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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선진)

주역(周易) 탄생의 숨은 진상

by 중은우시 2014. 1. 14.

작자: 미상 

 

하남(河南) 탕음현(湯陰縣) 성북 4킬로미터에 국내외에 유명한 천년고성이 있다. 유리성(羑里城). 상(商)나라때, "유리"는 감옥의 별칭이었다. 즉, 유리는 중국에 역사적 기록이 있는 현존하는 최초의 국가감옥이다.

 

많은 사람들은 유리를 안다. 왜냐하면 <사기>에 이런 말이 있기 때문이다: "주수서백유리(紂囚西伯羑里, 주왕은 서백을 유리에 가두었다)" 사마천의 이 짧은 6글자는 중국문화사상과 긴밀한 관련이 있는 감동적인 이야기를 수천년간 전해주었고, 유리라는 작은 지방을 역대왕조 독서인의 너리 속에 깊이 낙인찍게 된다.

 

사마천이 말하는 "주(紂)"는 당연히 주왕이다. 상나라의 마지막 군왕. 전설에 따르면 우리가 매일 사용하고 있는 젓가락은 바로 주왕이 발명한 것이다. 당연히 주왕의 공헌은 젓가락을 발명한 것에 그치지 않는다. 역사에 주왕은 "재력과인(材力過人, 재능과 힘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났다)"이라고 적었다. 일찌기 동이를 평정하고, 중원문화를 장강, 회하유역까지 점차 전파하여 중국통일의 초보적인 규모를 만든다. 다만 주왕이 청사에 이름을 남긴 것은 그의 공적때문이 아니라, 그의 잔혹함과 호색함이다.

 

"서백"은 이름이 희창(姬昌)이다. 즉 역사기록에서 하늘과 땅을 놀라게 하고 귀신을 움직인 주문왕(周文王)이다. 시경(詩經)에는 그가 천명을 받아 주(周) 왕조를 창건했다고 적었다. <봉신방>에 나오는 풍운을 질타하고 왕조를 교체한 주무왕이 바로 그의 아들이다. 역사상 저명한 백이, 숙제, 태전(太顚), 굉요(閎夭), 산의생(散宜生), 죽웅(鬻熊), 신갑(辛甲)등이 모두 전후로 희창에게 귀순하여 부하가 되어 신하가 된다. 희창은 스스로 생활이 근검절약했고, 보통사람의 의복을 입었으며, 밭에서 직접 일을 했다. 그렇게 전전긍긍하며 자신의 국가를 다스린다.

 

"주수서백유리"를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주왕은 희창을 유리에 가두었다"는 말이다. 주왕이 왜 희장을 가두었을까? <사기>에는 이것이 희창의 탄식 한마디 때문이라고 한다.

 

사정의 경과는 이렇다. 상나라의 구후(九侯)의 예쁜 딸을 주왕이 마음에 들어했고, 궁중으로 뽑아간다. 다만 이 여자는 '음탕한 일을 좋아하지 않았다." 주왕은 화가나서 이 여자를 죽여버린다. 그 후에 육장(肉醬)으로 만들어 그의 부친에게 보낸다. 대신 악후(鄂侯)는 이 일에 디하여 주왕에게 날카로운 의견을 제시하지만, 주왕은 그의 말을 듣지 않는다. 오히려 악후를 죽여버리고, 그의 살로 육포(肉脯)를 만든다. 

 

희창은 이 소식을 듣고 부지불식간에 탄식을 한다. 그러나 그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은 그의 이 탄식이 그에게 감옥의 재난을 겪게 했다는 것이다. "숭후호(崇侯虎)가 이를 알고, 주왕에게 고발했다. 주왕은 서백을 유리에 가둔다." 간신 숭후호는 희창이 탄식했다는 것을 알고는 즉시 주왕에게 보고한다. 숭후호는 주왕에게 말한다. 희창은 국내에서 덕과 선을 많이 쌓아서, 덕망이 아주 높다. 이번에 불만의 정서를 나타낸 것은 장래 은상의 천하를 빼앗으려는 것일 것이다. 그래서 주왕은 희창을 붙잡아 유리라는 국가감옥에 구금하게 된 것이다. 이 해에, 희창은 이미 82세의 고령노인이었다.

 

왠일인지 성격이 잔혹한 주왕이 희창을 죽이지는 않았다. 아마도 주왕은 희창의 나이가 이미 많아서 몇년 더 못살 거라고 생각해서일 것이다. 죽이는 것이나 가두는 것이나 별 차이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주왕은 이 노인네가 자신에게 충성하는지 아닌지를 잘 파악하지 못해서일 수도 있다. 아니면 희창이 민중들에게 명망을 얻고 있어서일 수도 있다. 어쨌든 주왕은 희창을 7년간 가두어둔다. 그리고 터럭하나 건드리지 않고 풀어준다.

