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경제/알리페이 사건

마윈(馬雲), 그는 누구인가?

중은우시 2014. 5. 30. 10:04

글: 소생(小生)

 

 

 

 

1

 

필자가 알리바바를 대기업이라고 인식하게 된 것은 2013년의 쌍십일(雙十一), 즉 11월 11일이었다.

 

그때 필자는 이미 비지니스보도에 그다지 주목하지 않고 있었다. 다만 알리바바의 직원은 여전히 나에게 1년에 1번 있는 인터넷쇼핑카니발에 참가할 것을 초청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나에게 이 사건을 보도하거나 웨이보에 올려 자신들에게 좋은 말을 몇 마디 해주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그저 필자가 계속 이 회사를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보기에, 필자는 알리바바와 그 카리스마있는 지도자 마윈의 충실한 옹호자이다. 비록 필자가 오랫동안 이 회사에 관한 보도를 쓰지 않았지만.

 

비록 사람들이 깜짝 놀랄 거래액을 지니고 있고, 이후 쌍십일 알리바바집단이 당일거래액이 얼마나 많은지에 대하여도 그다지 놀라울 것은 없었다. 다만, 클라미막스는 마윈이 등장한 때였다.당시 백명이상의 기자가 이 보고회장에 모여 있었고, 그들의 앞에는 대형 스크린에서 실시간으로 쌍십일의 거래액과 물류상황을 보여주고 있었다. 마윈은 아무런 사전예고없이 나타났다. 이전의 쌍십일 활동에서 마윈과 회사의 경영진은 확실히 현장에 나타나서 쌍십일을 소개하는 몇마디 말을 하곤 했고, 기자들의 일부 질문에 대답을 했다. 다만 8개월전에 그는 막 '은퇴'를 선언했고, CEO의 직무를 이미 그와 함께 여러해동안 일해온 루자오시(陸兆禧)에게 넘겨주었다. 그리고 '이전에는 일이 나의 생활이었지만, 이후는 생활이 나의 일이다"라고 선언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의 동료들은 일찌기 이후 그는 더 이상 매체의 인터뷰를 받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아무도 마윈이 다시 기자들이 모여있는 현장에 나타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나타났다. 헐렁한 기공단련복을 입고 발에는 포혜(布鞋)를 신고. 마치 금방 그가 좋아하는 태극권을 막 마치고 나타난 것처럼. 그는 보고회장의 앞문으로 들어왔고, 보고회장의 강단에 올라가기도 전에, 그를 알아본 한 무리의 기자들에게 몰려들었다. 카메라와 핸드폰이 마윈을 향했다. 뒷줄에 앉아있던 깆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몰랐고, 마윈은 이미 몸을 돌려 보고회장을 떠나서 그에게 몰려오는 사람들을 피했다.

 

거대한 실망이 북적대는 방안을 휩쓸고 지나갔다. 사람들은 마윈이 사람들에게 놀라서 도망간 것인지 아닌지를 잘 몰랐다. 다만 그후 알리바바의 직원이 그가 다시 나타나는 것을 준비했다. 그들은 보고회장의 관중석과 강연대 사이에 격리대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한 줄의 직원들이 격리대의 앞에 서서 다시 사람들이 몰려들지 못하게 막았다. 모든 준비를 마친 후, 마윈은 다시 들어온다. 그가 들어오자 회장의 분위기는 고조되고, 인터넷에 널리 전파되는 말들을 남겼다. 그중 가장 인상이 깊었던 말은 이것이다. 그는 자신이 CCTV 연도경제인물시상식장에서 왕젠린(王健林)과 내기를 할 때 말했다. 만일 왕젠린이 이기면, '우리의 이 시대가 지는 것이다'라고. 그는 또 말했다. 이비지니스를 통하여 상업부동산의 가격을 끌어내릴 수 있기를 바란다고 이를 통하여, 전체 부동산가격이 내려가기를 바란다고.

 

바로 그때 나는 돌연 알리바바가 정말 대기업이라는 것을 느꼈다. 이전에 타오바오(淘寶)와 티몰(Tmall, 天猫) 플랫폼에서의 거대한 판매액은 이미 BAT(바이두, 알리바바, 텐센트)의 3거두중 하나로 만들었지만, 나는 그 점을 느끼지 못했었다. 마윈이 사람들이 밀려오자 몸을 돌려 도망치고, 다시 격리대를 설치할 때 나는 비로소 이 회사의 방대함을 느꼈다. 이미 마윈은 그저 풀뿌리 창업영웅이 아닌 것이다. 그 자신은 이 점을 부인할 것이다; 그는 중국인터넷세계의 우상이다; 사람들은 혹은 그를 찬미하고 혹은 그를 두려워하고 그를 타도하고자 한다. 이것은 역사상 여러 전설적으로 성공한 인물들과 마찬가지이다. 스티브 잡스는 안티카리스마의 역할을 했다. 최초의 그는 IBM에 도전했다. 그리하여 세계가 독점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다윗이 되었다. 다만 애플이 전세계에서 시장가치가 가장 높은 기업이 되면서 다윗은 골리앗으로 바뀐다. 많은 회사들은 예전에 IBM을 두려워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애플을 두려워한다. 혹은 아인슈타인이 말한 것처럼: 나는 일생동안 권위에 반대해왔다. 그 결과 하나님의 나에 대한 징벌은 나를 권위로 만든 것이다.

