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 건륭제때의 허션은 아주 유명한 인물이다. 지금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인물이 되었다. 이것은 그가 중국역사상 가장 유명한 탐관(貪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역사상의 탐관이 바로 간신(奸臣)이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허션을 간신의 무리에 분류하고 있다. 사실, 허션의 일생을 살펴보면, 그는 간신이 아니라, 오히려 충신이다. 그는 권력을 농단하고 뇌물을 받기를 즐기는 절반은 공적으로, 절반은 사적으로...아주 특이한 충신이었던 것이다.
첫째, 그의 출신과 재능, 그리고 그의 조정에 대한 공적으로 볼 때, 그는 당시 조정에서 아주 발군의 능신(能臣)중 하나이다.
<<청사고(淸史稿)>>의 기록을 보면, 허션은 몰락한 만주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부모를 일찌기 여의고 의지할 곳이 없어서, 모든 일을 자신이 알아서 처리해야 했다. 그런데, 우연한 상황하에서 건륭제의 인정을 받게 된다. 그의 관직은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과거출신의 관원은 아니었다. 그리하여 과거출신의 관료들은 자주 그를 멸시했다. 그리하여 그는 더더욱 자신의 부족한 점을 메꾸는데 애를 썼다. 예를 들어, 그는 다른 사람에게 모두 웃는 얼굴로 맞이하고, 미소를 지으며 봉사했다. 아래사람이건 윗사람이건 그는 전혀 폼을 잡지 않았고, 여기에다가 그는 이재(理財)의 고수였다. 그리하여 그는 중용되었다.
그가 다른 사람에게 욕을 먹는 부분은 그가 탐오(貪汚)했고, 권력을 농단했다는 점이다. 만일 허션에게 재주가 없었고, 그저 아부하는 능력만 있었다면 승승장구하여 건륭의 총애를 받았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 사실, 당시 허션만이 당시 건륭이 직면한 최대의 재무위기를 해결해줄 수 있었다.
당시 서방의 대영제국이 처음으로 사신을 보내어 대청황조와 접촉한다. 여기서 대사 매카트니는 궤배(跪拜)의 예를 거부하여 풍파가 있다. 결과적으로 허션이 나서서 적절히 처리하여, 대청황조의 존엄을 유지하면서, 동서간의 직접적 충돌을 피할 수 있게 한다.
비록, "허션이 쓰러지자, 가경이 배부르게 먹었다"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가경제때의 재무상황은 여전히 부족했다. 허션만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영국의 중국통인 매카트니는 대영제국에 이렇게 말했다: "허션은 중국에서 당시에 가장 현대적인 비지니스의식을 지닌 대신이다." 바로 중국고전문학의 명저 <<홍루몽>>이 유행하게 된 것도 허션과 관련이 있다. 당시 그는 이 책을 아주 좋아하여, 건륭에게 추천한다. 그리고 이를 인쇄하여 발행한다. 동시에 그는 사람을 찾아서 <<홍루몽>>에서 시의적절하지 않은 문자는 삭제하게 한다. 그리고 사람을 청해서 후40회의 <<홍루몽>>을 계속 쓰게 한다.
둘째, 건륭제가 그를 총애했고, 관심을 가졌다는 데서 그는 건륭제 신변의 가장 일잘하고 가장 인기있으며, 가장 운이 좋았던 보신(輔臣)이다.
허션의 자는 치재(致齋)이고, 청나라 만주 정홍기(正紅旗) 사람이다. 생원출신이며 세습직을 받았다. 건륭제때는 계속 구문제독(九門提督), 공부상서(工部尙書), 호부상서(戶部尙書), 어전대신(御前大臣), 군기대신(軍機大臣)을 지냈고, 나중에 관직이 문화전대학사(文華殿大學士)에 오르고, 일등공(一等公)에 봉해졌다.
그는 글재주도 있고, 용모도 영준했으며, 황제의 마음을 잘 읽었다. 그리하여 건륭이 그를 아주 총애하고 믿는다. 당시 건륭이 무언 가를 생각하면, 성지를 반포하기도 전에 허션은 이미 마음 속으로 열에 여덟 아홉은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갈수록 총애를 받는다. 나중에 건륭이 밤낮으로 그가 없이는 지낼 수 없게 되었다. 어떤 때에는 어서방(御書房)의 같은 침상에서 잠을 잤다.
