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하호연(夏浩然)
화신(1750-1799), 자는 치재(致齎), 뉴후루(鈕祜祿)씨로 만주 정홍기(正紅旗) 사람이다.사료에 따르면, "소빈무적(少貧無籍), 위문생원(爲文生員)"이라고 한다. 화신의 고조부인 니야하나(尼雅哈納)는 청나라초기의 개국공신이다. 그의 후손으로서, 화신도 자연히 황제를 곁에서 모실 수 있었다. 건륭34년, 화신은 곤경에서 벗어나기 시작한다. 처음에 난의위(鑾儀衛)가 되고, 다음에는 고조부 니야하나의 삼등경기도위(三等輕騎都尉)의 세직(世職)을 이어받는다. 이때부터 화신은 황제에 접근할 수 있는 지름길을 깔았다. 화신은 총명하고 능력있으며, 용모도 준수했다. 그리고 눈치가 빨랐고, 기회를 잘 잡아서 일처리를 했으며, 아부도 잘했다. 그래서 그의 관료로서의 생애는 평보청운(平步靑雲)이 된다. 관직이 재상에 이르고, 조정을 이십여년간 좌지우지한다. 화신이 재직하는 동안 권력을 휘두르고 뇌물을 받았으며, 부정부패를 저지르고 법을 농단했다. 자신에 반대하는 자들을 박해하고, 국가와 백성에 해를 끼친다. 이 모든 것은 건륭제시대에 발생한다. 확실히 건륭제가 혼용(昏庸)한 자가 아니고 정명하고 업적이 있는 황제이다. 다만 건륭은 '자신의 공을 칭찬하는 자를 좋아하고, 문치무세에 도취하였으며, 생활이 사치하고, 여색을 탐했다" 이런 치명적인 약점은 바로 '황제의 뜻을 잘 헤아리고 아부를 잘하는' 화신에게 이용당한다. 그리하여 화신은 그의 전설적인 일생을 살게 되는 것이다.
첫번째 비결: 진호용맥(診好龍脈), 연호내공(練好內功): 용맥을 잘 진단하고, 내공을 잘 익힌다.
화신은 어려서 모친을 잃고, 집안환경이 빈한했다. 곤궁하고 냉막한 생활은 화신의 어린시절에 깊은 상처와 그림자를 남긴다. 그때부터 화신은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서 두각을 나타내겠다고 뜻을 세우고,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모든 기회를 붙잡는다. 화신은 십여세때 함안궁관학(咸安宮官學)에 입학하여, 유학경전과 만주어, 한어, 몽골문자교육을 받는다. 그는 자질이 뛰어난데다, 열심히 노력하여, 성적이 출중했다. 그리하여 스승들로부터 총애를 받는다. 건륭34년, 20세의 화신은 조상의 삼등경기도위의 작위를 세습받는다. 다음 해, 화신은 과거향시에 참가하나, 합격하여 거인이 되지 못한다. 건륭37년 십일월, 23세의 화신은 건륭의 신변에서 일하는 삼등시위가 된다. 이는 그의 인생에서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화신은 황제를 옆에서 모시는 기회를 이용하여 건륭제에게 자신을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비황등달(飛黃騰達)을 꾀한다.
황제의 시위는 아주 많았다. 다만 왜 화신이 건륭의 인정을 받게 되었을까? 이는 주로 화신이 아부하는 기술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건륭은 박학다식했고, 화신은 적절할 때 적절한 말로 아부를 해서, 황제를 기쁘게 해주어서 황제의 인정을 받는다. 화신도 박학다식했고, 골동품감상에 능했으며, 글재주도 있었다. 이것이 바로 총애를 받은 주요원인이다. 화신의 또 다른 수완은 황제가 좋아하는 일을 한 것이다. 건륭은 일생동안 시를 쓰고, 서예를 하는 것을 즐겼다. 화신은 건륭에 영합하기 위하여 이 분야에 노력을 많이 들인다. 그리하여 비교적 높은 수준에 이른다. 건륭이 서예는 공력이 뛰어났고, 화신의 글씨는 건륭제와 아주 닮아 있었다. 아마도 그가 일부러 모방해서 그런 것일 것이다. 건륭후기의 어떤 시편(詩匾)은 아예 화신에게 대필하도록 시키기도 했다. 북경고궁 숭경전(崇敬殿)에 걸려 있는 어제시편(御製詩匾)은 고증에 따르면 화신이 대필한 것이라고 한다.