 

몇년전, 타오바오가 아직 4개의 더욱 작은 회사인 타아바오집시(집시(集市), 티몰, 이타오(一淘) 및 타오바오 후대(後臺)로 나뉘기 전에, 필자는 일찌기 타오바오가 개최한 활동에 참가한 바 있다. 지금까지도 뇌리에 깊이 박혀있는 인상깊은 장면은: 약간 통통하고 즐거워보이는 젊은 여자가 고전드라마의 엑트트라같은 옷을 입고, 나의 곁을 지나면서 나에게 물어보았다. XXX가 어디 있는지 아느냐고. 그녀의 목적은 더 많은 메모쪽지를 수집하는 것이었다. 그 활동에서 타오바오의 직원들은 속속 고전드라마의 이미지로 분장하였다. 외모도 그들의 별명과 맞아 떨어졌다. 그것은 타오바오의 유명한 '무협문화'의 클라이막스였다. 마윈은 김용의 무협소설에 따라 자신의 회사를 꾸민 것같았다. 김용은 아마도 이것에 자부심을 느낄 것이다. 왜냐하면 전세계에서 이 정도 규모 회사의 문화나 일처리풍격이 한 작가의 작품에서 나오기는 어려울테니까. 모든 참가자들은 기뻐했고, 그것은 '게임정신'의 가장 좋은 설명이다. 쌍십일의 그 장면을 보았을 때 나는 그때 즐거워하던 타오바오가 그리워진다. 그것은 아주 쿨했다. 온 몸에서 게임정신이 넘쳤다. 그것은 놀면서 일을 해내는 것과 같았다.

 

다만 당연히 알리바바는 당시에 다른 방면에서의 곤란을 겪고 있었다. 마윈은 무료방식으로 중국에서 인터넷거두 이베이를 격퇴했다. 그는 타오바오에서 쇼핑몰를 개설하는 점주는 아무런 비용도 받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당시 이베이에서 인터넷쇼핑몰을 개설하려면 이 C2C 플랫폼에 일정한 비용을 납부해야 했었다. <Wired>잡지의 전 편집인 크리스 앤더슨이 인터넷경제의 무료모델을 내놓기 전에, 마윈은 이미 그렇게 한 것이다. 이것은 그의 천재적인 점이다. 나중에 무료모델이 다시 인터넷게임과 안티바이러스소프트웨어업종에 응용될 때, 스위주의 <정도>와 저우홍웨이의 안티바이러스소프트웨어 360은 모두 그렇게 했고 마찬가지로 파죽지세였다. 타오바오는 중국최대의 C2C플랫폼으로 그 지위를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80%가량의 시장점유율을 자랑한다. 다만 문제도 나타난다. 사람들은 이렇게 묻는다: 그렇다. 모든 사람들이 즐겁다. 그러나, 이 회사는 뭘로 돈을 벌 것인가? 마윈이 참가한 발표회에서 가장 유행하는 문제의 하나는 바로 타오바오의 비지니스모델이다. 그이건 아니면 타오바오의 총재를 지낸 바 있는 쑨통위이건 루자오시이건, 모두 이에 대하여는 대답을 회피했다. 그들은 항상 타오바오는 영리문제를 고려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한 잡지에서 타오바오의 비지니스모델에 대한 의문을 담은 커버스토리를 실은 적이 있다. 제목은 "타오바오는 힘들게 돈을 벌고 있다."

 

오늘날의 후견지명(後見之明)으로 보자면, 당시 매체와 분석가들은 마윈과 타오바오에 대한 의문 혹은 우려는 아주 아이러니하다. 왜냐하면 알리바바집단은 2014년 5월 7일 미국SEC에 제출한 주식공모설명서의 재무수치를 제출했는데, 주요이윤이 타오바오계열에서 나오는 알리바바는 이미 텐센트와 바이두를 추월하여 중국에서 가장 돈을 많이 버는 인터넷회사가 되어 있다. 그리고 50%를 넘는 이윤율을 자랑한다. 최신의 의문은 이 회사가 너무 돈을 많이 번다는 것이다. 이 회사가 이렇게 돈을 버는데, 플랫폼의 상인들의 이익을 빼앗은 결과가 아니냐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더욱 긴 시간을 가지고 여러 견해를 보면, 거기에 아이러니한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

 

마윈이 걸어온 길은 "영광의 가시밭길"이다. 동화작가로 유명한 안데르센의 글 속에 이런 말이 있다: "영광의 가시밭길은 겉으로 보기에 지구를 둘러싼 찬란한 빛의 띠이다. 운이 좋은 사람만이 이 길을 걸을 수 있고, 비로소 하나님과 인간을 잇는 다리를 건설하고, 급여를 받지 않는 엔지니어로 될 수 있다." 이 길을 걷는 사람은 '무한한 영광과 존엄을 얻지만, 그는 오랫동안 극도의 곤란과 생명의 위협을 당하게 된다."

