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왕우우(王又又)
논쟁이 많은 역사인물인 원세개는 가장 유명한 하남인중 한 명이다. 그의 인생은 시작점과 종착점은 모두 하남(河南)이다. 1859년 하남 항성(項城)에서 태어났고, 1916년 안양(安陽)의 원하(洹河) 북안(北岸)에 묻힌다. 사학계와 일반인들은 비록 그의 57년 일생에 대하여 포폄이 다르지만, 그의 가정생활에 대하여는 흥취를 강하게 지니고 있다.
원세개가 살아있을 때, 원씨집안은 이미 방대한 가족이 되어 있었다.
원세개는 모두 10명의 부인이 있다. 일처구첩(一妻九妾). 그의 이들 부인중에는 조선의 귀족도 있고, 상인의 딸도 있으며, 풍진(風塵)출신의 홍안지기도 있고, 가문이 좋은 정실의 처도 있었다. 이들 부인들과의 사이에 원세개는 17명의 아들과 15명의 딸을 낳았으니, 가문이 흥성했다고 말할 수 있다.
원세개가 죽은 후, 그의 자손후대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장남 원극정(袁克定)의 주재하에 원세개의 아들들은 각각 120,000은원(銀元)을 나눠받았고, 딸은 8,000은원과 일부 원세개가 생전에 사용하던 의물기명(衣物器皿)을 나눠받았다. 부인들은 천진의 작은 양옥집을 나눠받았다. 이때부터 이들은 전반생과 전혀 다른 생활을 하게 되었다.
역사의 흐름속에서 그의 후손들은 사방으로 흩어진다. 어떤 사람은 천진에서 죽을 때까지 살았고, 어떤 사람은 대만으로 가고...지금은 미국, 카나다에도 원세개후손의 족적이 있다. 비록 그들은 현재 대부분 하남에 살고 있지 않고, 심지어 중국에 살고 있지도 않지만, 그들이 뿌리가 되는 고향을 잊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1986년 9월, 저명한 물리학자 원가류(袁家騮)가 항성으로 돌아와 친척들을 만난다; 2011년 6월, 원씨가족연의회는 처음으로 원세개의 안장지인 하남 안양의 원공릉에서 집단제사를 거행한다.
2011년의 그 집단제사에 출석한 원씨후손중에는 2002년 천진모병원 방사선과주임의 자리에서 은퇴한 원세개의 손자 원가성(袁家誠)도 있었고, 현재 카나다에 거주하는 원세개의 증손인 화가 원집연(袁緝燕)도 있다. 그리고 그들은 원세계후손의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세계적인 저명한 물리학자, 에미상수상자, 교편을 잡은 선생....원세개의 자손후대는 각양각색의 신분과 자태로 세계의 각지에서 활약하고 있다. 이들의 성장과 경력은 세상사람들의 경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원세개의 17명의 아들들 중에서 사람들이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원극정, 원극문(袁克文)일 것이다.
원극정은 부친을 망치게 한 것으로 유명하다. 원세개가 황제를 칭하게 된 것은 이 황태자가 되고 싶어하던 아들이 종용한 것이다. 그래서 원세개가 죽은 후, 원극정은 원씨집안 사람들과 만나지 않았다. 비록 부친은 그에게 많은 유산을 남겨주었지만, 다 써버리고 말년의 생활은 아주 곤란했다. 다행히 사촌동생 장백구(張伯駒)가 그를 거두어주었다. 그리고 1955년 장백구의 집에서 사망한다.
원극정의 명성은 아주 나빴지만, 장백구의 말에 따르면, 기실 원극정은 아주 기개가 있는 인물이다. 화북이 일본에 점령당한 후, 일본정보조직의 두목인 도이하라 겐지(土肥原賢二)가 원극정을 회유해서 화북친일정권에 참여하게 하려 했지만, 원극정은 매국노가 되기를 거절하고 신문에 성명을 발표한다. 그리하여 원극정이 잘못을 저지르기는 했지만, 대국을 처리하는데서는 흐리멍텅하지 않았다.
