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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분석/중국역사의 철칙

골치아픈 권력승계

by 중은우시 2009. 9. 11.

글: 후양방(侯楊方)

 

하남 영보(靈寶)에는 높은 대(臺)가 하나 있는데, 이름이 "귀래망사대(歸來望思臺)"이다. 이것은 한무제가 만든 것이다. 만년의 한무제는 이 대에 서서 눈물을 흘리면서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생각하곤 했다. 한무제의 나이가 이립(而立, 30)에 그가 사랑하는 위자부와의 사이에 첫번째 아들 유거(劉據)를 낳는다. 한무제는 그를 아주 좋아하고, 위자부는 이로 인하여 황후에 오른다. 이 적장자는 나이 7살 때 순조롭게 태자로 봉해진다.

 

행운이면서 불행인 점은 한무제가 역사에 보기드문 장수황제라는 것이다. 재위기간이 54년에 이르렀다. 일찌기 사랑했던 위자부도 점차 나이가 들어가고, 한무제는 새로이 총애하는 여자가 생겼다. 위자부는 황후라는 고귀한 자리에 있지만, 황제를 자주 만나볼 수가 없었다. 태자의 외삼촌이자 대장군인 위청(衛靑)이 사망한 후, 태자는 정치적인 배경을 잃게 된다. 태자가 성년이 되면서, 부자간에는 의견차이가 나타난다. 한무제는 사치를 좋아하고 하고싶은대로 했다. 토목공사를 대거 벌이며, 사방을 유람했다. 거기에 정벌도 계속했다. 백성들은 피폐해가고, 국가재정도 붕괴직전이었다. 태자는 이에 대하여 아주 불만이었다. 그리하여 부친과 여러차례 논쟁을 벌인다. 부자간에 점차 거리가 생겨나고, 앙금이 점차 남게 된다. 나이 육십을 넘긴 한무제는 다시 나이 겨우 십여세의 어린 여자를 좋아해서 다시 아들을 낳는다. 만년에 아들을 얻은 한무제는 불릉(弗陵)이라고 이름붙인 어린 아들을 아주 좋아하게 된다. 심지어 그 모친이 거주하는 곳을 "요모문(堯母門)"이라고 이름붙인다. 요임금은 중국상고의 제왕이다. 그러니, 태자로서는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혹시 부친은 자신을 폐하고 어린 동생을 태자로 삼으려는 것은 아닐까?

 

태자폐위는 리스크가 크고 수익도 큰 정치투기이다. 자연히 일부 투기꾼들은 정세를 관망하게 된다. 강충(江充)도 그 중의 한 명이다. 그는 태자와 갈등이 있었으므로, 태자가 승계한 후에 자신을 처벌할까 두려웠다. 그리하여 태자를 폐위시키는 것이 그에게는 큰 이익이었다. 기회가 왔다. 만년의 한무제는 장생불사만 생각했고, 동시에 누군가가 그를 해칠까봐 전전긍긍했다. 그리하여 스스로 폐쇄된 곳에서 살면서 바깥 나들이도 잘 하지 않았다. 태자, 대신들과의 연락도 강충과 같은 지위가 낮지만 권한을 장악한 측근신하를 통해서 진행했다. 강충은 태자와 황후가 '무고(巫蠱)"라는 사술고 황제를 모해하고 저주했다고 모함했다. 병에 시달리던 한무제는 이를 경신하고 강충에게 조사할 것을 지시한다. 태자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강충을 살해한다. 그리고 환관으로부터 모반했다는 모함을 받자, 할 수 없이 무력으로 항거하다 결국은 자결을 한다. 나중에 한무제는 사건의 진상을 알게 된다. 후회막급이었다. 그리하여 태자가 자살한 곳에 "귀래망사대"를 만든 것이다.

 

시간이 1700여년을 흘러, 북중국의 어느 밤, 어느 장봉(帳蓬)에서, 한 노인이 통곡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문서 한장을 읽고 있다. 그의 주위에는 많은 사람들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이 노인은 중국역사상 또 하나의 웅재대략의 황제 강희였다. 그는 태자폐위의 조서를 읽는 중이었다. 다 읽은 후에 그는 혼절하고 만다. 이어서 육일 밤낮을 고통 속에서 잠을 이루지 못한다. 이어서 중풍이 오고 오른쪽 반신불수가 된다. 삼십여년동안 길러온 희망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된 것이다. 이때 강희는 만년에 접어들었고, 황위계승문제는 초미의 급선무였다.

 

태자 윤잉은 강희의 적장자이다. 황후 허서리씨는 난산으로 죽는다. 그리하여 강희는 그를 더욱 아낀다. 막 한 살이 된 그를 태자로 봉하고, 강희는 매일 친히 나이어린 태자에게 사서 오경을 읽어준다. 그 후에 치국의 도리도 가르친다. 그를 데리고 시찰도 함께 가고 백성을 생활도 보살핀다. 황태자가 6살때 정식으로 공부를 시작하는데, 강희는 여러 명의 유명한 유학자들을 불러서 그의 스승이 되게 한다. 그도 부친의 실망시키지 않았다. 선천적으로 총명하여 진보가 현저했다. 만주어 한문에 능통하고, 활쏘고 말타는데 능숙했다. 강희가 여러번 출정하거나 외출할 때, 태자로 하여금 경사를 지키게 했고, 정무를 전권을 가지고 처리하게 했다. 신하들은 상하 모두 태자를 칭찬했다. 강희제도 기뻐마지않았다. 태자에 대하여, "정무를 처리하는 것이 태산처럼 단단하다. 그래서 짐이 변방에 나가 있어도 마음이 편안하고, 일때문에 머리아프지 않고 여러 날을 편안히 지낼 수 있다" 태자에 대하여는 아주 성실하고 효성이 있다고 생각했고, 대단한 인재로 보았다. 강희제는 아주 좋아하면서 만족했고, 강산을 그에게 맡길 수 있다고 보았다.