 

이들 인용문은 아마도 과장되었을 것이다. 그가 최근 몇년간 당한 일은 그저 일부 사람들이 그의 회사건물아래에 모여서 항의표어를 들고 있는 것이라든지, 어떤 사람이 홍콩의 길거리에서 그를 포함한 회사경영진의 위패를 세워둔 것이라든지, 일부 사람들이 그와 그의 가족을 해치겠다고 욕을 하고 위협한다든지, 그리고 우리가 잘 모르고 그도 표현할 방법이 없는 다른 경우들 예를 들어, 은행과의 마찰....

 

그의 흔적은 인터넷에서 어디서나 볼 수 있다. 1994년, 마윈은 미국에서 인터넷을 알게 된다. 일찌기 마윈을 쓴 글에서, 그중이 극적인 경력을 묘사한 바 있다. 진실성은 잘 모르겠다. 1995년, 마윈은 중국 옐로우페이지를 창업한다. 현재 인터넷에서 그 당시의 동영상을 찾아볼 수 있다. 마윈은 베이징 국가체육위로 가서 자신의 사업을 마케팅할 때, 그는 국가체육위에 '정보고속소로상의 선전"을 제공하겠다고 했다. 결과 '이 문제는 아주 복잡하고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간단하지 않다...너는 예약을 해야 한다. 먼저 업무처리에서 예약부터 잡아야 한다." 는 말을 듣는다.

 

1999년, 성공을 거두지 못한 마윈은 다시 항저우로 돌아온다. 그리고 나중의 알리바바를 창업한다. 이 이야기는 마찬가지로 여러번 묘사되었다. 2월 21일 항저우 호반화원(湖畔花園)이 마윈의 집에서, 18명은 마윈의 "위대한 일을 하나 하자"는 말을 듣는다. 마찬가지로 이 해에, 차이충신(蔡崇信)이 알리바바에 가입한다. 이 가입도 신비로운 색채를 띈다. 당시 명실상부한 '골든보이'였던 차이충신이 적극적으로 알리바바에 가입할 것을 원했던 것이다. 그리고 전설에 따르면 월급이 600위안이었다. 이런 신비한 색채는 차이충신이 지금까지도 여전히 알리바바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중의 하나이고 한번도 대륙매체의 인터뷰에 응하지 않아서 더욱 가중된다. 마찬가지로 이 해에, 또 다른 신화화된 이야기가 벌어진다; 마윈은 '인터넷황제' 손정의의 투자를 받아낸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6분간 얘기하고 손정의는 3000만달러를 투자했다'는 것이다. 마윈은 최종적으로 2000만달러를 받는다. 당연히, 이 투자는 다시한번 신화가 된다. 그것은 그 투자수익율 때문이다. 만일 알리바바의 시가총액이 2000억달러가 되면, 소프트뱅크의 그 2000만달러의 투자는 지금 668억달러가 되는 것이다.

 

이어서, 그들은 2003년의 SARS를 견뎌낸다. 알리바바의 직원중 SARS에 감염된 사람이 나타나서, 마윈은 모든 직원들이 재택근무하도록 결정한다. 이와 동시에 그는 이미 타오바오를 준비했다. 비록 창립초기에는 사람들이 좋게 보지 않았지만, 2004년에 성립된 타오바오는 결국 이베이를 물리치고, 중국최대의 C2C이비지니스플랫폼이 된다. 2005년, 알리바바은 야후로부터 10억달러의 가치를 지닌 투자와 야후중국의 자산을 받아들인다. 비록 이 투자는 나중에 매체어서 알리바바를 곤경에 빠트린 자본의 족쇄라고 얘기되어 지지만, 마윈은 이를 위하여 알리바바의 40% 지분을 내놓는다. 다만 당시에 이것은 중국인터넷역사상 받아낸 최대의 투자였다. 2007년, 마윈은 집단에서 이익을 나타내는 B2B사업을 분리시켜 홍콩에 상장시킨다. 시가총액은 한때 200억달러를 넘었다. 당시의 글로벌 5대인터넷회사로 구글, 이베이, 야후, 아마존의 바로 다음 위치를 차지한다.

 

외부에서 보기에, 1999년 항저우에서 알리바바를 창업한 이래, 운은 계속 이 작은 키의 항저우사람을 따라다닌 것같다. 그러나 그 중의 신산은 아마도 그와 그의 창업파트너들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주식공모신청서를 제출한 후 3일째 저녁, 마윈은 상하이에서 돌아와서 집단결혼식과 알리페이연차총회(비록 현재 이 회사의 명칭은 샤오웨이금융이지만, 대다수인들은 여전히 알리페이라고 이 장래의 금융거두를 부르고 있다)에 참석한다. 그는 회사의 몇몇 경영진과 자신의 집에서 마오타이주를 마시면서 옛날을 회고했다. 금방 블룸버그통신에서 아마도 왕젠린과 마와텅을 넘어 중국최고부자에 등극하게 될 그는 그의 첫번째 비서를 떠올렸다. 그 여자는 항상 그의 회사문밖에서 배회하다가, 어느 날인가 그녀가 그의 비서를 하겠다고 말하낟. 마윈은 깜짝 놀라서 대답했다: 우리 회사는 모두 합쳐서 5명밖에 안된다. 그러나, 결국 그는 그녀의 요청을 받아들인다.