 

3000년전의 감옥생활은 도대체 어떠했을까? 우리는 알 도리가 없다. 그러나 어땠던 사람을 걸핏하면 죽여서 육장,육포로 만드는 주왕의 덕행이라면, 감옥에 갇혀 있던 희창이 분명 편하게 지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사료의 기재에 따르면, 희창과 외부의 연락을 끊기 위하여, 주왕은 유리에 중병을 주둔시켰을 뿐아니라, 유리로 통하는 도로에 관문을 여러 겹 설치했다. 희창의 아들은 부친을 만나고 싶었지만, 주왕의 허가를 받지 못했다.

 

만일 보통사람이 이런 환경속에서 생활한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그러나 희창에 있어서, 이것은 얻기 힘든 생각할 기회였다. 그는 평상시에 너무 바빴고, 나라와 백성을 걱정하고, 정무에 바빴다. 조용히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현재, 신체는 자유를 잃었지만, 사상은 전혀 걸리적거리는 것없이 미친듯이 팽창했다.

 

유리의 감옥에 있던 7년동안, 가슴에 큰 뜻을 품고 있던 희창은 소극적으로 죽기를 기다리지만은 않았다. 그는 밤낮으로 한가지 연구를 한다. 연구대상은 당시에 널리 알려져 있던 복희팔괘(伏羲八卦)이다. 특별히 힘든 감옥생활에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여서인지는 모르지만, 희창은 복희씨의 선천팔괘(先天八卦)와 그의 "천도(天道), 지도(地道), 인도(人道)사상을 결합시켜, 64괘로 만든다. 그리고 매과와 매과의 6효를 둔다. 상수의 내함과 관련연유를 가지고 각각 길흉이부(吉凶利否)의 의미를 지닌 괘사와 효사를 만든다. "군경지수(群經之首)"인 <주역>은 이렇게 탄생한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간결한 언어로 이 위대한 사건을 개괄했다: "서백구유리성연주역(西伯拘羑里城演周易, 서백은 유리성에 갇혀서 주역을 만들었다)"

 

희창이 주역을 만드는 것을 간수가 보았다. 그 보고를 받은 후, 주왕은 반신반의한다. 희창이 과거를 알 수있고 미래를 예측하는 성인인지 아닌지를 시험해보기 위하여, 주왕은 잘 쓰던 수법을 써서 인육식품을 만든다. 이번의 인육식품 원재료는 희창의 장남인 백읍고(伯邑考)였다. 주왕은 백읍고의 살로 육갱(肉羹)을 만들어 사람을 시켜 주문왕 희창이 먹게 한다.

 

희창이 어떤 사람인가? 육갱을 보자마자, 즉시 자신의 친인의 살로 만든 죽임을 알았다. 만일 이 육갱을 먹지 않으면, 주왕은 분명히 의심을 품을 것이다. 희창은 크다란 비통을 억지로 참으면서, 억지로 육갱을 먹었다. 주왕은 하인의 보고를 받은 후, 조롱하며 말했다: "성인은 자신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는다. 자신의 아들의 살로 만든 죽을 먹는 줄도 모르는데, 누가 그를 성인이라고 하는가?" 그래서 희창에 대한 경계심을 느슨하게 한다.

 

지금 유리성의 서북각에는 주문왕이 주역을 만든 곳과 멀지 않은 곳에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무덤이 있다. 무덤의 앞에 있는 묘비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백읍고지묘(伯邑考之墓)"

 

현지 백성들은 말한다. 이것은 토아총(兎兒塚)이라고. 토아총은 "토아총(吐兒塚)"이라고도 부른다. 전설에 따르면 당시 주문왕은 매번 육갱을 먹은 후 장소를 찾아서 토했다고 한다. 토아총은 바로 주문왕이 육갱을 토한 곳이다. 전설에 따르면, 주문왕이 토한 고기는 토끼로 바뀌어서 팔짝팔짝 뛰면서 도망쳤다고 한다. 그래서 현재 유리성부근의 백성들중에는 이런 말이 전해진다: 유리성의 토끼는 잡으면 안된다. 그들의 눈에 토끼는 바로 백읍고의 혼이다.

 

주문왕이 감옥에서 깊이 생각에 빠져 있을 때, 그의 부하들도 당연히 그냥 놀지는 않았다. 주문왕을 구하기 위하여, 주문왕의 근신 굉요, 산의생등은 여러가지 방법을 생각해낸다. 그들은 유신(有莘)으로 가서 예쁜 여자를 찾고, 다시 여융(驪戎)으로 가서, 좋은 말과 진귀한 물품을 구매한다. 그 후에 주왕의 심복대신 비중(費仲)을 매수하여 미녀, 양마, 기물을 주왕에게 바친다.