건륭은 여행을 좋아했다. 하루는 허션과 강남의 풍경을 얘기했다. 건륭이 탄식했다: "짐은 한번 가보고 싶다. 그러나, 남북은 거리가 멀고 관민을 힘들게 하고, 너무나 많은 돈을 써야 해서,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 허션이 말했다: "성조황제(강희제)는 6번이나 남순을 하셨습니다. 이로써 볼 때 순행은 고금의 성대한 행사입니다. 예전의 성인이나 나중의 성인이나 도는 같습니다. 설마 현재 황상께서 순행을 해서는 안될 이유가 있습니까. 하물며, 국고가 충분하고, 세상은 부유하니, 약간의 비용을 쓴다고 해서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건륭은 평생 강희를 따라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리고 요순을 따라하는 것도 좋아했다. 허션은 용주(龍舟)를 만들었는데, 온갖 기교를 부려서 아주 화려하게 만들었다. 강희, 옹정이 아껴서 남긴 돈을 마음껏 썼다. 마치 물쓰듯 한 것이다. 그리고 허션은 그 가운데 수십만의 돈을 빼돌려ㅆ다. 건륭은 그가 일을 잘 처리한다고 칭찬하고, 그를 시랑으로 승진시켜주었다.
당시 어가(御駕)가 지나는 곳은 총독, 순무이하 모두가 나와서 무릎을 꿇고 맞이했다. 모든 것은 허션이 감시했다. 허션이 좋다고 하면 건륭제도 좋다고 말하고, 허션이 안좋다고 말하면 건륭도 안좋다고 말했다. 총독순무등의 고관들은 모두 허션에게 부탁을 했다. 그리하여 개인적으로 금은주보를 허션에서 수천수만을 보냈다. 몇년도 지나지 않아, 허션의 집안에는 저택이 무수히 늘고 집안재산이 천만에 달하고, 노비가 넘쳐났고, 미인이 집안에 가득찼다.
사방에서 진공한 보물을 건륭은 허션에게 스스로 고르도록 분부했다. 그리고 열에 서,넛은 그에게 상으로 내렸따. 사실 그 진공품들은 모두 허션의 손을 거친 것들이다. 그는 일찌감치 좋은 물건은 자기의 집안에 남겨두었다. 그리고 나머지를 건륭에게 바친 것이다. 하루는 황자 칠아거(七阿哥, 일곱째 황자)가 부주의하여, 궁중에 놓아둔 벽옥반(碧玉盤)을 깨트렸다. 그 옥반은 직경이 1척정도이고 색깔이 취록색이어서 건륭이 가장 아끼는 물건이었다. 칠아거는 놀라서 부서진 옥반을 잡고 그저 울기만 했다. 마침 허션이 걸어왔다. 칠아거는 허션만이 그를 도와줄 수 있다고 생각해서 황급히 허션에게 절을 했다. 허션은 처음에는 상관없는 일에 관여하지 않으려 했는데, 나중에 칠아거가 정말 다급해져서 그에게 10만냥의 은자를 주겠다고 하자, 허션은 응락한다. 그 다음 날, 허션은 자기 집에서 벽옥반을 하나 꺼내서, 몰래 장춘궁에 놓아둔다. 허션의 벽옥반은 건륭의 것보다도 배나 컸다. 원래 이 벽옥반도 진공받은 것인데, 허션이 큰 것은 자기 집에 남겨두고 썼던 것이다.
황친국척(皇親國戚, 황실의 친인척)이건, 공신문사(功臣文士)이건 아무도 허션만큼 총애를 받은 자가 없다. 건륭은 화효공주를 그의 아들 풍신은덕(豊紳殷德)에게 시집보냈다. 화효공주는 출가전에 건륭이 가장 아끼던 공주이다. 그녀는 어려서 남장을 하고, 자주 건륭을 따라 미행했다. 화효공주는 허션을 보고는 시아버지라고 불렀다. 허션도 그녀를 아주 잘 모셔서, 공주가 원하는 것이면 뭐든지 바쳤다. 하루는 함께 시장에 갔는데, 의복점에 홍창의(紅氅衣)한벌이 걸려 있었다. 화효공주가 좋다고 한마디 했다. 허션은 바로 점포로 가서 사가지고 와서 두 손으로 공주에게 바쳤다. 건륭은 미소지으며 공주에게 말했다: "너는 또 시아버지가 돈을 쓰도록 했구나!" 이 이야기는 사람들 사이에 전해지는 에피소드이다. 이후로 허션은 행동에 거리낌이 없었다. 내와관료는 대부분 허션의 당료였다. 그리하여 권력을 30년간 휘어잡는다. 그러다보니 집안의 재산은 건륭제도 미치지 못할 정도였다. 그의 미첩련동(美妾孌童), 염비준복(艶婢俊僕)이 부지기수였따.