 

지금은 이미 인터넷거두가 된 그는 한 광산주와의 식사장면을 잊지 못한다. 거친 성격의 광산주는 이렇게 말했다. 만일 마윈이 한꺼번에 백주 9잔을 마신다면 그는 마윈에게 50만위안을 바로 투자하겠다고. 문인출신의 마윈은 망설였다. 그는 백주를 마실 줄 몰랐다. 이때 그의 비서가 술잔을 가져가서 그녀의 오너를 대신해서 백주를 마셨다. 결국 그녀는 27잔을 마신다. 그가 창립한 회사가 미국에 공개상장되면 아마도 중국에서 시가총액이 가장 많은 인터넷회사가 될 즈음에 마윈은 그 때의 일을 떠올렸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의 그 비서는 그와 계속하여 함께하지를 못했다. 왜냐하면 그가 베이징으로 가서 대외경제무역부와 합작하기로 결정했을 때, 그녀는 결혼한지 막 1개월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가 무지불식간에 사람들에게 얘기한 하나의 사례이다. 우리는 이 회사의 15년 역사를 상상해볼 수 있다. 혹은 1995년 중국옐로우페이지를 창립한 때로부터 근 20년의 역사에서, 그는 여러가지 유감과 갈등이 있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국가체육위 판공실에서 한 공무원이 막는 바람에 그는 오늘날 보여주는 웅변을 과시할 수 없었고; SARS기간동안 그는 재수없다고 탄식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4번째 환자가 바로 알리바바의 직원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가 최초에 그를 따라 창업했던 부인에게 회사의 업무를 포기하고 가정일에만 전념하도록 할 때가 그러했을 것이고; 그가 고생도 많이 하고 공로도 많은 쑨통위를 타오바오의 총재자리에서 물러나게 할 때도 그러했을 것이며; 그가 자신의 40%지분을 야후에 양도할 때도 그러했을 것이다. 설사 그가 당시에는 의식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2007년 내가 야후에 40%의 지분을 줄 때 나는 알았다. 이렇게 해서 40%를 남이 지배하게 되면, 너는 장래 끝장이라는 것을." 

 

2014년 연초, 마윈은 "뒤엉킴과 아픔은 참여감이다"라는 말로 알리바바전략을 얘기하는 직원들에 대한 공개서신을 끝맺는다. 그와 알리바바집단에 있어서, "뒤엉킴과 아픔"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 것은 2011년부터이다. 2011년 2월 21일, 알리바바의 B2B상장회사는 공고를 내서 동사회는 이미 CEO웨이저와 COO 리쉬휘의 사직청구를 받아들였다고 발표한다. 마윈은 직원에 보내는 공개서신에서 이렇게 말했다: "과거의 1개월여, 나는 아주 고통스러웠다. 아주 마음이 엉켜있었고, 아주 분노했다..." 원인은 마윈이 우연한 기회에 B2B회사 공급상의 일부 체약고객에 사기혐의가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알리바바판매팀의 일부직원도 '묵인하거나 심지어 도와주었다." 이번 사건은 당시에 보기에 알리바바B2B사업이 상장된 후 최대의 이야기꺼리였다. 마윈은 B&Q(百安居)에서 웨이저를 스카우트해서 B2B의 CEO를 맡긴 것은 일찌기 사람들이 성공적인 사례로 입이 닳도록 얘기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왕스(王石)은 필자와 인터뷰를 할 때, 마윈이 웨이저를 기용한 것은 그에게 많은 시사점을 주었다고 말한 바 있다. 다만 지금의 결과는 웨이저가 쫓겨나는 것으로 끝난다.

 

마윈의 해석은 그가 집단의 CEO 겸 창업자로서 이 회사의 가치체계를 지킬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 사건이후, 그는 <중국기업가> 잡지와 인터뷰할 때 이렇게 말한다: "실적과 가치관의 대립,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 나는 회사문화와 사명감의 마지막 보루이다. 만일 네가 나에게 '형님'이라고 부르면 나는 너를 죽이지 않을 수 있다. 이후 얼마나 많은 형제들이 나를 '형님'이라고 부르겠는가. 나는 형님이 아니다." 그의 공개서신에서 그는 감동적으로 말한다: "이 세계는 인터넷기업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돈을 버는 회사가 더 필요하지 않다. 이 세계가 필요오 하는 것은 더욱 개방되고, 더욱 투명하고, 더욱 나누고, 더욱 책임지며, 더욱 글로벌화된 회사이다; 이 세계가 필요로 하는 것은 사회에서 오고, 사회에 봉사하고, 미래 사회에 책임질 수 있는 회사이다...."

