론>의 창간인이며, 중국의 루쏘연구 제일인이고, 중국에 최초로 아인슈타인을 소개한 사람이고, 12.9운동의 막후총지휘자이다. 그리고 민맹(民盟)의 창시자 겸 지도자이다.
1. 가장 먼저 전종서(錢鍾書)를 높이 평가해서, '국보'라고 부르다.
현대중국역사상 전설적인 색채를 지닌 이 장신부가 가장 먼저 전종서를 높이 평가해서 잡지에 소개했고 그를 '국보'라고 불렀다. 전종서와 같은 해애 청화대학 외국어어문학과에 입학한 상풍(常風)은 그의 저작 <전중서 동학과의 나날>에서 이렇게 썼다: 정신부 선생은 자주 새로운 외국책을 사러 왔다. 그는 보고 난 후에 글을 써서 소개했다. 이들 글을 쓰고나면 항상 전종서에게 그를 대신하여 <청화주간>에 보내도록 했다. 당시 청화대학 교수중에 전종서를 알고 이해하는 사람은 같은 과의 두,세 명 선생이외에는 바로 장선생이었다. 개략 1934년, 장선생은 <대공보>의 부간 "세계사조"이 글에서 이렇게 말한다: "전종서와 나의 형제 장대년(張垈年)은 나란히 국보이다."
당시, 전종서는 겨우 24살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큰 칭찬을 받은 것이다. 나중에 전종서와 장대년은 모두 전국 내지 전세계의 유명한 학자가 된다. 이를 보면 장신부는 사람을 알아보는 방면에서 선견지명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 모택동의 '직속상사'였다.
'5.4'이래의 중국역사를 연구하려면, 장신부는 절대로 피해갈 수 없는 중량급 인물이다. 비록 역사는 거의 그를 잊고 있지만, 그리고 현재는 많은 사람들이 그를 낯설어 하지만.
1917년 북경대학을 졸업한 장신부는 모택동과 같은 해에 출생했다(1893년), 그리고 모택동과 함께 북대도서관에서 일했다. 신중국성립초기, 한번은 한담을 나누면서, 장사쇠(章士釗)가 모택동에게 장신부의 업무안배문제를 꺼냈다. 그때 모택동은 이렇게 말한다: "그는 내 직속상사였어..." 그리하여 사람들이 잘 모르던 이야기가 나오게 된다.
장신부는 북대에서 신문화운동의 표지이자, 중국현대의 가장 위대한 잡지중 하나인 <신청년>의 편집위원이었다. 초기 혁명가 정초린(鄭超麟)은 이렇게 회고한다: 자신이 마르크스주의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많은 의미애서 장신부 선생의 <신청년>잡지를 읽어서이다.
1918년 겨울, 진독수, 이대쇠, 장신부 3명은 공동으로 신문학운동의 기치중 하나인 <매주평론>을 창간하고, 장신부가 편집을 책임진다. 당시 국내에 큰 영향을 미친다.
3. 중국공산당 주요 창시자중이 한 명이며 주은래와 주덕의 입당소개인이다.
1920년 8월 중순, 진독수는 공산당의 창당을 준비한다. 조직명칭을 확정하기 위하여, 상해의 진독수는 이대쇠와 장신부에게 서신을 보내어 이렇게 말한다: "창당의 일은 단지 당신(장신부를 가리킴)와 수상(守常, 이대쇠)와만 얘기할 수가 있다."
창당초기 장신부의 중요성은 이를 봐도 알 수가 있다. 그는 이대쇠와 당시 북경공산주의소조의 두 창시자이다. 장국도(張國燾)는 그가 소개하여 북경공산주의소조에 들어온다. 장신부는 또한 주은래를 중국공산당에 가입시킨 소개인이다. 그는 또한 주은래와 함께 주덕을 중국공산당에 가입시킨다.
4. 황포군관학교의 첫번째 공산당원
1924년 2월, 막 유럽에서 돌아온 장신부는 중국혁명의 본거지 광주로 간다. 이대쇠와 진독수가 추천하였고, 거기에 당시 광주에는 유학생이 아주 적었으며, 개조한 후의 국민당은 인재가 절박하게 필요하여 장신부는 요중개(廖仲愷)등으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는다. 당시 국민당은 황포군관학교를 개교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는데, 군관학교를 준비하는데 참여한 사람으로는 손중산이 초청한 소련의 군사고문들도 있었다. 그들중에 어떤 사람은 영어와 독일어를 할 줄 알았다. 영어, 독일어에 능통한 장신부는 금방 교장 장개석의 통역이 된다. 그리고 황포군관학교의 개교업무에 참여한다.