 

탐욕스러운 주왕은 이들 진귀한 선물을 보자, 더욱 경계심을 늦추게 된다. "이런 미녀를 보내다니, 서백 희창을 풀어주어도 될 정도이다. 하물며 이렇게 많은 좋은 물건을 보내주었음에야." 그는 즉시 서백 희창의 석방을 명한다. 그리고 그에게 궁시부월(弓矢斧鉞)등 많은 병기도 하사하고, 희창에게 각지제후를 정벌할 권한도 수여한다. 주왕은 그리고 주문왕에게 말한다: 너에게 나쁜 말을 한 사람은 숭후호이다.

 

석방된 희창은 주왕을 원망하는 뜻을 전혀 나타내지 않는다. 반대로, 그는 낙서(洛西) 지방을 주왕에게 바치기도 한다. 이를 통해 주왕이 그에 대한 사면에 감사한다. 그의 충심에 대하여 주왕은 신뢰감을 더욱 강화한다.

 

주왕이 정벌의 권한을 부여했다는 것을 알고 난 후, 희창은 자신의 치국안방의 이상을 펼치기 시작한다. 은주왕 35년(기원전1121년), 92세의 서백 희창은 견융(犬戎, 지금의 호남성 상덕 일대)을 정벌한다. 이 해에 또 다른 큰 사건은 희창이 위수(渭水) 하변(河邊)에서 곧은 낚시로 물고기를 낚던 강태공(姜太公)을 만나고, 그를 군사(軍師)로 모신다.

 

그 후, 희창은 선후로 밀수(密須, 지금의 감숙성 경천현), 기(耆, 지금의 산서성 여성현), 우(邘, 지금의 하남성 심양현경내)등지를 토벌한다.

 

주왕의 신임을 깊이 받던 서백 희창은 수년간의 정벌을 통해, 관할하는 지역이 갈수록 넓어지고, 세력은 갈수록 커진다. 상왕조의 대신 조이(祖伊)는 형세가 심각하다고 여기고, 근심스럽게 주왕에게 보고한다. 그에게 날로 강대해지는 주에 대하여 상왕조가 경계심을 가져야 할 정도로 위협이 된다고. 주왕은 그러나 신경쓰지 않았다: "모든 것은 하늘이 정한다. 누가 나를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은주왕41년(기원전1117년), 희창이 죽는다. 그의 차남 희발(姬發)이 그의 직위를 승계한다. 12년후(기원전1105년), 희발은 여상(呂尙)을 군사로 함아 병력을 이끌고 주왕을 토벌한다. 희발은 팔백제후를 모아서, 목야(牧野, 하남성 기현 남쪽)에서 주왕과 회전을 벌인다. 결과 은나라군대가 대패하고 주왕은 자결한다.

 

이때부터, 주왕조는 은상을 대체하여 천하를 차지한다. 희발은 자칭 주무왕이라고 하고, 부친 희창은 주문왕으로 추존한다. 주문왕은 주왕과의 겨루기에서 뛰어난 지혜를 선보였다. 비록 은주왕은 주문왕을 잔혹하게 박해했지만, 주문왕은 이렇게 말한다: "부친이 자애롭지 못하더라도, 아들은 불효할 수는 없다; 군주가 현명하지 않더라도, 신하는 불충할 수가 없다. 어찌 군주가 있는데 반란을 꾀하리오." 설사 세력이 강대해진 후에도, 주문왕은 은주왕에 반기를 들지 않았다. 이런 점을 보자면, 주문왕은 확실히 충성스러웠다. 다만 간단하게 문왕을 충신으로 본다면, 아마도 그것은 주문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일 것이다.

 

구후의 딸이 무고하게 주왕에게 죽임을 당한 후, 주문왕은 악후처럼 가서 간언하지 않았다. 그냥 탄식을 했을 뿐이다: 주왕이 자신의 아들을 죽이고 그 살을 끓여서 죽으로 만든 것을 자신이 마실 때도 그는 주왕의 잘못을 지적하지 않았다. 오히려 "천왕성명(天王聖明), 죄신당주(罪臣當誅)1" 주왕이 달기의 따스한 품에 빠져서 국사를 돌보지 않고 백성의 사활에 신경쓰지 않을 때, 그는 비간(比干)처럼 심장과 폐가 꺼내어지지도 않았다.

 

그가 취한 방식은 자신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자신을 맹렬하게 발전시키는 것이다. 그는 비록 직접 주왕을 끌어내리지는 않았지만, 그는 주무왕이 천하를 통일할 충분한 역량을 지니도록 남겨주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무평불피(無平不陂), 무왕불복(無往不復), 물극필반(物極必反)"(주역), 그리고 "비극태래(否極泰來)"의 도리를 잘 알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진실한 희창이다. 이것이 바로 진실한 주문왕이다.

 

주문왕이 "유리에 갇혀서 주역을 만들었다"는 것은 천고에 전해지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되었다. 주문왕도 중화민족의 문화성인중 하나가 된다. 주문왕은 우리에게 중화문명중 획기적인 의미를 지닌 전적 <주역>을 만들었다. 화하민족은 우주와 인생에 대한 탐색을 새로운 고도로 끌어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