 

강희제도 마찬가지로 장수황제였다. 재위기간은 중국최고기록을 세운다. 62년에 달한다. 윤잉은 이미 유아에서 소년이 되고, 소년에서 청년이 되고, 청년에서 중년이 되었다. 꼬박 30여년을 태자로 있었다. 그러다보니 불만이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고금이래로 태자를 40년하는 경우가 어디 있단 말인가. 아마도 태자로 있었던 기간이 너무 길어서인지, 거기다 강희의 총애로 교만방자해진 것인지, 아무런 구속을 받지 않는 태자는 제마음대로였다. 자주 신하로부터 재물을 빼앗고, 공물을 가로채고, 귀족, 대신을 두들겨 팼다. 심지어 마음대로 사람을 죽이기도 하였다. 강희제가 더더욱 실망한 것은 태자가 부친이나 형제가 병이 들었을 때도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어려서 부모를 모두 잃고 가족간의 정을 중시하던 강희에게는 큰 불만사항이었다. 그러나 강희는 이런 불만을 20년간 참아왔고, 최대한의 인내심으로 태자를 포용했다. 이 과정에서 태자는 점점 자신의 태자당을 형성한다. 당대 대학사 소어투(索額圖)가 우두머리였다. 태자는 미래의 황제이다. 태자에게 투자하여 큰 보답을 노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태자당의 요구와 강희의 종용하에, 태자의 대우는 황제와 같아졌다. 권력도 갈수록 커져서 황권을 위협할 지경에 이르렀다. 강희47년 황제가 순행을 나가는데, 태자는 밤에 강희의 천막에 구멍을 뚫고 엿보았다. 그리하여 자신이 피살되고 황위를 찬탈당할 수도 있다고 걱정하는 지경에 이른다. 강희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게 된다. 그리하여 여러 신하들 앞에서 태자를 폐위하고 그를 연금시킨다. 강희의 남아있는 세월동안 그는 황위계승문제로 골치를 앓았다. 그후 태자를 복위시켰다가 다시 폐위시킨다. 여러 황자들도 무리를 지어 황위를 노린다. 그는 자신이 아들들에게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고 걱정하였다. 일세영웅인 노황제는 아들들 때문에 고통스럽고 절망적인 말년을 보내게 된 것이다.

 

인치시대에 국가지도자는 민중이 선거로 뽑는 것이 아니었다. 전대 지도자가 뽑는 것이다. 혈연관계는 인선의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혈연은 계승이 순조롭고 무난하게 해주었다. 권력계승의 분쟁과 리스크를 최소화해주었다. 이것은 바로 고금중외의 인치국가들이 모두 약속이나 한 듯이 혈연계승원칙을 채택했는지를 말해준다. 왜냐하면 그것이 인치사회의 가장 합리적인 계승제도였기 때문이다. 비록 중국역사상 선양이라는 전설, 즉 재능을 가지고 선택하고 혈연관계를 가지고 선택하지 않았다는 것이 있기는 하지만, 역사의 진상은 아마도 <<죽서기년>>에 기로한 바와 같이 "순수요(舜囚堯, 순이 요를 가두었다)"일 것이지, 후세에 덧칠한 바와 같이 따스한 정이 흐르는 선양은 아니었을 것이다. 비록 가족이라 하더라도, 권력승계중이 문제가 발생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심지어 칼을 뽑아드는 경우도 있다. 부자간, 형제간에 황위를 놓고 서로 죽인 사건은 역사에 드물지 않다. 한무제, 강희는 모두 중국역사상 걸출한 정치가이고, 영명과단, 웅재대략, 문치무공으로 천고에 이름을 남긴 황제들이다. 그들조차도 부자간의 권력승계문제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피차간에 혈연이 없는 외인간에는 누가 있어서 감히 한무제, 강희보다도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권력승계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혈연의 계승이 없으면, 인치시대에는 폭력적인 권력교체가 일어나기 쉬웠다. 그리고 권력투쟁의 쌍방은 왕왕 정치적 견해가 달랐다는 겉옷으로 적나라한 핵심을 포장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고위층의 권력투쟁이 사회로 파급되고, 평민백성이 투쟁의 말이 되어 희생당하게 된다. 혈연계승의 군주제는 더 이상 회복될 수 없다. 그러므로, 문명국가는 법치의 경로를 통하여, 민중이 각급정부를 선거하여야, 권력교체의 비용과 리스크를 최소화할 수 있고, 권력투쟁의 화가 민중과 국가에 미치지 않게 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