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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선진)

맹영(孟嬴): 일종의 각성

by 중은우시 2015. 2. 19.

글: 조염(趙炎)

 

경극(京劇)가운데 <초궁한(楚宮恨)>이라는 극이 있다. 거기에 나오면 몇 가지 대사는 음미할 만하다. 맹영은 이렇게 노래한다.

 

초국군신진소유(楚國君臣眞少有), 초나라의 임금과 신하중에는 제대로 된 사람이 정말 적구나

예의강상일단휴(禮儀綱常一旦休), 예의강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사비서이양류(我似飛絮離楊柳), 나는 버들솜이 버드나무에서 떨어져 날리는 것처럼

냉우처풍입어루(冷雨凄風入御樓), 차가운 비와 싸늘한 바람이 누대로 들이치네

묵축창천파국우(默祝蒼天把國佑), 묵묵히 하늘이 나라를 도와주고,

궁내예사막전류(宮內穢史莫傳流), 궁안의 지저분한 이여기는 전해지지 않기를  빈다.

대도초왕천추백년후(待到楚王千秋百年後), 초왕이 돌아가신 후

도만은하세차수(倒挽銀河洗此羞), 은하수를 거꾸로 걸어서 이 수치를 씻기를.

 

최근 뉴스를 보니, TV드라마 <미월전(芈月傳)>을 찍기 시작했다고 한다. 맹영을 연기하는 마오쥔제(毛俊傑)는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맹영이 집안과 국가와 천하를 위하여 스스로를 희생한 감정을 연기해 내겠다"고.

 

흠. 극작가도 좋고, 예술가도 좋고, 재능이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공부는 어떡할 것인가?

 

맹영의 원래 이야기는 이렇다. 춘추시대말기,초나라의 태자건(太子建)에게는 두 명의 스승이 있었다. 한 명은 오거(伍擧)이고, 다른 한 명은 비무극(費无極)이었다. 비무극이라는 사람은 학문이 있었지만, 품행은 엉망이었다. 그래서 태자건은 그를 별로 대우해주지 않았다. 자신의 직접 상사가 이런 태도이니, 비무극으로서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네가 지금은 태자인데 ,나를 이렇게 대하는데, 나중에 왕이 되면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그래서 그는 태자건을 위한 함정을 준비한다.

 

성어중에 진진지호(秦晋之好)라는 말이 있다. 이는 혼인을 가리킨다. 지금 일부 글자랑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시도 때도없이 이 말을 쓰곤 한다. 그러나 이후에는 이 말을 쓰는데 신중하는게 좋겠다. 진진(秦晋)간의 밀월기는 그다지 길지 못했다. 진목공(秦穆公)이후에는 진초(秦楚)간에 더욱 사이가 가까워진다. 다른 이유때문이 아니라, 지연정치때문이었다. 이 태자건도 어려서부터 이미 정혼자가 있었는데, 여자측은 바로 진애공(秦哀公)의 여동생인 맹영이다.

 

비무극은 초평왕(楚平王)에게 보고한다. "태자가 이미 성년이 되었으니, 며느리를 맞이하여야 할 때입니다." 초평왕은 그 말을 듣고는 기뻐한다: "나도 일찌감치 손자를 안고 싶엇다. 무극 네가 고생을 해주어야 겠다. 태자비를 모셔 오너라." 선진(先秦, 진나라통일이전)시기의 혼인은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했다. 여기서 하나하나 언급하지는 않겠다. 영친사 비무극 대인은 맹영의 미모가 절륜한 것을 보고 마음 속으로 기뻐한다. 영도(郢都)로 돌아와서, 바로 초평왕에게 사악한 아이디어를 내놓는다. "대왕, 진나라공주가 너무 예쁩니다. 당신이 그냥 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 말은 예의범절에 전혀 들어맞지 않는다. 난륜을 저지르라는 말이다. 정인군자라면 멸시할 말이다. 그러나 초평왕은 정인군자가 아니었고, 품성도 형편없었다. <신어.무위편>에는 그에 대하여 "사치무자(奢侈無姿)"하다고 적었다. 비무극을 멸시하지 않았을 뿐아니라, 그를 칭찬해준다. 그리고 그는 원래 며느리가 되었어야할 맹영을 스스로 취한다. 이대도강(李代桃僵)으로 태자건에게는 다른 여자를 하나 내리는데 바로 희극에서 언급하는 그 "마소의(馬昭儀)"이다.