원극문은 원세개의 둘째아들이다. 곤곡(昆曲) 명가이고, 민국사공자(民國四公子)에 들어간다. <패왕별희>의 원오야(袁五爺)의 원형이 바로 원극문이라고 한다. 당연히, 현실에서의 원극문은 영화의 원오야보다 훨씬 잘생겼다.
원새개는 생전에 원극문을 가장 좋아했고, 심지어 한 때는 그에게 자신의 자리를 물려주려고까지 했었다. 그러나 원극문은 정치에 관심이 없었고, 하루종일 희곡, 시사, 한묵에 빠져 살았다. 경성의 여려 명사들과 어울려서 놀았다. 원세개가 죽은 후, 원극문은 일을 하지 않고 그저 서화를 팔면서 살았다.
그가 죽은 후, <북양화보>에서 그를 위하여 부고를 내주었을 뿐아니라, 그의 스승인 방지산(方地山)은 그에게 만련(挽聯)을 보내고, 장례도 모두 청방(靑幇)에서 도맡아 처리한다. 조문하러 온 제자 손제자가 4천명이 넘었다.
북경 광제사의 스님, 옹화궁의 라마도 그의 집에서 장지까지의 연도에 제붕(祭棚)을 만들었다. 그러나 가장 놀라운 일은, 장례식 당일에 머리에 흰끈을 매고, 얼굴이 예쁜 낯선 여자들이 많이 참석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원극문은 "깊이 알면 알수록, 더욱 좋아하게 되는" 그런 사람이다. 그 말을 나는 믿는다.
어떤 사람은 일찌기 원세개의 아들을 이렇게 평가한 바 있다: "장남 원극정은 가장 권력이 있고, 차남 원극문은 가장 재주가 있으며, 육남 원극환(袁克桓)은 가장 돈이 많다." 맞다. 원극환은 원극정, 원극문과 이름을 나란히 할만한 자격이 있다.
원극환은 원세개의 여섯째 아들이다. 남개대학, 천진신학서원을 졸업했다. 1913년 영국유학을 떠났는데, 중도에 그만두고 돌아와서 사업을 한다. 계신양회공사의 총경리를 맡았고, 나중에 강남시멘트공장, 화신남신계시멘트공장, 북경유리시멘트공장을 창업한다. 그리고 상해, 당산, 하남위창에 면사공장도 창업한다. 그는 중국의 저명한 근대사업가이다.
일찌기 그는 천진시 부시장의 자리를 제안받았는데, 거절했다고 한다.
기실 이 세 명의 아들을 제외하고도, 원세개의 다섯째 아들 원극권(袁克權)도 저평가된 인물이다. 전해지는 바로는 원세개는 원극권을 원극정, 원극문과 함께 후계자 후보에 올려놓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 원극권도 원극문과 마찬가지로 정치에 흥미가 없었다. 다만 원극문과 다른 점이라면, 그는 원극문처럼 풍류를 즐기지 않았고, 일생동안 글을 벗하며 청고(淸孤)하게 살았다는 것이다.
원세개가 죽은 후, 원극권은 천진에 '은거'한다. 그는 일찌기 엄수(嚴修), 방지산, 장백구, 손한애(孫寒涯)등 명사들과 시와 술을 즐겼고, 많은 시편을 남긴다. 민국후기에는 기본적으로 집밖으로 나가질 않았고, 낮과 밤이 뒤바뀐 생활을 한다. 낮에는 잠을 자고, 밤에는 일어나 시를 썼다. 비록 세상에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원씨 여러 형제들 중에서 명방이 아주 높았다.
원세개의 어떤 아들은 글재주가 뛰어나고, 어떤 아들은 괴재(怪才)였다. 예를 들어, 원세개의 열두째 아들 원극도(袁克度)가 그러하다.
민국시기, 원극도는 천진조계에서 아주 유명한 인물이었다. 원극도능 외국이름이 있었는데, "Tom Yuan"이다. 외국의 부인과 여자들의 마음 속에 톰 위안은 거의 신적인 존재였다. 풍류적이고 멋질 뿐아니라, 미국방언까지도 유려하게 말했다. 더더구나 무슨 향수이든지 그는 한번 맡기만 하면 바로 만들어냈다.