1924년 5월, 손중산은 장신부를 황포군관학교 정치부 부주임으로 임명한다. 당시 중국공산당에서 황포군관학교에 들어간 최초의 인물이 된다.
당시의 정치부 주임은 국민당 원로인 대계도(戴季陶)였다. 그가 떠나고나서 장신부는 여러번 정치부 대리주임을 맡는다. 황포군관학교의 개교후에, 정치공작간부가 특별히 필요했다. 당대표 요중개와 정치부주임 대계도는 여러번 장신부에게 군관학교에서 일할 인재를 추천해달라고 요구한다. 장신부는 15명의 명단을 내놓는데, 첫번째가 바로 주은래였다. 장신부는 주은래가 유럽에서 돌아오는 경비까지 해결해주며, 전력을 다해서 그를 정치부주임의 위치로 추천한다. 이렇게 하여 주은래는 정치무대에 화려하게 등장하게 된다.
1924년 6월 하순, 장신부는 장개석과 같이 일을 할 수가 없어서, 정치부 부주임의 직위를 사임한다.
5. 중국의 루쏘연구 제일인
1925년 1월, 중국공산당 제4차 전국대표대회가 상해에서 개최된다. 장신부는 회의에 참석한다. 회의때 당의 강령을 토론하면서 국민당과 결맹을 맺는데 반대하여, 채화삼(蔡和森), 장태뢰(張太雷)등과 말다툼을 벌인다. 그리고 화를 참지 못하고 공산당을 탈당한다.
탈당이후, 장신부는 교육과 번역, 저술을 위주로 살아간다. 전후로 기남대학, 대륙대학, 대하대학, 중국대학, 북경대학, 청화대학 등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가 가르친 것은 모두 루쏘철학과 논리였다. 당시의 철학계에는 듀이의 실용주의철학의 주요소개자는 미국유학에서 돌아온 호적(胡適)이고, 앙리 베르그송의 생명주츼철학의 주요 소개자는 독일유학에서 돌아온 장군려(張君勵)였고, 헤겔철학의 주요 소개자는 미국,독일을 유학했던 하린(賀麟)이었다. 루쏘의 철학의 주요소개자는 바로 프랑스에 유학했던 장신부였다.
1931년, 장신부는 청화대학의 철학교수가 되고, 논리와 서양철학사를 강의한다. 당시, 청화대학의 철학과에는 풍우란(馮友蘭), 김악림(金岳霖), 등이칩(鄧以蟄)의 세 교수가 있었다. 이 몇 사람은 서로 의기투합했고(풍우란의 당매는 나중에 장신부의 동생 장대년에게 시집간다), 이들 대사급의 교수들이 청화대학 철학과에 모여서 '사대금강'이라 불리웠다. 진용이 호화롭고 실력이 강한 것으로 유명했다.
장신부는 당시 처음으로 중국에 루쏘, 로망롤랑등 서양의 진보한 사상가들을 소개한다. 전후로 <신청년>등 잡지에 로쏘의 여러 글을 번역한다. 나이 겨우 25살때, 이미 루쏘전문가로 명성을 떨친다. 루쏘라는 두 글자의 한자번역인 羅素도 장신부가 정한 것이다. 루쏘는 한 프랑스친구에게 보낸 서신에서, "중국의 장신부 선생은 나보다 더 나의 저작을 잘 이해하고 있다"라는 말까지 한다.
6. '12.9'운동을 지도하여 청화대학에서 해고되고, 장개석과의 갈등은 날로 심화된다.
1935년 겨울, 장신부는 유청양(劉淸揚), 요극광(姚克廣, 姚依林), 손손성(孫蓀荃, 당시 여일중(女一中)교장, 나중에 또 다른 전설적인 인물인 중국공산당의 창당원로 담평산(譚平山)에게 시집간다)등과 공동으로 북경의 '12.9'학생운동을 일으키고 지도한다. 장신부는 데모총지휘자중 한 명이었다. 당시의 정부는 1936년 2월 장신부, 유청양을 동시에 체포하고, 그들을 안정문 안의 육군감옥에 수감시킨다. 두 달 후, 풍옥상이 보석으로 석방한다. 석방된 후, 장신부는 다시 몇 달 동안 강의를 한다. 여름방학이 되었을 때, 청화대학의 당국의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장신부를 해임한다.
