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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진)

거록지전(巨鹿之戰)의 수수께끼

by 중은우시 2018. 2. 16.

글: 독력견문(讀歷見聞)


거록지전은 전략적인 결전이었다. 진군(秦軍)과 반진군(反秦軍)의 어느 한측이 승리를 거두면 다른 측은 불가피하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것이다. 이 전쟁사상 보기 드문 이소승다(以少勝多)의 저명한 전투는 전체 과정을 보면 통상적인 이치에 맞지 않는 괴이한 점이 많다. 그중 가장 괴이한 일은 바로 장한(章邯)이 왜 왕리(王離)와 연합하여 항우(項羽)를 치지 않고, 20만 중명을 손에 쥐고도 왕리가 항우에게 무너지는 것을 좌시했을까라는 점이다.


거록지전이 일어나기 전에 전후로 복국한 동방육국중에서 초(楚), 제(齊)와 위(魏)는 장한에게 크게 타격을 입는다. 그리하여 진승(陳勝), 항량(項梁), 전담(田儋), 주불(周巿), 위구(魏咎)등이 모두 죽임을 당한다. 황하이남의 반진세력은 크게 약화된다. 장한 등 진나라군대는 그리하여 황하를 넘어 북상한다. 군사행동의 중점을 연(燕), 조(趙)등지의 반진무장세력을 진압하는 쪽으로 돌린다.


바로 이 때, 하북의 조나라에서 내분이 일어난다. 대장 이량(李良)이 국왕 무신(武臣)을 죽인다. 조나라의 대신 장이(張耳)는 신도(信都)로 도망쳐와서 조헐(趙歇)을 조왕에 옹립하고 다시 조나라를 건립한다. 신도와 거록은 오늘날 하북성 형대시에 속한다. 두 곳은 거리가 아주 가깝다. 장이는 배경이 있는 인물이다. 그는 원래 신릉군(信陵君)의 문객(門客)이고, 그의 반진진영에서의 명성은 심지어 명장 항량보다도 높았다.


조나라의 반장(叛將) 이량은 장이에게 패배한 후 장한에게 투항한다. 장한은 조나라의 상세한 정보를 들은 후, 민중들의 진나라에 대한 적의가 강렬한 초나라땅을 떠나, 중점을 조나라땅의 장이를 공격하는 것을 전략을 바꾼다. 이 전략계획에서, 장이를 포위공격하는 것이 관건적인 부분이다. 장이를 미끼로 삼아서 '지원군을 포위공격'하는 식의 전략을 세운다. 즉, 목표는 황하양안의 반진무장세력들을 조나라땅으로 끌어들여서 일거에 섬멸하겠다는 것이다.


진군의 이런 전략목표를 보면, 나중에 장한이 왜 병력을 과감하게 보내어 거록에서 항우와 격전을 벌이는 왕리를 지원하지 않았는지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 전략의 시행단계에서, 진나라조정은 장한군을 우두머리로 하여, 움직일 수 있는 모든 병력을 하북으로 움직인다. 장한군은 먼저 한단을 포위공격한다. 그리고 1개월후에 함락시킨다. 장이, 조헐은 거록으로 도망친다. 북에서 내려온 왕리군은 기세를 틈타 거록을 포위한다. 이 전투의 '거점포위'는 이미 완성되었다.





"장한은 병력을 이끌고 한단으로 간다. 그리고 백성들을 하내로 이주시키고, 성곽을 부숴버린다." 그리고 장한은 백성이주, 성벽철거의 두 가지 일을 완성한 후 군대를 몰고 거록의 남쪽 극원(棘原)으로 간다. 그리고, 용도(甬道)를 쌓고, 왕리에게 물자를 보내준다. 이를 보면 거록을 포위한 왕리는 장한의 강략한 물자조달을 보장받았다.


장한이 거록을 같이 공격하지 않은 것이 재미있다. 이는 진나라군대에서는 각로의 반진무장세력이 거록으로 올 것을 예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장한이 극원에 주둔한 것은 두 가지 사명을 띄고 있다. 하나는 왕리에게 군수물자조달을 해줌으로써, 거록을 포위공격하는 왕리군에 군수지원을 해주는 것이고, 둘은 지원군을 막을 준비를 하는 것이다. 심지어 더욱 계획적인 군사행동이 있었다. 타원(打援). 원군을 공격하는 것이다.


