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정만군(程萬軍)
일본수상 아베는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한 후, 다시 일본의 심장 신도의 성지인 이세신궁(伊勢神宮)을 참배했다. 그는 이번 신년담화에서 상징적으로 중국한국에 '선의'를 얘기했을 뿐, 바로 헌법개정의 결심을 드러낸다. 이와 거의 동시에 내각에서는 "비군(備軍)" 대계를 선포한다: 일본의 주변에 있는 수백개의 '무인도서'를 국유화하고, 이도'기동단', 예비부대을 확충하며, 예비역민병의 군수물자를 어떻게 배급할 것인지에 대한 것도 분명하게 계획하고 있다.
이를 보면, 이번 일본정치강자는 마음을 굳힌 것같다. 일본을 이끌고 '부국강병'을 하겠다는 것이다. 일본은 아베내각집권기에 다시 한번 '역사적 대변신'을 시도하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일본은 여러번의 '대변신'을 완성한 바 있다. 아베가 죽어도 해내겠다는 일은 역사에 사례가 없는 것이 아니다. 고금의 역사를 살펴보면, 일본의 매번 '대변신'은 반드시 중국과 부닥쳤다. 이것은 그의 또다른 역사의 법칙이 된 듯하다.
왜 이렇게 말할 수 있는가? 역사적 사실이 그렇게 증명하고 있다.
원시생낭념(元時生狼念), 명시기도심(明時起盜心). 원나라때는 이리의 마음을 가졌고, 명나라때는 도둑의 마음을 가졌다. 그러나, '숙원을 이룬 것(夙願以償)"은 청나라때이다. 이것이 바로 "왕사월천년(往事越千年)" 가운데 일본이 중국을 향해 완성한 "삼단뛰기"이다.
양송(兩宋)이 멸망하기 전에, 중국은 일본의 모범이었다. 일본은 한,당문화를 아주 숭배했고, 송나라문화에 대하여도 숭배해왔다. 북송시기에, 일본여자는 중국남자로부터 씨를 받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기도 했다고 한다. 남송이 멸망한 후, 일본은 '화하육침(華夏陸沈)'에 대하여 거국적으로 애도했고, 전체 인민이 상복을 입고 서쪽을 향해 삼일간 무릎을 꾾고 있었다.
그때의 중국에 대하여 일본은 모범이 무너진 유감이외에 하나가 사라지면 다른 하나가 자란다는 심리적인 전환점이 되기도 했다. 쿠빌라이가 송나라를 멸망시킨 후, 전선을 몰아서 일본을 공격한다. "카미카제(神風)"의 힘을 빌어(기실은 태풍), 일본은 두번에 걸쳐 몽골원정군을 물리친다. 항원을 통하여, 일본은 초원제국 및 아시아대륙군대를 이겼다는 자부심을 갖게 된다. 몽골제국이 중국도 멸망시켰는데, 몽골원정군은 일본에게 패배한다. 그렇다면 일본이 중국을 통치하지 못할 이유도 없지 않은가?
이것은 일본의 제1차 역사적 변신이라고 할 수 있다.
백년이 지난 후, 비록 주원장이 한인을 이끌고 명나라를 건국하는데 성공했지만, 명왕조는 일본인들의 눈에 이미 '정통의 지위'를 상실했다. 대명의 문명은 더 이상 그들이 숭상하던 정통 화하문명이 아니었다. 그들은 망국이후의 화하는 이미 순수하지 못하다고 여겼고, 그저 그들을 자신들이 대체할 수 있다고 여긴다.
명나라때 일본은 비록 중국과 내왕이 빈번한 국가중 하나였지만, 목적은 이미 달라졌다. 문화와 제도를 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직접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 이때의 일본은 처음으로 중국의 해상에서 강도짓을 한 국가가 된다. 방화약탈의 왜구는 비록 대부분이 일본낭인이기는 하지만, 일본정부도 대다수의 경우 본체만체 했다. 또한 명나라정부의 소탕작전에 협조해주지 않았다. 원인은 그들이 대명정부를 무시했기 때문이다. 뼛속으로부터 대명정부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 명나라는 일본의 복속을 받아내지 못했는가?
화하정통에 대한 이견이 나타난 것 이외에, 관건은 일본이 명나라에 대한 정치적 존경을 잃었다는 것이다. 종합국력을 차치하고, 정치만 놓고 볼 때, 조선을 제외하고 더 이상 어느 국가도 명나라로부터 배우려 하지 않았다. 일본은 성당(盛唐)때의 중국정치에 경의를 품고 있었다.그러나 명나라인 중국의 정치에 대하여는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오늘날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수당은 일본에 있다." 다만, "명나라는 기껏해야 한국에만 있다."