1936년 1월, 북경문화계구국회(민맹의 전신, 구국회의 또 다른 주요지도자는 심균유(沈鈞儒), 장내기(章乃器), 추도분(鄒韜奮)이다)를 창립한다. 장신부는 대회주석단성원과 구국회의 집행위원으로 추천된다. 나중에 화북각계 구국회의 책임자가 된다. 애국진보 교수중에서 비교적 영향력이 있는 대표적 인물이었다.
장신부는 공산당을 떠난 후에 등연달(鄧演達)을 따른 바 있다. 손중산의 "연아, 연공, 부조농공"의 삼대정책을 관철하기 위하여, 그는 등연달, 장백균(章伯鈞), 황기상(黃琪翔)과 공동으로 상해에서 중국국민당임시집행위원회(오늘날 중국의 8개 민주당파중 하나인 중국농공민주당의 전신)를 창건하고, 사람들은 제삼당(第三黨)이라고 불렀다.
1938년 7월, 국민당은 한구에서 국민당창정회1기1차대회를 개최한다. 장신부는 '구국회'의 심균유등 6명과 제1기 참정원이 된다. 장신부는 참정원으로서, 장개석과의 갈등이 날로 심화된다. 장개석이 한번은 면전에서 그를 욕한 바 있다. '정부를 반대한다'고. "너는 글을 써서 정부에 반대할 뿐 아니라, 방공동 안에서도 정부에 반대한다!" 그리고 누군가 방공동 안에서 친히 들었다고 하더라고 말한다.
장신부는 화가 나서 말한다. 나는 그런 자를 아예 알지도 못하고, 순전히 없는 걸 지어낸 것일 뿐이라고.
장신부는 아무런 이유없이 장개석에게 욕을 먹고 나니, 화를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그래서 중경을 떠나서 유격전을 하겠다고 말한다. 정치부장 장치중(張治中)은 그 말을 듣고 뛰어와서 만류하여, 그가 비로소 남아 있었다. 자연히 참정원은 더 이상 하지 못하게 된다.
7. 가장 후회하는 두 가지 일
1948년, 장신부는 저안평(儲安平)이 편찬한 <관찰>에 <평화를 호소한다>는 글을 발표한다. 여기서 장개석의 "감란정책(戡亂政策)"을 옹호하고, 해방군은 '비(匪)"라고 욕한다. 이때는 장개석도 해방군을 '비'라고 부르지 않았었다. 당시 사람들은 놀라서 소리친다; '장신부가 제 정신이 아니다." 장신부는 이렇게 대답한다: "나의 그 글은 3000원 원고료를 받고 쓴 것이다. 나는 당시 정말로 그 3000원이 필요했다."
바로 이 글로 인하여 그의 후반인생은 완전히 뒤바뀐다. 11월 15일, 홍콩에서 개최된 민맹총부의 제4차확대회의에서 "장신부의 언행은 반인민, 반민주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라는 이유로, 일찌기 창시자였던 장신부의 맹적을 박탈한다. 12월 16일, <인민일보>는 글을 발표하여, "반도 장신부의 매신투고(賣身投靠)를 통열히 배척한다."는 글을 싣는다. 10일후, 이미 동북해방구에 들어간 장신부의 부인이자 최초의 여성공산당원중 하나인, 저명한 정치활동가 유청양은 <인민일보>에 이혼공고를 싣는다. 제목은 "장신부가 민주를 배반하여 나쁜 놈의 앞잡이가 되었다. 유청양은 엄히 질책한다"였다. 그리고 이후 장신부와는 인연을 끊는다고 선언한다.
장신부는 말년에 자신의 일생을 회고하면서, 가장 후회하는 두 가지 건을 얘기한다. 첫째는 1925년에 자신이 참여하여 만든 중국공산당을 탈당한 일이고, 다른 하나는 1948년 공산당이 국민당을 연이어 격파하며 승리를 눈앞에 두었을 때 <평화를 호소한다>는 글을 써서 민맹에서 제명된 것이다.
건국후, 주은래 총리의 도움으로, 장신부는 북경도서관에서 연구원으로 있으며, 색을 고르고 고서적을 수집하는 일을 책임진다. 그리고 문사자료의 정리와 연구에 종사한다. 그는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등 여러 언어에 능통하여, 외국어 서적을 도입하는 일도 책임졌다. 나중에 제5기, 제6기 전국정협위원도 된다. 1986년, 장신부는 사망한다. 향년 93세이다. <인민일보>는 부고를 발표하여 그를 "저명한 애국민주인사", "중국공산당의 오랜 친구"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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