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조천(曹天)
주말의 이틀간 휴식을 이용하여 화신(和珅, He Shen)에 관한 책과 자료를 뒤적여 보았다. 느낀 점은 역사상 진실한 화신은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이미지처럼 아부를 즐기는 탐욕스러운 관리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비록, 가경황제가 건륭황제의 사후 화신의 가산을 몰수했고, 몰수한 재산금액이 놀랍게도 청나라조정의 15년간 재정수입의 합계금액에 상당할 정도로 많았기는 했지만, 이것은 단지 화신이 부자였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일 뿐이다.
화신은 건륭15년(1750년)에 태어난다. 원래 이름은 선보(善保)이고, 자는 치재(致齋)이며, 성은 뉴호록씨(鈕祜祿氏)였으며, 만주 정홍기 이갑라(二甲喇) 사람이다. 화신의 고조부인 니야하나(尼雅哈納)부터 부친 상보(常保)에 이르기까지 모두 대대로 관료집안이었다. 특히 부친은 2품관직인 부도통(副都統)이었다. 그러므로 화신은 가난한 집안출신이 아니다.
화신이 십여세이후, 황궁의 서화문안에 있는 함안궁관학에서 공부한다. 계모와의 관계가 좋지 않아서, 소년시기에 경제조건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다만, 그가 18세가 되어 당시 정이품인 내무부총관대신 영렴(英廉)의 손녀와 결혼한다. 그리고 20세에는 고조부인 니야하나의 삼등경기도위(三等輕騎都尉)의 직을 승계받는다. 그리하여 사정이 많이 호전되었다. 왜냐하면, 삼등경기도위의 1년 녹봉은 백은160냥에, 백미80석이다. 순무나 포정사의 녹봉보다도 약간 더 많았다. 화신이 이런 고정수입을 가지게 되자, 중등이상의 편안한 생활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TV 드라마 <<건륭왕조>>에서는 화신이 원래 아계(阿桂)의 군대내에서 일하면서 군보를 송달하는 기회에 건륭제와 만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잘못이다. 건륭37년, 화신이 22살때, 그는 정5품인 삼등시위에 올랐다. 곧이어 점간처(粘杆處)의 시위로 충당되었다. 점간처는 상우비용처(尙虞備用處)이다. 청나라제도에 따르면, 팔기 관리의 자제들 중에서 민첩한 자를 뽑아서 집사인으로 삼았고, 황제의 사냥이나 순행때 가마를 메고, 일산을 들고, 그물을 치는 등의 일을 했다. 점간처의 삼등시위는 자주 황제를 따라 다니기 때문에 황제에게 보고하고, 대답할 기회가 많았다. 이는 화신이 발탁되는데 아주 유리한 조건이었다.
결국 화신은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지위에 오르고, 권력이 조야를 뒤흔드는 인물로 성장한다.
화신이 맡았던 직무를 한번 살펴보는 것도 무방할 것이다. 무직(武職)에서는 상남기 만주도통, 정백기 만주도통, 상황기 만주도통, 보군통령을 지냈고; 문직(文職)으로는 내무부대신, 어전대신, 의정대신, 정백기 영시위내대신, 정황기 영시위내대신, 군기대신, 영반군기대신, 협판대학사, 문화전대학사, 호부상서, 이부상서, 이번원상서를 지냈으며; 학직(學職)으로는 전시독권관, 일강기기주관, 사고전서관 정총재, 석경관 정총재, 국사관 정총재, 한림원장원학사를 지냈고; 돈을 관리하는 직위로는 숭문문세무감독을 지냈다; 동시에 화신은 일부 궁중내직을 맡았는데, 예를 들면, 태의원, 어약방 사무도 맡았다; 그의 작위는 태자태보, 백작, 공작에 이른다.
화신이 맡았던 이런 직무를 보면, 건륭황제는 그에게 절대적인 신임을 가졌던 것을 알 수 있다. 건륭은 진시황이래로 재위기간이 가장 길었던 황제이다. 비록 TV드라마에서처럼 그렇게 영명하지는 않았고, 결점도 적지 않았지만, 절대로 혼군은 아니었다. 건륭의 경험과 예지로 만일 화신이 정말 대탐관이거나 대간신이었다면, 건륭이 절대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다. 반대로 건륭40년부터, 즉 화신이 막 25세가 되었을 때로부터, 건륭이 죽을 때까지 24년간 화신은 계속 승승장구했다. 관직이 높아졌을 뿐아니라, 많아졌다. 전체 청나라에서 비견할만한 인물이 없다. 26세에 군기대신이 되고, 30세에 호부상서가 되며, 36세에 대학사의 직을 수여받고, 문직무직을 합해서 수십개의 직위를 겸직해다. 신하로서는 최고봉에 올랐다고 할 수 있다. 화신이 만일 뛰어난 업무처리능력과 조직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황제의 총애만으로는 도저히 해낼 수 없었을 것이다. 두 가지 점을 보자: 하나는 화신이 26세때 호부시랑을 맡은 후부터 죽을 때까지 호부를 장악했다. 건륭이 엄청나게 돈을 써댔지만 돈은 모자라지 않고 나왔다. 이를 볼 때 화신의 재산관리능력은 일류라고 할 수 있다. 또 하나는 화신은 최후의 가경제로부터의 그 이십대 죄상외에 이십여년동안 전혀 탄핵받은 바가 없다는 것이다. 화신의 업무처리능력이 아주 뛰어나고 세심했다거나, 이십여년동안 아무도 감히 직언을 하지 못했다는 것인데, 중국이 아무리 암흑기라고 해도, 후자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화신은 건륭40년부터 가경4년까지 조정을 20여년간 좌지우지한다. 이 기간에 건륭황제의 윤허하에, 청나라전기의 모든 정치, 경제와 문화에서 시스템적인 개혁이 이루어진다. 아쉽게도 어떤 구체적인 조치는 현재 근거문건을 찾아볼 수가 없다. 원인은 화신이 감옥에 갇힌 후, 많은 원시자료들이 폐기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화신에 대한 연구를 더욱 곤란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화신이 개정한 법의 주요내용은 대체로 정치방면에서는 내각, 육부 및 군기처등 아문에 대한 개조였다. 일부 내용은 더욱 확대되었는데, 예를 들어 군기처장경은 구체적인 정원을 두지 않는 것이고, 모든 상소문은 2부로 만들어 정본을 황제에게 송부하는 외에 부본을 군기처로 보내게 하였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화신은 많은 것을 바꾸었는데, 군기처에 '밀기처(密記處)'를 두어, 범법을 저지른 총독 순무등 관리가 돈을 바치고 형벌을 면제받는 제도(罰議罪銀制)를 시행했다. 화신의 개혁을 통하여, 당시의 청왕조는 재정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그는 건륭제의 걱정을 덜어주었고, 국고를 충실히 했다. 청나라 건륭, 가경시대의 저명한 학자인 홍량은 화신이 당시 국가기관과 제도에 대하여 이룬 개혁을 높이 평가했다. 그리고 많은 개혁내용을 가경제도 그대로 실행했다.
그러므로, 만일 화신이 없었다면, 건륭성세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화신의 능력은 평범한 가경제와 대비가 된다. 아마도 바로 이런 이유로 화신은 살신지화를 입었는지도 모른다. 다만, 이렇게는 얘기할 수 있다. 우리는 현재 드라마에서 말하는 화신의 명예를 회복해주어야 한다. 어쨌든 역사는 계속되는 것이고, 우리는 후대에 진실한 역사를 남겨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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