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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사회/중국의 대학

제로대학(齊魯大壑): 한때 남제북연(南齊北燕)으로 불리던 명문대학

by 중은우시 2018. 6. 29.

글: 악남(岳南)


옛날에 제로대학은 국내외에 명성을 날렸다. 현재 이 대학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건축물과 교육, 학술전통은 여전히 후세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제로대학의 역사는 190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 영국 및 카나다에서 온 여러 기독교회, 북미장로교회가 공동으로 출자하여 설립했다. 민국시기 외국인이 중국에 설립한 13개 교회대학중 하나이다. 당시 "남제북연"(남쪽에는 제로대학, 북쪽에는 연경대학)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중국역사상 가장 오래되고, 가장 명성이 혁혁했던 대학중 하나이다.


산동성 경내에서 가장 유명한 두 개의 대학을 말하자면 제로대학과 산동대학을 꼽아야 하지만, 두 대학은 관계가 별로 없다. 두 대학은 성격, 교풍, 운명이 서로 다르다. 산동대학의 전신은 1924년에 탄생한 사립청도대학(私立靑島大學)이다. 1928년 국립청도대학으로 바뀌고, 1931년 다시 국립산동대학으로 명칭을 변경한다. 양진성(楊振聲), 문일다(聞一多), 양실추(梁實秋), 심종문(沈從文)등의 저명한 학자들이 이 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었다. 1958년, 산동대학은 제남으로 돌아간다. 현재의 산동대학 교사(校史)에서는 1901년 탄생한 제남의 산동대학당(山東大學堂)을 기원응로 삼는다. 2001년 산동대학은 백년교경회(百年校慶會)를 개최하기도 했다. 그러나 자세히 산동대학의 교사를 연구해보면 알 수 있다. 산동대학과 산동대학당 간에는 이름이 비슷한 것을 빼면 아무런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는 것을. 소위 백주년기념이라는 것은 헛된 말이다. 산동대학과 비교하면, 제로대학의 역사는 더욱 유구하고 복잡하다. 연원을 따지자면 최초는 186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제로대학의 교사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1864년, 미국장로회 선교사인 적고문(狄考文, Calvin Wilson Mateer), 1836-1908)은 산동 등주(지금의 봉래)로 와서 중국경내 최초의 현대고등교육기구인 등주문회관(登州文會館)을 설립한다. 이는 제로대학의 맹아이자 발단이다. 바로 등주문회관시기에, 적고문과 교사 추립문(鄒立文)은 협력하여 최초로 아라비아숫자를 중국에 들여온다. 1884년, 영국침례교회가 청주(靑州)에 광덕서원(廣德書院)을 설립한다. 1904년, 등주문회관과 청주광덕서원은 합병하여, 유현(濰縣)에 광문학당(廣文學堂)을 설립한다. 1890년 미국기독교 장로회는 제남에 교회병원을 설립하고 부설 의도학당(醫道學堂)을 설치한다. 1906년 청주의도학당이 병합되어, 제남공합의도학당(濟南共合醫道學堂)이 된다. 1917년, 유현광문학당, 청주공합신도학당(靑州共合神道學堂)이 제남으로 옮겨가 공합의도학당에 병합된다. 같은 해, 남경금릉대학(南京金陵大學)의 의과(醫科)와 한구(漢口) 대동의학(大同醫學)의 교사와 학생이 제남공합의도학당에 병합된다.


1917년 9월, 제로대학이 정식 개학한다. 문리학원, 의학원, 신학원을 두고, 학생 277명, 교사직원 53명이 된다. 그중 외국인 교직원이 36명이었다. 교장은 영국인 브루스이고, 경비는 영국, 미국, 카나다등의 교회에서 지급했다. 학교의 확충수요에 맞추기 위하여 학교주재자들은 거금인 200여만원을 조달하여 당시 제남시 신건문 밖에 교사(校舍)를 짓고 새로 학교를 설립하며, 정식으로 제로대학이라 명명한다.


제로대학은 비록 제남에서 설립되고 학생을 모집하며 수업을 개설했지만, 오랫동안 정식으로 등록하지 못한다. 14년후인 1931년 12월, 기독교도라는 공상희(孔祥熙)의 도움으로, 남경국민정부 교육부는 비로소 산동성교육청에 공문을 보내 제남에 등록하도록 허가하여, 정식의 합법적 지위를 승인한다. 공상희는 이때 도움을 많이 주었고, 중국특색의 처세철학으로 제로대학은 적극적으로 나서서 공상희를 제로대학의 명예교장으로 모신다.