 

그 자신은 말했다. 그의 해석을 믿지 않는 사람이 대략 30%를 점할 것이다. 그러나 그후 일련의 사정을 보면 그는 그렇게 자신하지 못했다. 이 1년은 알리바바에게는 재난의 해였다. 그후에 알리페이VIE사건과 타오바오의 '위성(圍城)'사건이 벌어진다. 알리페이 VIE사건에서 비난하는 사람들은 그가 '계약정신'이 없다고 말한다. 심지어 더욱 심하게 그의 이러한 거동은 혼자의 힘으로 중국인터넷회사의 미국자본시장에서의 신뢰기초를 무너뜨렸다고 말한다. '위성'사건에 대하여 그는 자신이 성공하는 기반이 되어준 여러 소상인들을 포기하였다고 지적받았다; 타오바오는 개미군단에 의지하여 성공했다. 다만 B2C의 압력에 직면하여 마윈은 자신이 계속 선전하던 창업자의 책임감을 버렸다는 것이다. 이처럼 매체에서 핫이슈가 된 사건을 제외하고, 마윈이 대외적으로 언급하지 않은 다른 사정도 있다. 그 자신은 이를 '칠상권(七傷拳)'이라고 말한다. 그는 공중여론에 신뢰를 잃고 여러 장소에서 약간의 실망한 견해를 드러낸다. 마지막에는 그가 이렇게 말한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나를 비판하는 것에 신경쓰지 않는다. 흥, 우리는 스스로 기개가 있어야 한다. 우리는 바로 이렇다...다른 사람이 너를 억울하게 만들어도, 만일 네가 옳다면, 시간이 너를 증명해줄 것이다. 만일 네가 잘못했다면 시간도 네가 옳다는 것을 증명해주지 못할 것이다."

 

공중여론의 풍향은 2011년부터 바뀌기 시작한다. 이전에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 2008년에 출판된 책의 서명에는 이런 정서가 반영되어 있다. 이 책의 이름은 <마운교(馬雲敎)>였다. 표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중국에서 하나의 새로운 종교가 이미 탄생했다" 이것은 단지 그가 모르는 상황하에서 그에 대하여 쓴 책중 하나이다. 그의 격려하에, 여러 중국의 젊은이들은 창업의 길로 들어섰다. 그중 일부분의 창업은 타오바오의 쇼핑몰에서 이비지니스로 개점했다. 그는 중국창업붐의 최초 선도자였다. 그의 모든 거동은 찬탄의 목소리를 불러왔다. 비록 어떤 사람은 그와 알리바바의 이야기가 신화화되었다고 말하였고, 의문을 나타내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이들 목소리는 모두 마윈의 거대한 매력이 만들어내는 파도앞에서 무력했다. 그후, 그와 알리바바의 처지는 걸핏하면 욕을 먹는다는 것으로 형용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그와 이 회사의 일처리논리에는 변화가 나타나지 않았지만, 공공여론과 사회정서는 이미 변화했다. 사람들은 한편으로 그와 알리바바의 성공을 선망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일종의 회의적인 눈으로 그와 이 회사의 성공을 주시했다.

 

2011년 2월, 3Q대전이후 텐센트가 조직한 '진단텐센트'에서 한 발언자는 알리바바를 예로 들어 텐센트회사의 사람들에게 말한다:"알리바바는 시종 대외문화수철을 했다. 마윈이 제기한 '신상업문명'이다. 이런 문화는 한편으로 알리바바에 대한 일종의 구속이다. 그의 행위는 '신상업문명'의 틀 안에서 행해져야 한다. 각 자회사와 대외부서도 모두 '신상업문명'의 수칙을 따라야 한다. 기업직원을 잘 단속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일종의 문명수출이면서 그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오피니언리더에게 영향을 미치고, 매체의 견해와 입장에 영향을 미친다." 지금 보면 상황은 역전되엇다. 텐센트는 그의 제품경영문화를 수출한다. 전체 사회에 과학기술, 모바일인터넷, 제품과 인성의 이해를 서넌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 오피니언리더에게 영향을 주고 매체의 견해와 입장에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알리바바는 많은 경우 일종의 '해석할 수 없는' 난감한 처지에 놓인다. 혹은 해명하더라도 즉시 새로운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3

 

2014년 5월 19일, 항저우에는 가랑비가 내렸다. 나는 경항대운하의 가에 있는 한 호텔에서 출발하여, 택시를 타고 원이루(文一路)를 서쪽으로 달렸다. 목적지는 알리바바집단의 시시(西溪)에 있는 본사단지이다. 차가 막히는 틈에 나는 우연히 마윈이 알리바바를 창립할 때의 소재지인 호반화원을 보게 되었다. '호반화원' 네글자는 강남의 몽롱한 안개비와 녹음 속에서 비치공 ㅣㅆ었다. 15년전에 아무도 이곳에서 세계적인 인터넷회사가 탄생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이전의 3일동안, 알리바바집단은 미국SEC에 주식공모설명서를 제출했다. 예상시가총액이 엄청나고 영리능력이 강하여 이미 매체에서 주목하고 있다. 주식공모설명서에서 마윈은 관련사를 통하여 이전에 알리바바가 비행기를 구매했던 일도 널리 언급한다. 한 알리바바의 직원은 이렇게 말한다. 그가 집에 돌아갔을 때, 그의 모친이 그에게 물어보았다: "듣기로 너희 회사는 마윈에게 비행기를 한대 샀다는데 그러냐?" 그가 주식공모설명서에서 드러낸 무사(無私)는 사람들이 언급하는 경우가 드물다. 그중 마윈은 이렇게 약속했다. 그가 투자한 모든 관련사의 수익도 그가 가질 생각이 없다고. 모두 알리바바회사를 위하여 쓰일 것이라고. 알리페이VIE사건의 또 다른 모습도 주식모집설명서에서 드러난다. 마윈은 동사회에 서면약속을 제출했다. 그가 이 샤오웨이금융이라는 신회사에서 점유하는 지분과 누리는 수익은 그가 알리바바집단에서 얻어가는 것을 넘지 않을 것이라고.