일본이 명나라의 정치에 대한 경의를 잃었으므로 '복기(服氣)'라는 두 글자가 그들의 마음 속에서 생겨날 리가 없다. 대명때 일본의 막부장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일찌기 중국에 국서를 보낸 바 있는데, 그의 말은 광망했다. 심지어 일본이 대명을 대체하여 중화의 정통이 될 수 있다고도 말했다. 1592년, 중국을 대체하여 동방을 통치하려는 야심을 실현하기 위하여, 일본을 통일한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전략을 채용하여 군대를 몰아 조선으로 쳐들어간다. 조선의 요구에 따라, 명정부는 파병하여 '항일원조'한다. 비록 명군이 여러번 증원되고, 이씨황실을 도와주어,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끌었지만, 일본의 중국에 도전하려는 야심은 드러내놓고 떠들게 되었다.
이것은 일본의 제2차 역사적 변신이다.
중일양국의 역량을 비교하면 19세기에는 큰 변화가 발생하지 않았다. 이때의 시국은 이미 몽골의 중국이 일본을 정벌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일본이 중국을 정복하는 것이 정식 일정표에 들어가게 된다.
이것은 먼저 세계국면이 중대하게 변화하였기 때문이다. 초원제국은 날로 쇠쾨하고, 해양국가가 세계를 넘겨받았다.
19세기 중엽, 즉 1840년 중국과 영국의 아편전쟁이 발생했을 때, 중국인은 마침내 '천조(天朝)'의 천적은 초원에서 해양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실감한다. 천조인들은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다. 천조의 천적이 멀리 바다 너머에 있는 서양이 아니라, 가까이 지척에 있는 동양(일본을 가리킴)이 될 줄이야. 자그마한 해양의 섬나라 일본이 권토중래한 것이다. 19세기 하반기부터, 서방문명의 세례와 메이지유신을 거친 일본은 마침내 중국의 제일 외환(外患)이 된다. "초원민족의 낭도(狼道)"에 '해양국가의 신문명"을 더하여 '이때의 일본은 그때의 일본이 아니었다" 갑오청일전쟁에서 일본은 마침내 승리하고, 영국을 대체하여 청나라의 '준종주국'이 된다.
이제 일본은 사상유례없는 제3차 역사적 변신을 완성했다.
중국의 각도에서 보면, 일본의 3차에 걸친 역사적 번신중 앞의 두번은 중국에 주는 느낌이 심도있지 않았다. 그러나 제3차는 중국에 거의 '최고랍후(摧枯拉朽)"의 영향을 미친다.
청일전쟁이 끝난 후, 중국은 진정으로 "천년동안 없었던 대변국"에 들어간다. 이천년의 고령으로도 아직 죽지 않았던 중국의 봉건정치제도는 청일전쟁으로 흔들린다. 만일 영국인이 일으킨 아편전쟁이 청나라사람들을 정신차리게 만들지 못했다면, 청일전쟁은 늙은 제국의 얼굴가리개를 철저히 찢어버렸다. 청일전쟁의 참패로 인하여, 중국의 조야상하는 성직으로 부국강병의 근본에 직면하게 된다. 정치체제라는 이 '넘을 수 없는 도랑'을.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청일전쟁이 없었더라면, 무술변법도 없었고, 나중에 중국청년들의 '일본유학붐'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일본유학생이 주력이 되어 동경을 본부로 하여, 중국의 2천년에 걸친 봉건황제체제를 무너드리는 신해혁명도 없었을 것이라고. 이것은 일본이 3차에 걸쳐 중국과 부닥치면서, 중국에 유일하게 한번의 '역변신'을 가져온 것이다. 실로 "통정사통(痛定思痛), 지치후용(知恥後勇)"이다.
오늘날의 일본의 '날씬한 몸매"는 태평양전쟁의 '대변신미수'를 겪은 후 미국에 의하며 만들어졌다. 다만 아베는 '풍만한 일본의 몸매'를 원한다. 그래서 다시 한번 역사적 대변신을 하고자 한다. 다만 미국과 부닥치지 않고, 여전히 그들의 조상과 마찬가지로 중국과 부닥치려 한다. 그 원인은 의미심장하다. 오늘날 중국은 아베의 눈에 원나라일까? 명나라일까, 아니면 청나라일까? 분명한 것은 그가 절대로 오늘날의 중국을 그들 조상이 숭배하던 문명의 스승 성당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오만하고 이렇게 야심차고 경외하는 마음이 전혀 없을 수는 없다. 이런 아베에 대하여, 이런 일본정부에 대하여, 중국은 "부전이굴지(不戰而屈之)"의 환상을 품어서는 안된다. 더더구나 "아배의 군사행동을 저지"하는 것을 국제사회에 맡겨서도 안된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스스로 강한 자는 외부의 강함을 두려워하지 않는 법이다. 일본의 이번 막을수없는 기세의 역사적 대변신에서 중국이 표적이 될 것인가 아니면 종결자가 될 것인가. 이것은 완전히 '실력 대 실력'의 자신의 자질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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