공상희와 제로대학의 인연은 약간 극적인 면이 있다. 경자년(19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권비의 난(의화단의 난)에서 시작한다. 그 해에 산동에서는 의화단이 들고 일어나 전국을 석권한다. 북경천진일대 특히 북경의 서십고교당등 서양인의 선교거점은 의화단 권비의 공격과 방화를 당한다. 중국각지에 흩어져 있는 기독교회도 마찬가지로 권비의 공격과 방화를 당한다. 황발벽안의 서양선교사들은 '도창불입'이라고 얘기하는 의화단 단원들 그리고 경성의 좁은 후통안의 한 무리 토착깡패들의 포위공격과 추격을 당해 머리를 감싸고 도망쳐야 했고,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다. 이런 상황하에서, 미국공리회가 직예 통주(지금의 북경시 통주구)에 설치했던 노하학원(潞河學院)은 이미 정상적으로 수업을 진행할 수 없었다. 외국교수들은 화가 곧 닥칠 상황이 되자 속속 도망간다. 이때 공상희라고 부르는 산서출신 청년학생도 어쩔 수 없이 학원을 떠나야 했다. 그는 산서 태곡(太谷)의 고향으로 도망가서 화를 피하고자 했다.


1890년 봄, 외국교회가 설립한 산서 태곡의 복음소학교에서 학생을 모집했다. 나이어린 공상희는 이 학교에 들어가 공부하고자 한다. 그러나 부친의 동의는 받았지만, 친척들이 반대했다. 그것은 공문자제(孔門子弟)는 '성현서(聖賢書)'를 읽어야 한다는 영광된 전통에 어긋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방문사도의 학문이라는 것이다. 여러번 다투어서 결국 공상희는 친척들의 동의를 받아 이 학교에서 공부한다. 기독교를 믿지는 않았지만, 입학이 허락되었다. 1894년 연말, 공상희는 소학교를 졸업하고, 성적이 우수했다. 그러나 팔고시첩(八股試帖)같은 류의 기술은 배우지 않았다. 장래를 생각하여, 공상희의 부친 공번자(孔繁慈)는 아들이 계속 신식학당에서 공부하여 신학문을 배우도록 해준다. 다음 해 태곡소학당의 외국인교사 위록의(魏祿義)의 추천을 받아, 공상희는 직예 통주로 간다. 거기서 미국공리회가 설립한 노하서원에 들어가 공부한다. 공상희는 열심히 공부했고, 국학의 기본이 튼튼하여, 선교사들과 함께 교외로 나아가서 강의할 때, 자주 유가사상과 기독교교의를 결합하여 강연효과를 강화시켰다. 그리하여 서원 고위층이 그를 중시하게 된다. 노하서원의 젊고 예쁜 여선교사 맥미덕(麥美德, S Luella Miner, 1861-1935)는 특히 공상희를 주목한다. 하루종일 얼굴에 웃음을 띄고 있는 이 산서젊은이는 인재라고 여긴 것이다. 그녀는 출중한 매력과 열정으로 결국 젊은 공상희로 하여금 세례를 받게 하고, 독실한 기독교도가 되게 한다.


1900년 의화단운동(이 해가 경자년이었으므로 경자지란이라고도 부른다) 이 일어난 후, 당시의 산서순무 육현(毓賢)은 청병과 권비로 하여금 각지에서 교회를 불태우고 교도를 살륙하도록 교사한다. 공상희는 산서로 돌아가는 도중에 수양(壽陽), 태원(太原)에서 의화단이 방화, 살인, 약탈하는 참혹한 장면들을 목도한다. 그리하여 급히 태곡으로 돌아갔고, 일찌기 그의 병을 치료해준 바 있는 교회의사 고사(高斯)와 그를 교회학당에 보내준 위록의등 서양인을 구해준다. 이때 태곡현성에 높이 솟아 있던 기독교회는 일찌감치 권비와 난민들에 의해 불태워지고 부서졌다. 태곡에 있던 모든 외국인 선교사들은 교회의 낡은 3칸의 방안에 갇혀 있었다. 공상희는 집으로 돌아가는 중에, 모의를 해서, 암중으로 서양인을 지키던 향민을 매수하여, 두번 위록의, 고사를 포함한 9명의 선교사와 일부 교민을 만나본다. 그들에게 도망칠 준비를 하라고 당부하고, 필요한 여비도 일부 준다. 공상희는 큰 돈으로 회유하여, 지키고 있던 권비로 하여금 그 중 3명의 서양인이 탈출하여 도망할 수 있도록 돕게 한다. 공상희으 행동은 비록 비밀스럽고 신속했지만, 그래도 의화단의 권비들에게 발각된다. 이들은 대노하여 즉시 권비와 지방깡패들을 동원하여 사방을 수색한다. 그리고 만일 공상희를 잡으면 즉시 처형하겠다고 소리친다. 알면서도 고발하지 않거나 숨겨주는 자는 모조리 찾아내서 다 죽여버리겠다고도 한다.