거록성에서 식량은 떨어지고 병력을 적은 상황에 처한 장이는 과연 그의 명성과 인맥으로, 각로의 반진무장세력의 지원을 끌어낸다. "당시 연, 제, 초에서는 조가 위급하다는 말을 듣고 모두 지원하러 달려왔다. 장오(張敖)도 북방에서 대(代)의 병사를 거두어 만여명을 이끌고 왔다." 다만 장한의 군대는 주장(周章)을 격패시킨 후, 이미 형도(刑徒)와 노예(奴隸)로 구성된 군대에서 진나라도성 함양 및 부근 현군의 백성과 진나라북방군단으로 구성된 정예군대로 변신했다.


그러나 거록성의 포위공격을 책임지고 있넌 왕리의 군대는 진나라북방군단의 일부로 구성되어 있어 강력한 군대에 속했다. 장이의 친구인 진여(陳餘)는 진군의 위세에 겁을 먹고 겨우 장염(張黡). 진택(陳澤)에게 5000병마를 이끌고 시험적으로 공격하도록 명한다. 그런데 진군에 모조리 전멸당해버린다. 그리하여 각로의 반진원군은 "모조리 진여의 곁에서 벽을 만들고 있을 뿐 감히 진군을 공격하지 못했다"


이런 대치국면에서는 지휘계통이 통일된 진군이 훨씬 유리했다. 여러 무장조직으로 구성된 반진연합군에게는 아주 불리했다. 포위공격당하는 장이와 지원군의 우두머리인 진여는 원래 가까운 친구사이이다. 그들은 이때 이미 서로 불신하고 서로를 질책하는 단계가 되었다. 거록성의 바깥을 포위하고 있는 진군은 이미 반진연합군을 일거에 섬멸시킬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이 때, 항우가 이끄는 수만의 대군이 전투에 가담하며 맹렬하게 싸운다. 장한이 왕리에게 군수물자를 보급하기 위하여 만든 용도를 파괴하고, 장한이 용도에 설치한 9개의 영루(營壘)를 연이어 파괴한다. 왕리의 보급선에 문제가 생기자, 장한은 일부 병력을 보내어 보급선을 회복하려는 노력을 벌이나 성공하지 못한다.


장한이 전력으로 보급선을 회복하지 않은 것은 아마도 주로 두 가지 고려때문일 것이다.


첫째, 항우는 4,5만명에 불과했고, 왕리의 병력은 20만가량이다. 통상적인 이치대로라면 왕리가 일부병력을 내어서 항우를 처리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고 보았다. 보급선은 그 후에 다시 회복시키면 되는 것이다.


둘째, 장한 군대의 주력의 전략적 임무는 '타원'이다. 반진연합군의 대부분이 외곽에 주둔하며 움직이지 않고 있는 상황하에서, 장한의 군대 주력이 먼저 움직일 수는 없었다.


사실상, 거록지전때 항우의 군사경력은 평범한 수준이었고, 그는 그저 빈진무장세력내에서 "장군2대"에 불과했다. 그는 항량이 보유했던 병력을 물려받았는데 겨우 4,5만명이었다. 장한, 왕리의 수십만 정예군대와는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이와 반대로 장한, 왕리는 세상이 공인하는 명장이다. 그들은 진제국의 마지막 무력이 대들보들이다. 거록에서 반진무장세력을 일거에 섬멸해야하는 중대한 사명을 띄고 있었다. 전투진행과정에서 그들의 전략적인 업무분담과 상호보완을 고려할 때, 기껏 항우 한 명때문에 병력을 합치는 것은 불가능했다.


바로 이때 항우라는 '장군2대'가 이끄는 불과 수만에 이르는 군대가 진군의 가장 약한 보급선부터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2개월동안 우세한 병력을 지닌 왕리에게 소멸당하지 않았을 뿐아니라, 오히려 장한군이 지원군을 공격하려 하지, 왕리의 군대와 합치지 않으려는 심리를 이용하여 왕리의 거록을 포위하고 있던 굶주린 병사들을 격패하고 거록지전의 승리를 얻어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