1976년 당산대지진후 원극도는 사망한다. 남겨진 첩은 아이스케키를 팔아서 생활했다. 이런 생활이 비참해 보이지만, 원세개의 아들 가운데 원극도보다 더욱 비참하게 살아간 사람도 있다. 원세개의 넷째아들 원극단(袁克端) 열세째아들 원극상(袁克相), 열넷째아들 원극첩(袁克捷), 그리고 막내아들 원극유(袁克有)는 임종할 때쯤 병마에 시달리거나 생활이 궁박했다. 최후가 아주 처량했다.
원세개의 아들들은 결말이 좋은 경우도 있고 나쁜 경우도 있다. 딸들도 예외는 아니다. 원세개는 15명의 딸을 두었는데, 넷째딸, 여덟째딸, 열다섯째딸은 요절했다.
큰딸은 양강총독 장인준(張人駿)의 다섯째다들 장윤량(張允亮)에게 시집가서, 장애령(張愛玲)의 당수(堂嫂)가 된다; 둘째 딸 원중정(袁仲禎)은 청나라말기의 대신 설복성(薛福成)의 손자 설관란(薛觀瀾)에게 시집간다; 셋째 딸 원숙정(袁叔禎)은 원정설(袁靜雪)로 개명하고 1960년대에 5만자가량의 회고록 <나의 부친 원세개>를 써서, 전국정협이 주편한 <문사자료선집>에 발표하여 작가가 된다.
지금 소주박물관에는 13건의 국가1급문화재가 있는데, 원경정(袁經禎)이 기부한 것이다. 원세개가 사망한 후, 딸들은 8,000은원 외에 원세개가 생전에 입었던 의복과 생전에 썼던 물품 1상자를 나눠받았다. 원경정이 소주박물관에 기증한 "거인당분채매작문완(居仁堂粉彩梅鵲紋碗)은 기실 원경정의 혼수품이다.
원세개의 1처9첩은 아마도 모두 최고의 미인들이었을 것이다. 자연스럽게 그 유전인자가 작용했을 것이다. 원세개의 일곱째 딸인 원복정(袁復禎)_은 아주 예쁘게 생겼고, 영화를 찍은 적도 있다.
당연히 원세개의 아들, 딸을 제외하고 원세개의 손자, 증손자도 얘기해야할 것이다.
국제적으로 저명한 물리학자인 원가류는 원세개의 차남 원극문의 아들이다. 1936년 원가류는 미국 캘리포니아공과대학으로 가서 공부를 하고 1940년에 박사학위를 받는다. 그리고 미국에서 '동방의 퀴리부인"이라고 불리던 처 오건웅(吳健雄)과 결혼한다. 원가류 부부는 귀국하여 친척들ㅇ르 만났고, 주은래등 국가지도자를 만나기도 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원세개는0 원가류같은 손자가 있으므로 구천에서도 웃을 수 있겠다고. 그러나 기실, 원세개의 다른 자손들도 원가류만큼 유명하지는 않지만 비범하다.
원극정의 아들 원가융(袁家融)은 일찌기 컬럼비아대학에서 지질학 박사학위를 받는다. 귀국후, 개란(開灤)석탄광산의 엔지니어가 되고 수원(綏遠)으로 가서 지질탐사를 주재한다. 신중국성립후에는 중국의 철강사업에 공헌을 한다. 노년에는 북경대학, 북경사범대학에서 교수로 있었고, 마지막에는 귀양공학원의 교수를 지낸다. 1996년 92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원극정의 손자 원집연은 1989년 미국으로 가서 미술을 하고 현재는 카나다에 거주하는 유명화가이다.
어려서 성분문제로 대학에 가지는 못했지만, 문학재능이 좋아서, "천진중심부인과병원'에서 행정업무를 맡는다. 문혁기간동안, 원가성은 처와 함께 내몽고의 한 병원약방으로 보내진다. 거기에서 병원이 그를 파견하여 X선기술을 배우게 한다. 2년간의 연구끝에 원가성은 X선기술을 익혔고, 여러 병원에서 필요로 하는 인물이 된다.
1978년, 10년동란이 끝나고, 원가성은 청화대학 의학과에 들어간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천진중심산부인과병원으로 간다. 원가성은 기술이 뛰어나서, 얼마후에 그 병원 방사선과 주임이 된다. 그리고 2002년에 은퇴한다.