 

5월 10일은 이 회사에서 '아리일(阿里日)'이라고 명명한다. 이 날, 알리바바는 모든 알리바바직원의 가족들에게 개방되고, 그들을 회사로 와서 참관하게 초청한다. 그리고 회사의 경영진과 교류한다. 그래하여 회사단지의 입구에는 가족을 접대하는 업무인원이 이전에 이곳에 서 있던 편집적인 창업자를 대체한다. 필자는 일찌기 한 젊은 남자가 비를 맞으며 팻말을 들고 있는 거을 보았는데, 거기에는 그가 프로모션하고자 하는 프로젝트가 쓰여 있었다. 그는 그것이 '마윈과 마화텅의 마음을 움직일 것'이라고 보증했다. 또 다른 한 사람은 그가 마윈을 도와 텐센트의 웨이신(위챗)을 이길 수 있다고 보증했다.

 

이 부지면적이 26만평방미터인 회사단지는 알리바바가 탄생할 때 소재했던 호반화원지구의 전체 면적보다도 넓다. 주건축은 저명한 일본건축가 쿠마 겐코(硏吾)가 설계했다. 회사부지는 공원처럼 자신의 호수와 습지를 가지고 있다. 호수 가운데에는 마윈이 보낸 흰거위가 있다. 그곳은 생활구역처럼 서점과 커피숍도 있다.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사고 싶으면최소한 10분이상 줄을 서야 한다. 동시에 그곳은 대학처럼 서로 경쟁하는 식당이 있다. 그곳은 적지 않은 알리바바 직원들이 자부심을 느끼는 곳이다. 다만 동시에 어떤 직원들은 이 방대한 부지는 이 회사를 너무나 대기업처럼 보이게 한다고 여긴다.

 

이날 전체 부지의 사방에는 아리일과 관련된 그림과 표어가 걸려 있다. 거기에는 미팅과 업무체험을 포함한 활동이 가족과 직원의 참여를 독려한다. 일찌기 쌍십일발표회의 보고회장내에 알리바바직원의 가장과 아이들이 모인 적이 있다. 아이들은 시끄럽게 떠들며 서로 올라가서 공연하려고 했다. 알리바바의 경영진들은 이곳에 와서 직원가족들과 교류했고, 자신의 아이가 만릴 결혼하면 내년 집단혼례에 참석할 수 있는지등의 문제에 시원스럽게 대답해주었다. 2014년의 집단혼례는 신청인수가 너무 많아서, 모든 신혼알리바바직원이 참여할 수는 없었다. 정오에 가까워 올 때, 원래 알리바바직원의 가족과 만나기로 되어 있던 CEO 루자오시가 나타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반드시 마윈과 함께 한 중요한 고객을 만나야 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문앞에 서 있던 알리바바직원은 모든 여성에게 꽃을 하나씩 선물했다. 알리바바의 경영진들은 정오에 식당에서 사람들과 같이 식사한다. 직원카드를 지닌 젊고 긴머리의 아가씨는 바깥으로 걸어나가면서 부친에게 설명한다. 예전에 알리바바의 거의 모든 경영진이 나와서 동료들의 가장을 만났다고. 다만 오늘의 상황은 실로 너무나 많이 바뀌었다고. 왜나하면 알리ㅣ바바는 중국최대의 상장회사가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설사 마윈이 항상 람하는 일라바바플랫폼과 관련한 취업인구는 고려하지 않더라도, 눈앞의 사람들만으로도 사람들은 이 회사에 대한 느낌을 알 수 있다. 알리바바는 이미 사람들이 일하고 싶어하는 회사이다. 최근 몇년간 이 회사는 이미 정치가에서 보통사람들까지 모두 관심을 가지는 대상이 되었다. 두 명의 중국총리를 포함한 사람들이 마윈과 알리바바에 자신의 여러 약속을 얘기했다. 이것은 이미 15년전 창업때 아무도 알지 못하던 그 중국의 비지니스세계를 바꾸겠다는 환상을 품은 작은 인터넷회사가 아닌 것이다.

 

BAT는 매체에서 알리바바를 포함한 3개의 인터넷거두를 약칭하는 것이다. 이 3개의 기업은 각자의 분야에서 거대한 경쟁력을 지니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독점'이라고 부른다. 비록 3 회사는 모두 그런 칭호에 반대하지만. 바이두는 검색, 텐센트는 사교, 알리바바는 이비지니스. 그중 텐센트와 알리바바의 시가총액은 이미 1000억달러를 넘어섰다. 이 3개기업은 2013년에 인수합병을 대거 진행하여 매체의 주목을 받는다. 그들은 모두 이전의 우세분야를 뛰어넘어,인터넷과 모바일인터넷에서 다른 업무로 뛰어들었다. 지도, 음악, 동영상, 모바일게임....2013년 연말부터 디디와 콰이디 택시잡기앱은 '돈을 펑펑 쓰면서' 싸웠다. 이것은 바로 이 경쟁이 얼마나 치열한지 보여주는 것이다. 만일 자세히 이 세 개회사를 본다면, 인터넷기자는 발견할 것이다. 5년전과는 이미 크게 달라졌다는 것을. 변화가 너무 빠르다. 마윈 자신도 말했다. 현재는 이미 더 이상 알리바바른 단순히 이비지니스회사로 보면 안된다고.