건륭40년, 어느날 건륭이 궁을 나선다. 가마에 타고서 보고를 듣는데, 죄수가 도망쳤다는 것이었다. 건륭은 약간 노하여, <논어(論語)>의 구절을 암송한다: "호시출어합(虎兕出於柙), 귀옥훼어독중(龜玉毁於櫝中), 시수지과여(是誰之過與)"(호랑이와 들소가 우리에서 뛰쳐나오며, 귀갑과 옥이 궤 속에서 망가졌다면, 이것이 누구의 잘못인가?), 이때 황제를 모시고 있던 장호위(掌護衛), 호위군(護衛軍)등은 모두 놀라서 서로 쳐다만 보며 어찌할 줄을 몰랐다. 계속 서로 황제의 말이 무슨 뜻인지 물을 뿐이었다. 화신은 이때 자신있게 대답한다: "전수자(典守者, 현위 즉 죄수를 붙잡고 지키는 책임이 있는 자)는 그 책임을 면할 수 없다" 건륭제는 그의 말을 듣고는 크게 놀라서, 그가 자신의 생각을 읽어냈다는 것을 알고 놀라서, 그에게 출신과 어디서 배웠는지를 물어본다. 화신은 물흐르듯이 답변하여 건륭제는 기분이 좋아진다.
<용암필기>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하루는 건륭이 외출을 하는데, 급한 나머지 의장용인 황개(黃蓋)를 찾을 수 없었다. 건륭이 책임을 추궁하려 말한다: "이게 누구의 잘못인가?" 여러 시위들이 놀라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할 때 화신이 대답한다: "이 일을 관장하는 사람은 그 책임을 면할 수 없습니다." 건륭은 화신이 침착함에 호감을 가진다. 또 한버은 건륭이 가마에서 <논어>를 외우다가 뒷구절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때 화신이 그 뒤를 이어 암송한다. 그래서 건륭제는 그를 더욱 좋아한다. 결국 젊은 화신은 영준하고 시원스러우며, 재주와 학문이 있었다. 아마도 어떤 우연한 기회에 건륭의 눈에 띄었을 것이다. 그때부터 운이 그의 편이었고, 비황등달하게 된다.
두번째 비결: 구동배이(求同排異), 정치연인(政治聯姻): 자신을 따르는 자를 찾고, 반대하는 자를 배척하며, 정략결혼을 하다.
건륭45년 정월, 31살된 화신은 중요한 임무를 부여받는다. 형부시랑 객녕아(喀寧阿)와 함께 멀리 운남으로 가서 대학사, 운귀총독 이시요(李侍堯)의 부정부패사건을 처리하는 것이다. 화신은 운남에 도착하자마자, 먼저 이시요의 관가(管家)를 구금하여, 증거를 얻는다. 그리하여 총명하고 노련한 이시요로 하여금 고개를 숙이고 죄를 인정하게 만든다. 화신이 이 임무를 부여받은 후, 건륭이 어지를 내려 이시요를 처벌할 때까지 전후로 단지 2개월이 걸렸을 뿐이다. 그후, 화신은 다시 황제에게 보고하여 이렇게 말한다. 운남의 행정관리는 혼란스러우며, 여러 주현이 모두 비어 있다. 그러므로 철저히 정리정돈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 이 보고서를 읽고 건륭제는 그를 칭찬한다.