 

맹영에 있어서, "나는 버들솜이 버드나무에서 떨어져 날리는 것처럼" 이라는 표현이 딱 들어맞을 것이다. 그녀는 혼자서 고국을 떠났는데, 무슨 힘으로 사태의 변화를 좌우할 수 있단 말인가. 다만 '냉우처풍'의 지경에 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일 정말 수치심으로 한을 품었다면, 어찌 '묵축창천파국우'했을 것인가. 정서가 너무나 돌연하게 바귀었으므로 믿을만하지 못하다. '집안과 나라와 천하를 위하여 스스로를 희생했다'고 말하였는데, 당시에 어찌 이런 개념이나 각성이 있었을 것인가. 그저 웃기는 말이다. 그러나 20년후, 그녀의 행동은 마치 일종의 각성을 얻은 것같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비무극은 드디어 성공한다. 관직도 오르고 재물도 많이 가지게 되며, 초평왕의 심복이 된다. 그는 이어서 두번째 함정을 만든다. 태자를 쫓아내는 것이다. 그는 초평왕에게 이렇게 건의한다. "태자는 후계자이다. 마땅히 당신과 근심거리를 나누어야 한다. 그에게 북방의 문호인 성보(城父)로 보내어 북쪽으로 발전하게 하고, 대왕께서는 군대를 이끌고 남방을 평정하면 천하는 조만간 모두 초나라의 것이 될 것입니다." 초평왕은 원래 마음 속에 거리낌이 있었다. 태자를 볼 때마다 자신이 맹영을 차지한 일이 떠올랐다. 비무극의 건의는 그의 마음에 딱 들어맞는다. 그래서 기쁘게 그의 건의에 '동의'한다.

 

태자건이 영도를 떠날 때, 아마도 '풍소소혜(風蕭蕭兮)'를 느끼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오거의 아들 오사(伍奢)는 확실히 이번에 한번 떠나면 다시 돌아올 수 없다(일거혜불부반(一去兮不復返))할 것이라는 것을 예감했다. 그는 사적으로 태자건에게 말해준다: "태자는 총자(塚子)인데 어찌 경성을 떠날 수 있겠는가?"라고. 반년후 비무극의 함정은 마침내 완성된다. 태자와 오사가 결탁하여 모반을 꾀한다고 모함한 것이다. 성보는 교통이송나라 정나라와 같이 편리하고., 여기에 제(齊), 진(晋)등의 나라들도 태자건을 지지하니, 태자가 곧 초나라를 토벌할 것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초평왕은 처음에 믿지 않았다. 이유도 충분했다. "국가는 곧 태자의 것이 될텐데, 그가 왜 반란을 일으킨단 말인가?" 그러자 비무극이 말한다: "대왕은 맹영의 일을 잊으셨습니까. 태자는 계속 이 일로 원한을 품고 있었고, 지금 병권을 가졌는데, 폐하는 일찌감치 준비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억울한 사건은 이렇게 생긴다. 오사는 멸문의 화를 당하고, 태자건은 도망친다. 그리하여 나중에 오자서(伍子胥)가 복수하는 이야기가 펼쳐지게 되는 것이다. 경극의 대사에 나오는 것처럼 기원전516년,초평왕의 '천추백년'후 맹영의 아들 공자진(公子珍)이 즉위하니, 바로 초소왕(楚昭王)이다. 다시 10년이 흐른 후, 오나라군대는 오자서, 손무등의 지휘하에 초나라를 격파하고 영도를 점령한다. (전해지는 바로는 200년후 천하에 이름을 떨친 명장 백기(白起)가 바로 태자건의 후예라고 한다. 그도 일찌기 초나라의 영도를 함락시킨 바 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 억울한 사건의 후유증은 정말 신기할 정도이다.) 초소왕이 도망치고, 초평왕은 시신을 꺼내어 채찍질당한다. 왕태후인 맹영은 포로로 잡힌다. 그러나 그녀는 오왕 합려를 모시는 것을 거절하여, 곧 죽는다(아마도 자살일 가능성이 클 것이다) 그녀의 이러한 행동은 후인들에게 생각할만한 점을 남겼다.

 

진왕조가 통일한 후, 정확히 말해서, 최소한 한무제가 유가를 내세우기 전까지, 중국인들 특히 여인의 일상생활에서 '강상'(삼강오륜)같은 속박은 없었다; 소위 '충군애국(忠君愛國)'은 당연히 있었다. 다만 이는 분봉받은 어느 종족집단실체에 대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맹자는 '백성이 귀하고, 사직이 그 다음이며, 임금이 가장 가볍다'는 '임금이 백성을 초개로 보면, 백성은 임금을 원수로 본다'는 민본사상이 담긴 말을 한다. 이는 오자서에게는 적합한 말이지만, 맹영에게는 그렇지 않다.그녀의 각성은 많은 정도 인격존엄과 종족존업의 각성이다. 예를 들어, 항쟁을 통하여 여자는 전통적으로 '스스로 결정하지 못한다'는 전통에 항거한 것이다. 항쟁을 통하여, 자신이 소속된 종족집단이 불굴의 정신을 드러낸 것이다. 그녀의 짧은 일생은 비록 스캔들로 뒤덮혔지만, 한줄기 빛을 뿜어 냇다. 이 빛은 비록 가늘고 적었지만, 인성(人性)이 발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