원가성에게는 1남1녀가 있다. 아들 원계방(袁啓方)은 미국모회사에서 부사장으로 있고, 딸 원계비(袁啓菲)는 CCTV 채널9 대외방송부에서 영문통역으로 일하고 있다.
원세개의 손녀 원가척(袁家倜)도 전설적인 여자이다. 아편중독인 부모와 가정환경의 급격한 낙차에도 전혀 굴하지 않았다. 수십년간 생활하던 양옥집에서 나와서, 대대에 들어가 농사를 지으러 간다. 8년간 농사를 짓다가 63세에 심천으로 가서 창업을 한다. 그리고 천진에서는 양식당을 연다. 나이도 그녀의 분투를 막지 못했다. 그녀는 또한 이십여명의 아이들에게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했다.
그녀는 8년간의 대대생활이 끝난 후 이렇게 말했다: "8년의 개조로 내가 무엇을 깨달았는가? 돈이 중요한게 아니라, 생존의 능력이 중요한 것이다. 네가 어떤 상태하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능력이다."
2009년, 에미상 시상식에서 원세개의 한 후손이 세상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원문중(袁文重). 원세개의 현손(玄孫)이다. 미국의 TV에미 최우수평면설계및예술지도상팀원중에서 나이가 가장 어린 사람이다. 그의 증조부는 원세개의 여섯째아들 원극환이다.
원극환에게는 2남5녀가 있었다. 장남 원가신(袁家宸)은 일명 원복(袁復)이라고 한다. 그는 연경대학 화학과에서 공부하고 1944년에는 천진공상학원을 졸업한다. 1947년 미국유학을 떠나 뉴욕대학 경제학과에서 경영학을 배운다. 신중국건국후에는 미국에서도 취업기회가 많았고, 그의 모친과 여동생도 미국에 있었지만, 그는 귀국하여 교육사업에 종사한다.
귀국후에도 그는 천진 남개대학 경제학과 ,외국어학과 ,천진재경대학, 천진과기대학등에서 교수로 불렀지만 모두 거절하고, 천진시실험중학에서 영어를 가르친다. 원복은 중고등학교 교육은 기초중의 기초이고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이렇게 중학의 강단에서 일생을 보낸다. 당시 그가 일하던 학교에서 교사(校舍)를 확충하려고 하자, 원가신은 적극적으로 부친이 물려준 9무(畝)의 토지를 무상으로 기증한다. 1958년, 북경 천안문광장의 건설에 풍경수(風景樹)가 필요하다는 말을 듣자, 그는 다시 북경 향산 사왕부(四王府) 조상묘에 있던 200그루의 소나무를 국가에 바친다. 북경시인민정부는 50위안으로 계산해서 주려고 했지만 그는 한푼도 받지 않았다. 차남 원가위(袁家衛)는 상해에 살았다. 원가위에 대하여 원가신은 이렇게 적었다: "부친(원극환)이 사망한 후, 가위는 처인 주장수의 꼬임으로 부친의 계신,강남등 회사주식을 모조리 자신의 것으로 한다. 그리하여 모친과 소송까지 벌인다. 그리고 모자관계를 끊겠다고 선언한다"
다섯명의 딸 중에서 원가영, 원가선, 원가거, 원가숙은 모두 미국으로 옮겨가서 살고, 막내딸 원가심은 천진시에서 교육사업에 종사했다.
손자뻘의 원홍철은 현재 천진시정부 주뉴욕대표처의 주임이다. 그는 선박운송회사를 창업한 바 있다.
'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 > 역사인물 (원세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원세개의 공일증(恐日症) (0) | 2018.10.11 |
---|---|
원세개 모친장례문제: 형제간에 원수가 되다. (0) | 2018.02.26 |
원세개 신변의 구재인(九才人) (0) | 2015.01.14 |
원세개 대총통 즉위식의 3가지 불상사 (0) | 2014.08.26 |
북양총리 조병균(趙秉鈞)은 왜 원세개에게 암해(暗害)를 당했는가? (0) | 2014.01.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