날로 험악해지는 국면앞에 공상희는 더 이상 태곡에 머물 수 없었다. 친척과 고향사람들의 엄호를 바으며 월흑풍고(月黑風高)한 밤에 험지를 벗어난다. 태곡교당내에 갇혀 있던 미국선교사와 중국교민 모두 14명은 반달 뒤에 모조리 살해된다. 열강들이 분노하여, 대거 병력을 중국에 파견해서 의화단을 소탕한 후, 공상희는 다시 태곡으로 돌아온다. 태곡지현을 찾아가서 살해된 선교사와 교도들의 후사를 처리한다. 조금 후 그는 동창 장진복(張振福)과 북경으로 가서 화북공리회에 태곡교회사건의 상황을 보고한다. 그리고 화북교회에서 파견한 산서교회사건 사후처리담판대표 섭수정(葉守貞)과 문아덕(文阿德)의 조수가 되어 산서로 가서 담판에 참가한다. 태굑교회사건의 처리가 완료된 후, 화북공리회는 공상희의 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모시고, 일처리를 깔끔하게 하는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그를 미국오벌린대학으로 보내어 공부하게 하기로 결정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공상희를 이끌어준 노하서원 맥미덕의 노력으로, 오벌린대학의 교무회의를 거쳐, 학교에서 비용을 대어 공상희를 미국으로 부른다.


1901년 가을, 공상희는 맥미덕이 친히 호송하여 미국으로 간다. 오하이오의 오벌린대학에 입학하여, 먼저 이화(理化)를 전공하고, 나중에 사회과학으로 전과한다. 재미기간동안, 공상희는 자신의 붓으로 이전에 그가 겪었던 그 놀라운 경력을 북미와 유럽대륙의 잡지에 기고하여, 이 중국청년영웅의 장거를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된다. 1905년, 공상희는 예일대학의 대학원에 입학하여 광물학을 공부한다. 907년, 예일대학을 졸업하고, 이화학 석사학위를 받는다. 귀국후의 공상희는 자칭 자신의 미래 이상과 포부를 "교육을 제창하고, 실업을 진흥한다"고 말한다.


경자지란으로부터 30년이 지난 1930년, 직예 노하서원의 미녀 맥미덕은 산동 제남으로 와서 제로대학의 여학생부 주임을 맡는다. 이미 젊지않은 맥미덕은 제로대학의 외국인교수들에게 30년전 권비의 난과 산서 태곡에서의 일을 얘기한다 그리고 그녀의 마음 속에 있는 청년영웅 공상희를 얘기한다. 민감한 학교 고위층은 즉시 이 이야기의 배후에 숨은 현기를 알아차린다. 제로대학이 그렇게 원했으나 이루지 못한 등록의 기회가 마침내 왔다는 것을. 즉시 맥미덕을 남경으로 보내 공상희를 만나게 한다.


이때의 공상희는 더 이상 옛날의 그 소년이 아니었다. 미국에서 귀국한 후, 천시, 지리, 인화의 세 가지를 모두 얻어, 관료로서 승승장구했다. 이미 남경국민정부 공상부 부장이라는 요직에 앉아 있었다. 공씨는 이미 주름살이 가득한 맥미덕과 만난 후, 돌연 기억의 깊은 곳에서 자신의 아름다운 추억을 더듬는다. 그것은 또 다른 맛이다. 맥미덕이 남경으로 온 이유를 얘기하자, 공상희는 성심성의껏 돕겠다고 응락한다. 그리고 ,공상희가 직접 요청해서, 1931년 12월, 남경국민정부 교육부는 산동성 교육청에 공문을 보내 제로대학의 등록을 허가하도록 한다. 그리하여 제로대학은 정식으로 합법적 지위를 획득한다. 공로가 혁혁한 공상희는 이렇게 하여 제로대학의 명예총장이 된다.