 

웨이신의 중요성은 이미 많은 언론에서 언급했다. 그것은 킬러급의 혹은  국민급의 앱이다. 마와텅은 2013년 베이징의 글로벌모바일인터넷대회 현장에서 CCTV <대화>프로그램과의 인터뷰에서 만일 웨이신이 없었다면, 텐센트는 모바일인터넷붐이 일었을 때 등에 식은 땀을 흘렸을 것이라고 말했다. 웨이신의 힘을 빌어, 텐센트는 모바일이비지니스와 모바일지급에서 새로 여지를 남겼다는 것이다. 그것은 알리바바의 최대경쟁상대방으로 칭해진다. 왜냐하면 이비지니스와 인터넷금융은 알리바바가 깊이 발을 담그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마윈이 지난번 공개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베이징대학에서 주최한 알리바바기술포럼에서였다. 포럼에서, 그는 말했다. 위어바오를 포함한 인터넷금융혁신으로 알리바바는 이전에 독점으로 보이던 국유은행의 금융서비스를 하게 되었다. 그는 텐센트가 웨이신으로 마찬가지로 국유통신회사들이 독점하는 분야에 뛰어들기를 바란다고. 다만 텐센트는 알리바바의 뒤를 쫓았다.

 

당연히, 외부관찰의 각도에서 텐센트에 대하여 말하자면, 가장 이성적인 방식은 당연히 시장의산물인 알리바바와 같이 노는 것이다. 3대 이동통신업체에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 국유상업은행이 위어바오를대하는 태도와 반응을 보면서 판단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관리감독기관이 영향을 주는 대형금융기관을 건드리는 것은 위험하다.

 

비록 7일 연간환산수익률이 이미 5% 밑으로 떨어졌지만, 그리고 그것이 혁신성이 있는지에 대하여는 의문이지만, 위어바오는 의문의 여지없이 2013년의 연도제품이다. 그것이 출현한 것은 이전에 알리페이의 CEO 펑레이가 필자와 얘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말했던 인터넷금융의 특징이다. 개방과 평등. 이전의 금융이재서비스는 일정한 금액의 진입장벽을 가지고 있었다. 동시에 환매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인터넷금융서비스제품으로서, 위어바오는 실시간으로 환매할 수 있다. 동시에 어떤 금액이든 구매할 수 있다. 그것의 성공은 이재서비스를 사용하지 않던 중국인들에게 이재서비스를 사용하게 만들었다. 당연히 위어바오를 통하거나 혹은 다른 인터넷회사의 위어바오에 유사한 서비스를 통하여. 

 

확실히 더 이상 알리바바를 간단하게 이비지니스회사라고 말하기는 힘들어졌다. 왜냐하면 알리페이VIE사건으로 분할된 샤오웨이금융은 미래에 아마도 새로운 금융거두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알리바바집단이 큰 돈을 들여 인수한 오락문화류의 회사와 그 하드웨어인 텐마오모허(天猫魔盒)는 이 회사를 거실을 노리는 자들의 행열에 가담시켰다. 물류네트워크에 뜻을 둔 차이냐오, 긜고 마윈이 연초에 공개서신에서 언급한 '클라우드' 와 '터미널'' 이것들은 모두 이 회사가 전파하고자 하는 새로운 상상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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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윈이 최근에 모습을 나타낸 것은 난닝이다. 중국기업가구락부의 회원으로서, 그는 류촨즈, 왕스를 포함한 다른 이사들과 함께 1년에 1번있는 그린회사연차총회(綠公社年會)에 참석했다. 지난해는 쿤밍이었고, 왕중쥔이 주재한 마윈의 저녁강연 '천마행공(天馬行空)'은 연차총회에서 가장 환영받는 행사가 되었다. 그는 방청석의 창업자들로부터 어떻게 파트너충돌을 처리할 지, 가족기업의 후계문제에서 창업자가 이성관계를 처리하는 문제까지 대답했다. 다만 이번에는 그가 극력 사양하였다. 결국 그는 1시간이내의 비공개회의를 어레인지했다. 참가자는 20명가량이고, 류촨즈, 선궈쥔, 리롄제와 장시페이등이 포함된다.

 

알리바바가 미국상장을 선포한 후, 마윈은 더욱 매체가 있는 장소에 공개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회피했다. 그는 말했다. 회사의 변호사는 무수한 이메일을 그에게 보내어 '외부에서 함부로 말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고. 다만 그가 나타났을 때의 모여드는 사람의 수와 비공개포럼에 들어가고 싶어하는 사람의 수가 많은 것을 보면 여전히 그의 스타같은 호소력을 엿볼 수 있다.