건륭41년, 허션은 호부시랑이 된다. 오래지 않아 군기대신이 되고 이 자리에 24년간 있는다. 그리고 보병통령, 호부 병부 이부등의 상서, 이번원상서등를 겸임한다. 신하들중 가장 많은 총애를 받는다. 건륭51년, 허션은 대학사에 오른다. 사고전서관, 국사관의 총재를 맡는다. 그리고 일등공까지 받는다. 건륭은 그에게 명분은 낮지만, 허션에게 숭문문세무감독이라는 돈이 많이 생기는 직책도 내린다. 이로써 볼 때 그에 대한 총애의 정도는 등봉조극이고 더 이상은 줄 수 없을 정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셋째, 건륭황제의 마음속의 충신개념으로 보자면, 그는 건륭의 마음 속에서 최대의 충신이다.
황제에 있어서, 대신이 충성스러운지 아닌지는 그가 탐욕스러운지 아닌지에 있지 않다. 황제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왕망과 같은 정직으로 명성을 추구하는 소위 "충신"이다. 이것은 역사상의 충신들이 대부분 좋은 결말을 보지 못했다는데서도 알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단 돈맛을 보게 되면, 정치상의 야심이 없게 된다. 진나라의 왕전(王翦)은 땅과 저택을 많이 요구한다. 시황은 말했다: '장군이 떠나는데 뭘 가난할까 걱정이오?' 그러자 왕전은 '대왕의 장수로서 공이 있어도 제후가 될 수 없으니, 신은 제 때에 전답을 얻어서 후손이 잘먹고 잘살게 하기 위함입니다'라고 답한다. 진시황이 크게 웃는다. 왕전이 관(關)에 도착했을 때, 다시 좋은 밭을 더 달라고 한다. 그의 군사는 이해하지 못하여 말했다: '장군이 달라고 하는 것이 너무 심한 것같습니다'. 왕전은 말한다: '아니다. 진황은 사람을 믿지 않는 사람이다. 이제 진나라에 병사가 없을 정도로 모두 나에게 맡겼는데, 내가 전답과 저택을 더 달라고 하여, 자손들에게 내려달라고 하지 않으면, 진시황이 나를 의심하지 않겠는가'"
사실 허션은 왕전과 마찬가지로 총명한 사람이다. 그는 고위직에 있으면서 탐욕스러워야만 건륭의 의심을 해소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야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물극필반(物極必反)이라고 그는 너무 욕심을 많이 부렸다. 가경이 보기에 그가 죄가 없다고 하더라도, 집안에 그렇게 많은 재산이 있다는 것 자체가 바로 그의 죄였다. <<청사고>>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허션을 탄핵하는 자는 조조, 왕망에 비유한다. 직예포정사 오웅광이 예전에 황상을 만났을 때, 황상이 물었다: '사람들이 허션에게 딴 마음을 있다고 하는데 그런 일이 있는가?' 그러자 오웅광이 말했다: '불측한 마음을 품었다면 반드시 인심을 모아야 합니다. 허션은 만족 한족들 중에서 거의 따르는 자가 없습니다. 비록 마음 속에 불측한 마음을 품었더라도 누가 따르겠습니까?' 그러자 황상이 물었다: "그렇다면 그를 수습하는 걸 서두르지 않아도 되는가?' 오웅광이 말했다: '빨리 그의 죄를 다스리지 않으면, 잘 모르는 자들이 그에게 연줄을 대어 다른 사단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빨리 처리하는 것이 의(義)를 다하는 것이고 빨리 수습하는 것이 인(仁)을 다하는 것입니다" 가경제조차도 대신들이 허션을 조조, 왕망이라고 탄핵하는 것은 순전히 그를 얽어넣기 위한 조작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로써 볼 때, 가경제가 허션을 죽인 것은 '돈' 말고는 그가 선황의 총애를 자신보다 많이 받았다는 것밖에 없을 것이다.
넷째, 가경황제가 허션을 죽인 스무가지 이유를 보더라도, 스무가지 죄상중에서 아무리 보아도 허션이 농권오국(弄權誤國)한 간신이라는 것은 나타나지 않는다.