"등록"후의 제로대학은 새로운 생명을 얻은 것과 같았다. 학교측은 사기가 오른다. 두터운 자금실력이 뒷받침이 되어 교사규모를 확충하고, 유명한 교수들을 모셔온다. 입학하는 학생이 급격히 늘어나고, 각 학과와 과정도 날로 완비된다. 이와 동시에, 국내의 몇개 유명대학을 본바아, 중국민족문화를 홍양하고 연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국학연구소도 설치한다. 그리고 종정문(鍾鼎文), 문자학(文字學), 음운학(音韻學), 고대문선(古代文選), 미학(美學), 고고(考古)등의 과정을 개설한다. 국내의 다른 몇 개 저명대학의 국학연구소와 견주기 위하여, 제로대학은 하남안양에서 여러해 동안 선교활동을 해온 카나나국적의 목사 명의사(明義士, James Mellon Menzies)를 교수로 모셔온다. 그리고 그로 하여금 국학연구송서 연구에 종사하고, 고고학과정을 개설하도록 했다. 명의사는 박학다식하기로 이름난 중국통이었다. 중국문화에 대하여 강렬한 흥미를 가지고 푹 빠져 있었다. 그는 안양에서 선교하는 기간동안, 중국의 시국이 불안한 시기에 항상 늙은 백마를 타고 원수(洹水)를 다니면서 포교한다는 명목을 내걸고, 대량으로 중국문화재를 수집했다. 은허 갑골문을 수집하고 구매한 것만 5만여건에 이르렀다. 이들 문화재는 대부분 해외로 내보내 졌고, 카나다이 터론토황실박문관은 그를 위하여 "명씨수장품전용전람실"을 두었다. 운송해가지 못한 문화재중 일부는 제로대학의 국학연구소에 가격을 평가해서 매각한다. 항전이 시작되자, 명의사는 일부 갑골문을 몰래 제로대학의 집 바닥에 묻고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는다. 항전이 끝난 후, 여러 우여곡절을 거쳐 이들 보물은 다시 세상에 나타난다.


1937년 칠칠사변이 발발한 후, 북경천진을 점령한 일본군이 남으로 진격한다. 국군은 연이어 패퇴했다. 10월, 일본군이 황하로 진격하고, 제남에 있는 제로대학의 학생들은 공부에 마음을 쏟을 수가 없었다. 수업이 중단된다. 일부 직원이 학교에 남아 있는 것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교수와 학생은 주로 교육교학설비를 사천으로 이전한다. 다음해 가을, 성도 화서패에서 화서협합대학의 일부 교사를 빌려 복교(復校)하고 수업을 재개한다. 항전8년간, 제로대학의 교사와 학생은 시종 인민들과 운명을 같이 했다. 이렇게 힘든 상황하에서도 계속 견지하며 수업을 중단하지 않았다.


1945년 8월, 일본이 투항하고, 제로대학의 교사와 학생은 차례로 학교로 되돌아온다. 수리를 거쳐, 학교는 그해 10월 1일 정식으로 제남에서 복교한다. 1947년 상반학기에 재학생은 442명이다. 그중 문학원이 105명, 이학원이 123명, 의학원이 203명, 의료검사기술전문과 111명, 교직원 70명이다. 1948년 제남해방전날, 일부 교수와 학생의 조종하에, 제로대학의 일부 인원과 물자는 남으로 이전된다. 의학원은 복주(福州)로 간다. 제남해방후 1951년 제로대학은 인민정부에서 접수한다. 1952년 9월, 전국대학조정으로 제로대학은 해체된다. 신학원과 국학연구소는 폐지되고, 문리학원의 소속학과는 청도산동대학(지금의 산동대학), 남경대학과 산동사범학원(지금의 산동사범대학)에 편입된다. 농업전과는 산동농학원(지금의 산동농업대학)에 편입된다. 의학원은 남겨서 산동의학원으로 명칭을 고친다. 학교캠퍼스는 산동의학원이 접수한다. 지금은 산동대학 서캠퍼스이다. 명성이 자자했던 제로대학은 겨우 48년간 존속하고는 목숨을 다한다. 학교의 교수와 학생들은 마치 흩어진 새들처럼 여기저기로 가버렸고, 남은 것은 전아, 고박, 대방하고, 이국적인 풍취가 충만한 교사건축물들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