 

나중에 그와 얘기를 하면서, 그는 필자에게 그가 생각하는 알리바바의 비지니스세계에 대한 공헌을 얘기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만일 구글이 기술의 영역을 개척한다면, 우리는 기술을 가지고 비지니스의 영역을 개척한다. 우리가 하는 작용은 중국사회를 진정한 상업사회로 이끄는 것이다. 현재는 비록 중국이 이미 상업사회로 들어섯지만, 우리의 많은 생각은 여전히 농업사회의 사고방식이다."

 

그는 이전에 여러 장소에서 말했던 것을 반복했다. 즉 그는 상인들이 중국에서 존경받는 직업이 되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2013년 그는 알리바바집단의 CEO를 시작한다고 선언하는 강연에서 큰 소리로 말했다: 나는 내가 상인인 것이 자랑스럽다. "모두 현재는 역시 상인을 무시하지만, 상인은 진정 효율적인 자원배분자이다." 

 

"내 생각에 알리바바가 만일 중국사회에 약간의 공헌이 있다면, 우리는 중국사회가 계약을 중시하고, 사회자원의 효율적인 분배를 중시하고, 인류의 혁신, 창조력의 계발을 주시하는 단계로 들어갈 것을 희망한다. 우리는 이 방면에서 노력해야 한다." 마윈의 말이다.

 

설사 상장이후 알리바바집단의 미래를 고려하지 않더라도, 이 회사는 전체 중국의 상업세계에 대한 공헌이 무시될 수 없다. 타오바오는 소수의 진정 사람의 생활을 바꿔놓은 회사이다. 이전에 알리바바가 반복적으로 선전한 바와 같이 타오바오는 회사의 취업과 창업에 엄청난 공헌을 했다는 것이 과장된 말이 아니다. 그것의 상업문화상의 공헌은 알리바바집단이 창조한 취업기회처럼 인상이 깊지 않을 것이다. 다만 부드럽게 영향을 미쳤다. 비판자들이 얘기하는 것처럼 '도덕적 고지'인지는 불문하고. 상당한 기간동안 마윈이 입에 달고 살았던 '신상업문화'와 '신뢰'는 확실히 이 나라에 필요한 것이다.

 

만일 오늘날의 안목으로 본다면, 알리바바는 이미 감탄할만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성공한 것을 해석하는데, 외부상업관찰자가 분석한 각종 원인인 마윈 본인의 지도력, 운, 자본의 도움, 중국성장의 수혜, 상업모델 이외에, 마윈 본인의 해석도 이치에 맞는다. 그는 말했다. 오늘 이 시대에 한 회사가 성공하려면, 사회의 문제를 해결해주어야 한다.

 

마윈은 말했다. 2014년는 알리바바에게 큰 의미가 있는 해이다. 곧 공개상장되면 이 회사는 전세계의 눈길을 받게 될 것이다. 이 회사에 흥미를 지닌 모든 사람은 투자자에서 매체기자까지, 모두 공개적인 재무수치를 볼 수 있고, 운영정보를 볼 수 있다. 그후에 자신의 평론을 달 수 있다. 이것은 대기업과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기업으로서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실제로 이 회사를 운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애를 먹게 되는지는 불문하고.

 

이것은 단지 상장이 가져올 변화의 일부분이다. 이 회사는 더 많은 변화로 인한 도전을 겪게 될 것이다. 적지 않은 알리바바직원들은 상장을 통하여 큰 돈을 가지게 된 후, 그들이 이전처럼 전력을 다하여 일을 할 것인가? 알리바바집단의 COO 장용은 말했다. 상장은 팀원의 심리상태에 미치는 영향이 아주 크다. '부가 가져올 직원간의 관계변화 그리고 이로 인한 타성'. 

 

또 다른 문제도 있다. 모든 대기업이 직면하는 도전이다. 마윈과 플랫폼으로서의 알리바바가 얼마나 소기업을 찬양하더라도, 이 회사는 이미 대기업이다. 필자를 포함한 많은 살마들은 이전의 쿨한 것이 그립다. 경영학의 대가인 크리스텐센이 말한 "혁신자의 딜레마"이론이다. 바로 이렇게 성공한 대기업을 위한 말이다. 그가 얘기하는 대기업이 어떻게 기존의 성공으로 파괴적인 혁신을 회피하게 되는지 말한다. 이 회사의 경영진은 이미 이 문제를 인식한 것같다. 그들은 과감하게 타오바오를 분할하여 회사를 '소형화'시켰다. 당연히 마윈의 일관된 논리는 그가 여전히 사람과 문화에서 시작하여 이런 숙명적인 딜레마를 해결한다는 것이다. 어찌되었건, 미래에 우리같은 외부관찰자들은 이들이 과연 성공할지를 흥미를 가지고 비켜본 것이다.

 

이 모든 것은 급속히 변화하는 시대에 위대한 기업으로 되고자 하는 중국기업의 노력이다. 마윈의 말을 빌리면, 그들이 직면한 도전은 이전에 책에 쓰여있지 않지만 진실로 발생하는 문제이다. 그리고, 단지 알리바바 한 회사가 직면하는 문제는 아니다. 왜냐하면 비지니스의 경계가 이렇게 모호한 적이 없었다. 비지니스가 이처럼 밀접하게 사람의 생활에 가까워진 적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