그해 오월, 화신이 북경으로 돌아온 후, 다시 황상에 운남의 염무(鹽務), 전법(錢法)과 변방(邊方)사무를 정리정돈하는데 관한 구체적인 의견을 올려, 건륭제로부터 긍정적인 반응을 얻어낸다. 운남의 사건을 화신이 깔끔하게 처리함으로써, 북경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화신은 호부상서로 승진한다. 1달만에 건륭은 화신의 6살난 아들에게 풍신은덕(豊臣殷德)이라는 이름을 내리고, 자신이 가장 아끼는 어린 딸 화효공주(和孝公主)를 풍신은덕과 정혼시킨다. 이 혼사는 화신에게 경제적인 이익을 가져다 주었을 뿐아니라, 화신에게 정치적으로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이점을 가져다 주었다. 화신은 바람을 원하면 바람을, 비를 원하면 비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사료의 기재에 따르면, 화신은 삼등시위를 승계한 후 그가 죄를 받기까지 29년동안 중요한 관직에 봉해진 것만 47번에 이른다고 한다.
건륭41년, 27살의 화신은 군기대신이 된다. 나중에 영반군기대신 우민중(于敏中)이 사망하자, 영무전대학사 아계(阿桂)가 영반군기대신이 된다. 그때 군기처에 임직하고 있는 사람으로는 대학사 왕걸(王傑), 상서 동고(董誥)와 복장안(福長安)이 있었다. 아계, 왕걸, 동고는 모두 화신을 싫어했다. 그 결과 5명의 대신이 함께 정무를 보지 않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건륭은 아계와 화신이 불화하는 것을 알고 자주 아계로 하여금 바깥에서 병력을 지휘하거나 공사를 검열하거나, 사건을 처리하도록 맡겼다. 그러다보니 군기처의 실권은 자연스럽게 화신의 수중에 들어간다. 당시 많은 백성들은 화신을 이황제(二皇帝)라고 불렀다. 화신은 한편으로 건륭제에 의존하여 조정의 대권을 장악하고, 동시에 권모술수를 써서 방파를 모으고, 심복을 심으며, 계속 자신의 세력을 키워갔다. 화신은 군기대신 복장안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인다. 복장안은 건륭제의 효현황후의 친조카였다. 그의 부친인 부항(傅恒)과 형인 복강안(福康安)은 모두 군기대신등 고위직을 지냈다. 그외에 산동순무 이강아(伊江阿), 화신의 스승인 오성흠(吳省欽), 오성란(吳省蘭)등이 모두 화신의 심복이 된다. 그의 동생 화림(和琳)은 몇년내에 내각언관에서 사천총독으로 고속승진한다. 화신은 정직한 대신들에 대하여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배척하고 타격을 가했다. 대학사 송균(松筠)은 화신에 굴복하지 않아서, 결국 변방지역으로 쫓겨나고 만다. 영반군기대신 아계는 덕망이 높았다. 화신은 그를 무너뜨리려고 항상 생각하고 잇었다. 군기대신 왕걸, 동곡도 화신이 억누르려는 대상이었다.
화신은 동료를 대하는 수단이 아주 고명했다. 황상에게 아부하는 것은 더더욱 뛰어났다. 당시 조선의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중국에 온 조선사신이 이렇게 묘사한 것을 볼 수 있다: 화신은 비록 대학사, 군기대신이지만, 매번 황제가 가래를 뱉을 때면 그가 즉시 그릇을 받쳐들고 가래를 받아낸다. 이는 바로 화신이 관료로서 성공한 원인이다.
세번째 비결: 차호피작대기(撦虎皮作大旗): 호가호위하다.
건륭의 만년은 생활이 호화사치스려웠고, 대형공사를 만힝 벌였다. 그는 6번이나 남순을 하고, 연도에 30여개의 행궁을 만들었다; 원명원과 피서산장에 강남의 풍경을 모방하여 오락장소를 건조했다; 80세때 만수대전(생일축하연)을 거행했다; 이런 것들은 모두 큰 돈이 필요한 일이다. 당시 국고는 이미 바닥이 났는데 돈이 어디서 났을까? 이런 상황하에서 건륭은 화신이 돈을 긁어모아주는 것이 아주 필요했다. 왜냐하면 화신은 이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국고를 쓸 수 없는 상황하에서, 방법을 강구하여 건륭의 수요를 맞추어주어야 했다.
