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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선진)

수후지주(隨侯之珠) 행방의 수수께끼

by 중은우시 2015. 2. 10.

글: 불감왕언(不敢枉言)


"수후지주"는 춘추전국시대 수(隨)나라의 보물이다. 그것은 "화씨지벽(和氏之璧)"과 함께 나란히 춘추시대의 양대기보(兩大奇寶)이다. 이 두 개의 기보는 춘추전국시대에 여러번 언급된다. 예를 들면, "변화보박(卞和報璞)", "완벽귀조(完璧歸趙)" 등 역사이야기는 첫번째 봉건왕조 진나라에 의하여 멸망된 후 "수후지주"와 "화씨지벽"은 사라진다. 이것은 무슨 원인때문인가?


1. "수후지주"의 문헌기록


역사삼 "수후지주"에 관한 문헌기록은 많다. <맹자.양왕>에는 이렇게 말한다: "오늘 누가 여기에서 수후지주로 천인의 참새를 잡는다면 세상사람들은 웃을 것이다. 왜그런가. 쓰는 것은 귀중하고, 얻는 것은 가볍기 때문이다." 그 뜻은 귀중한 것을 버려서 가벼운 것을 구한다는 것이다. <묵자>에는 이렇게 말한다: "화씨지벽, 야광지주, 삼극육이(三棘六異), 이는 제후의 좋은 보물들이다." 야광지주는 바로 '수후지주'를 가리킨다. <여씨춘추.관생편>에는 "수주탄작(隨珠彈雀)"으로 큰 재목을 작게 쓴다는 이치를 비유한다. 그외에 <한비자>에는 "화씨지벽은 오채(五采)로 장식할 필요가 없고, 수후지주는 은황(銀黃)으로 장식할 필요가 없다. 그 바탕이 아주 아름답기 때문에 물건에 장식을 하지 않아도 된다." 서한의 <회남자.남명>에는 이렇게 쓰고 있다: "예를 들어, 수후지주, 화씨지벽은 얻는 사람이 부자가 되고, 잃는 사람이 가난해진다."등등.


2. "수후지주"의 전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수후가 외출할 때, 한 마리의 뱀이 사람에게 허리가 잘려서 목숨이 간당간당하고 있었다. 수후는 상처의 상황을 살펴보았는데, 큰 뱀은 간구하는 듯했다. 수후는 그 뱀이 영물이라고 보고 측은지심이 생긴다. 그래서 어의가 휴대하던 약물로 큰 뱀의 상처를 발라준다. 그 뱀은 천천히 지각을 회복하고 몸을 점점 움직이게 된다. 수후의 가마를 세 바퀴 돈 후에 밀림의 깊은 곳으로 사라진다. 1년후 수후가 다시 외출을 나섰는데, 쉬는 동안 돌연 꿈을 꾸는데 한 소년이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자신은 작년에 목숨을 구해준 뱀이며, 구명지은에 보답하기 위하여 수후에게 보물 하나를 바치겠다고 한다. 수후가 깨어나보니 몸옆에 아주 큰 구슬이 하나 있었다. 이 구슬의 바깥에는 1촌가량의 빛이 둘러싸고 있었고, 낮에는 달처럼 깨끗하고 매끄러우며, 밤에는 눈부신 광채를 뿜어냈다. 이것으로 실내를 백주대낮처럼 밝힐 수 있었다. 수후는 이 보물을 아껴서 항상 몸에 휴대하고, '국보'로 삼는다.


3. "수후지주"의 최종귀속


춘추전국시대에는 제후들이 임립(林立)해 있었고, 수나라는 한수이동의 작은 제후국이었따. 당시는 제후들이 쟁패하고 있어서 많은 소국들은 큰 나라에 병합되거나 흡수되었다. 수나라는 먼저 초나라의 부속국이 되었다가 나중에 초나라에 멸망당한다. "수후지주"는 자연히 초나라의 국고에 들어간다. 사료기재에 따르면, 기원전350년, 진나라는 사신을 보내어 초나라를 방문했을 때, 초나라의 보기(寶器)를 보여달라고 욕한다. 초선왕은 영윤(令允) 자서(子西)에게 말한다: "진나라가 초의 보기를 보고자 하는데, 나의 화씨지벽, 수후지주를 보여주어야 하는가?" 이를 보면 알 수 있다. '수후지주'는 확실히 초나라에 있었다. 나중에 진나라가 강성해지고, 육국을 통일하면서 초나라, 조나라를 멸망시킨다. 춘추의 양대기보인 '수후지주'와 '화씨지벽'은 진나라의 품에 들어가, 진나라의 국보가 된다. 여기에 이사가 쓴 <간축객서>가 그 증거이다. 그는 시황제에게 상소를 올려 이렇게 말한다: "지금 폐하는 곤산지옥(崑山之玉), 수,화지보(隨,和之寶), 수명월지주(垂明月之珠)를 가지고 있고....이들 보물은 진나라에서 나온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런데 폐하가 이를 좋아하니 무엇때문인가?" 진나라는 강산을 통일한 후 시황제라 칭하며, 황제의 인장을 만든다. 화씨벽을 조각하여 "옥새(玉璽)"로 삼는다. 그 위에는 "수명어천, 기수영창(受命於天, 旣壽永昌)"이라는 8글자를 썼다. 글자는 이사가 쓴 것이다. 공장은 당시의 저명한 옥장인인 손수(孫壽)이다. 진나라가 멸망한 후 천하는 대란에 빠지고, '옥새'는 대대로 전해지나, '수후지주'는 이때부터 행방이 묘연해진다.


"수후지주"의 거취에 대하여는 여러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는 "분소(焚燒)설". 유방이 앞장서서 함양을 점령한 후 진왕자영의 투항을 받는다. 모든 물건을 등기하여 책으로 만들어 보존한다. 항우가 아방궁을 불태울 때, '수후지주'도 같이 불에 타버린다. 둘째는, '민간에 흘러들어갔다'는 설이다. 이 설은 초패왕과 관련이 있다. 항우가 함양에 진주한 후 많은 보물과 미녀를 노획한다. 그는 '수후지주'는 원래 초나라의 보물이므로 이를 가지고 간다. 나중에 항우가 패배하면서, '수후지주'는 민간에 흘러 들어간다. 셋째는 '배장(陪葬)설'이다. 수후지주는 실제로 야명주이다. 진시황이 죽은 후, '수후지주'는 배장품으로 진시황의 묘실에 들어가서 '고촉(膏燭)'을 대신하여 묘내를 밝힌다. 이 설이 가장 믿을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