고대에 군왕이 신하보고 죽으라고 하면, 신하는 죽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인명은 하늘에 달렸다. 비록 폭군이 신하를 죽이는 경우에도 몇가지 이유는 만들어 내야 한다. 그리하여 자신이 올바르게 죽인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다. 당연히, 가경제는 폭군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가 허션을 죽일 때는 당연히 더욱 많은 이유를 제시해야 한다. 다만, 그가 한꺼번에 스무가지 이유를 만들어낼 줄은 생각도 못했다. 그가 얘기한 스무가지 죄명은 다음과 같다.
1. 건륭황제가 가경황제 우염을 황태자로 봉할 때, 먼저 우염에게 여의(如意)를 주어, 기밀을 누설하여 추대한 공을 사려고 했다.
2. 원명원내에서 말을 타고 직접 좌문으로 들어가서, 정대광명전을 지나, 수산입구에 이르렀다.
3. 가마를 타고 신무문으로 출입하며, 직접 궁중으로 들어갔다.
4. 궁녀를 취해서 첩으로 삼았다.
5. 사천, 호남의 교도들이 사건을 벌였을 때, 각로군영의 문서보고를 늦추고 보고하지 않았다.
6. 건륭황제의 병이 위중할 때, 아무런 우려나 슬픔을 표시하지 않고, 사람들과 웃으면서 담소했다.
7. 건륭황제가 문서를 볼 때, 글자를 잘못쓰자, 찢어버리고 다시 쓰는 것이 좋겠다고 감히 말했다.
8. 이부, 호부, 형부의 삼부를 관리하면서 일수차천(一手遮天, 한 손으로 하늘을 가리다)하여, 기존 법을 바꾸고, 수하들이 글자 하나라도 끼어들지 못하게 했다.
9. 서녕의 비적들이 무리를 지어 살인강도짓을 한다고 보고하자, 원래의 상소글을 되돌려보내고, 이를 숨겨 보고하지 않았다.
10. 조정이 몽고왕공중 천연두를 앓지 않은 사람은 경성으로 올 필요가 없다는 성지를 내렸는데, 성지를 위배하여, 천연두를 앓았던 아니던 모두 오지 말라고 했다.
11. 자기와 가까운 사람을 기용해서, 자기와 관계가 밀접한 오성란, 이횡등을 천거하여 승진되게 했다.
12. 군기처의 재적인원을 임의로 쫓아냈다.
13. 사사로이 남목(楠木)으로 집을 지었고, 호화사치스럽게 하여 기준과 규격을 넘었다.
14. 묘에 향전을 설립하고, 수도(隧道)를 팠다. 그리하여 백성들이 "화릉(和陵)"이라고 불렀다.
15. 소장한 진주 팔지가 200여개로 궁중보다 몇 배나 많았다. 그중에 큰 진주는 황제 모자에 박은 것보다 컸다.
16. 진보석정(眞寶石頂)은 그가 달아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런데 수십여개를 보관하고 있었다. 그리고 큰 대보석은 궁중에 없는 것인데, 부지기수였다.
17. 집안에 은량과 의복 장식품등의 수가 천만을 넘었다.
18. 벽중간에 적금(赤金) 2만6천여냥을 숨겼다. 사금고에는 적금 6천여냥을 두었고, 지하창고에는 은 백여만냥이 있었다.
19. 전당포와 전장의 자본이 10여만으로 여민쟁리(與民爭利, 백성과 이익을 다투다)했다.
20. 집안노비 유전(劉全)의 자산이 역시 20여만이었고, 큰 진주와 진주 손목팔찌를 가지고 있었다.
허션의 스무가지 죄명을 자세히 음미해보면, 그중에는 기밀누설죄, 독직죄, 직무소홀죄, 독직죄, 비호죄등등이 있다. 다만 사람들이 생각하는 매국적인 것이나, 충신양신을 해친 간신의 죄목은 없다. 사실, 가정이 허션을 죽이려고 한 것은 허션의 재산이 아주 많았기 때문이고, 그가 명실상부한 대탐관이기 때문이다. 그를 죽이는 것은 정치투쟁의 법칙일 뿐아니라, 관료사회의 규율이다. 더더구나 "허션이 쓰러지니 가경이 배불리 먹는다"는 것의 필연의 길이었다. 즉, 허션의 모든 재산은 국고에 들어가고, 가경제때의 재정부족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이로써 볼 때, 허션을 탐관(貪官)이라고 하는 것은 명실상부한 것이지만, 허션을 간신(奸臣)이라고 보는 것은 아마도 그에게 억울한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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