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사소우(史小雨)
"특수부대"를 얘기하자면, 사람들의 잠재의식 속에는 왕왕 서방국가가 '발명창조'한 것이라는 생각이 있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중국에는 일찌기 2000년전에 '특수부대'가 있었다. 삼국시대, 위,촉,오는 모두 자신의 특수부대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조위의 특수부대가 가장 강했다. 이점은 사서 <삼국지>와 소설 <삼국연의>에 모두 나와 있다.
"형주를 정벌할 때, 유비를 장판까지 추격하고, 그의 두 딸, 물자를 획득하고, 흩어진 졸병들을 거두었으며, 강릉까지 함락시켰다." 이전에 <삼국연의>에서 본 조조의 "오천철기"는 유황숙(유비)를 추격하여 상갓집 개처럼 만들었다. <삼국지>와 <위서>를 뒤져보면 알 수 있아. 제갈량이 "강노지말(强弩之末)"이라고 불렀던 부대는 바로 조조의 최정예 "호표기"이다. 삼국시대 가장 강력한 특수부대이기도 하다.
<삼국연의>의 기본정신은 "유비를 칭송하고 조조를 폄하하는 것"이다. 자연히 조조의 사람들이 이름만 들어도 간담이 서늘해지는 '호표기'에 대하여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위서>와 <삼국지>는 모두 이 특수부대의 공격, 기습 및 전투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순이 지휘하는 호표기는 모두 천하의 정예이다." 철기 오천이 10줄로 늘어서면 날카로운 빛이 해처럼 빛나고, 적은 더욱 두려워했다." 이러한 묘사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바로 조순(曹純)이 지휘하는 호표기가 엄청나게 강했다는 것이다. <삼국연의>에서 제갈공명은 그들을 "강노지말"이라고 하는데, 정사에서는 바로 이 '강노지말'이 나관중 선생이 그렇게 숭배하는 유황숙을 거의 전멸시켜버릴 뻔했다. 관우가 적시에 도착하지 않았떠라면 아마도 역사는 다시 쓰여졌을 것이다.
먼저 정사에서 "호표기"의 전적을 얼마나 휘황하게 쓰고 있는지 살펴보자. 건안9년(204년) 남피전투에서 호표기는 원담을 참살한다; 건안12년, 조조가 북으로 오환을 정벌할 때, "조순의 부대는 선우의 수급을 베어 온다" 천리를 달려 기습하는 능력을 알아볼 수 있다; 건안13년, 장판파전투에서 유비를 격파한다; 건안16년, 조조가 마초를 정벌할 때 출전한 부대가 바로 호표기이다. "호표기가 협공하여 대파하고, 성의, 이감등을 참한다; 건안23년, 호표기는 하변에서 장비와 오란을 격파한다....조조는 거의 매번 주요전투나 가장 위험할 때 특수부대를 참전시키고, 전투국면을 뒤집어놓곤 했다.
<삼국연의>에서는 마초의 서량철기를 무찌른 것은 조조군이 '경장보병' 청주군의 완강한 전투력과 마초부대를 붙잡아 두었기 때문이라고 되어 있다. 이는 <삼국지>의 기록에 근거한 것이다. 청주군은 확실히 '호표기가 습격'하는데 시간을 벌어다 주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말하면 호표기의 뛰어난 전투력이 승패를 결정한 것이다. '대파'하였을 뿐아니라 장수 2명을 참살하기까지 한다. 역사기재에 다르면, 마초가 한 주의 힘으로 조조를 대항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서량철기'때문이다. 이를 보면 이 부대의 전투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다. '군내에는 코가 높고 눈이 깊은 자들이 많았다'라고 되어 있는데, 마초의 부대에는 서역에서 온 이민족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군대를 격파한 것은 조조의 전략전술과 관련이 있지만, 호표기의 강대한 돌파능력이 중요했다.
정사에서는 조조의 이 특수부대를 호기영(虎騎營)과 표기영(豹騎營)으로 나눈다. 두 영의 최고장관 및 대소 우두머리는 무예, 지모, 전략전술등 능력에 의해 결정되었다. 당연히 1인자는 모두 조조가 가장 신임하고 가장 충성스러운 조씨 장수들이 맡았다. 조진(曹眞), 조휴(曹休)에서 조순까지, 조조는 이 부대의 지휘권을 외족에게 맡기지 않았다. <위서>에는 이렇게 쓴다. 호표기의 마지막 사령관 조순이 죽은 후, 조조는 회의를 열어 최고사령관인선을 논의한다. 사람들은 조조의 성격을 잘 알기 때문에 조씨성의 장수들 중에서 논의를 했다. 조조는 추천된 몇 몇을 바라보면서 눈썹을 찡그린다. 아무도 자신을 추천하지는 않는 것을 보고, 조조는 바로 자신의 뜻을 얘기한다. 조순의 재능을 누가 비견할 수 있겠는가? 설마 내가 이 부대의 사령관이 될 수 없단 말인가? 그리하여 조조는 문무백관들에 의하여 호표기 도통에 울라 죽을 때까지 그 자리에 있는다....
<삼국지>를 읽다보면 알 수 있다. 삼국시기 각 지역의 패주들은 모두 자신의 '특수부대'를 조직한다. 이 부대의 1인자의 자리를 겸직한 사람은 조조뿐이었다. 이 점을 보더라도, 조조는 전투에 능한 군사가일 뿐아니라, 의심이 많고 다른 사람을 안심하고 믿지 못하는 군주라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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