황제의 80세 생일때, 화신은 외성3품이상 고위관료들에게 모두 진헌(進獻)하라고 명한다. 경성의 각부장관들도 급여를 내놓았다. 회남 회북의 염상들도 은4백만냥을 출연한다. 화신은 의죄은(議罪銀)제도를 만들어, 잘못을 저지른관리라 하더라도 벌금을 내면 처벌을 면하게 해주었다. 적으면 수천냥 많으면 수만냥, 수십만냥이었다. 이런 의죄은은 바로 내무부로 보내어 황제의 개인금고로 들어갔다. 많은 총독,순무대신들은 이렇게 돈을 빼앗기게 된다. 화신은 각종 방법을 강구하여 돈을 긁어모았다. 원래 수입보다 지출이 많던 내무부는 몇년도 지나지 않아 흑자가 된다. 건륭은 마음대로 향락을 즐길 수 있게 되어 아주 기뻐한다. 화신에 더욱 의존하게 된 것이다.
화신은 숭문문세관에서 상인과 관리 및 선비들의 돈을 짜냈을 뿐아니라, 각종 방법을 통하여 대량의 은량과 보물을 모은다. 화신은 건륭제의 주머니를 가득 채워주는 동시에, 자신의 주머니에도 은자를 채워넣었다. 외성에서 황상에게 진공하는 예물은 모두 화신을 거쳐야 했고, 어떤 때는 한 두개만 황상에게 바치고, 나머지는 자신이 차지한다. 이들 보물은 여러 곳에 보관하게 되는데, 당시 화신의 주택에는 보석을 보관하는 특별히 만든 협장(夾墻, 벽과 벽사이가 비어있는 것)이 있었다.
이런 일은 모두 황상에게 충성한다는 기치를 내걸고 벌였다. 그러다보니 발견되기 어려웠다. 설사 발견되더라도, 아무도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 화신은 한가지 경험을 얻었다: 황제의 환심만 사면 나머지는 모두 처리하기 편하다. 설사 약간의 잘못을 저지르거나 자신이 돈을 중간에 조금 차지하더라도 황상은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
가경4년 정월 초삼일, 89세의 건륭이 수종정침(壽終正寢)한다. 화신의 뒤를 받쳐주는 사람이 없어진 것이다. 가경제는 즉위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화신을 삭탈관직하고 가산을 몰수한다. 소위 "화신이 쓰러지니, 가경이 부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화신의 가산은 백은8억냥이었다. 청나라왕조 10년의 재정수입합계에 상당했다. 이는 그에게 살신지화를 불러온 주요원인이다. 화신의 가산목록을 보도록 하자, 이 탐관은 도대체 얼마나 재물을 많이 긁어모았는지.
건물3000칸, 전답8000경(1경은 2만평), 은포42칸, 당포 75칸, 목재포, 약포, 주포, 양포, 여점, 고완점, 청자점, 회와점, 차구점, 교자점 합계 100여개, 차마운수와 토지매매를 겸영함; 적금6만냥, 길림인삼1200병, 소진주230천(串), 대금원보(1개 100냥짜리)100개, 소은원보56,600개, 은정900만개, 양전15800원, 제전150만문, 계원진주10천(串), 대홍보석10개, 대남보석40개, 은탁40탁, 3척이상산호수 11개, 의복 12300건, 호피 550장, 초피(貂皮) 850장, 조세피(粗細皮) 56000장, 동기 361만건, 자기 10만건, 도금팔보상 24개, 서양종 700개, 사계절의복 7천건, 모든 물품의 총합계는 10억냥백은이었다.
'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 > 역사인물 (화신)' 카테고리의 다른 글
건륭제의 총신(寵臣) 화신(和珅)이 꺼렸던 3명의 대신은...? (0) | 2020.07.04 |
---|---|
화신(和珅)과 구대미녀(九大美女) (0) | 2015.01.14 |
허션(和珅): 간신인가 충신인가? (0) | 2009.01.02 |
화신(和珅): 역사적 진실 (0) | 2008.10.16 |
화신(和珅, He Shen) : 청조 최대탐관의 몰수재산리스트 (0) | 2006.11.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