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공통)

장당취한(贓唐臭漢)이라는 말은 왜 나왔는가?

중은우시 2014. 1. 15. 00:10

글: 혜룡(惠龍) 

 

<홍루몽>을 읽은 사람은 모두 기억할 것이다. 책에서 초대(焦大)가 장당(贓唐)을 욕한다: "배회(扒灰)할 자는 배회하고, 양소숙자(養小叔子)할 자는 양소숙자한다" '배회'는 당연히 당현종(唐玄宗)이 첫 손 꼽힌다. 양소숙자한 자도 있다. 안락공주(安樂公主)가 그 예이다. 그외에 이치(李治)는 자신의 서로 무측천을 차지하고, 이세민(李世民)은 자신의 제수인 소자왕비(巢刺王妃)를 빼앗는다. 동창공주(同昌公主)의 모친 곽숙비(郭淑妃)는 자신의 사위와 잤다. 이와 비교하면 고양공주(高陽公主)가 '스님을 유혹한' 거동은 비교적 '고상'한 것이다. 최소한 난륜은 아니다.

 

"한황중색(漢皇重色)"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전혀 정확하지 않다. 당현종은 비록 초기에는 영명신무(英明神武)의 군주이고, 한 손으로 대당제국을 최고수준의 개원성세(開元盛世)를 창립했다. 다만 그는 계속하여 아주 호색했다. 당현종의 궁안에 비빈이 아주 많았다. <개원천보유집>의 기록에 따르면, 그의 후궁중 일찌기 "금전을 던져 도박하여 황제의 시침을 했다."는 내용이 있다. 그 뜻은 돈을 든져 도박하여, 누구든지 이기면 이긴 후궁이 당현종과 잠을 잤다. 마치 김용소설 <녹정기>의 위소보 집안의 방식과 유사하다.

 

그러나 얼마후, 당현종은 무혜비(武惠妃)에게 빠지면서, 이 법도는 없어진다. 무혜비도 무측천과 같은 일족의 여인이다. 아마도 무씨집안은 미공(媚功)에 가전절학이 있었는가보다. 이씨잡안 사람들을 하나하나 모두 정신못차리게 만들었으니, 역사는 반복되는 것같다. 당현종의 본부인은 성이 왕(王)씨이다. 이 왕황후는 당고종의 왕황후와 같이 아들을 낳지 못했다. 그래서 한마음 한뜻으로 무혜비에 빠져있던 당현종은 기회를 보아 이 가련한 왕황후를 폐위시킨다. 그녀는 완전히 절망하여, 3개월도 되지 않아 외로이 아무도 찾는 이 없는 냉궁에서 죽는다.

 

당현종은 원래 무혜비를 황후로 세우고자 했었다. 그러나 대신들이 일찌감치 경계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무측천의 이야기가 재연될까봐 겁을 냈다. 그래서 극력 반대한다. 당현종은 당시까지는 아직 혼용의 지경에는 이르지 않았다. 황후를 세우는 일은 잠시 포기한다. 다만 암중으로 무혜비의 궁중에서의 대우는 황후보다 나으면 나았지 못하지 않았다. 무혜비가 낳은 아들이 바로 수왕(壽王) 이모(李瑁)이다. 수왕 이모를 태자로 삼기 위하여, 무혜비와 간상(奸相) 이임보(李林甫)의 교사하에, 당현종은 다시 자신의 세 아들을 죽인다. 생각지 못하게 무혜비는 이 나쁜 짓을 한 후에 돌연 병이 들어, 병석에서 그녀는 자주 죽어간 3명의 황자가 나타나서 목숨을 내놓으라고 하는 환상을 본다. 얼마후 그녀는 죽어버린다. 당현종은 수왕 이모에 대하여는 그다지 감정이 없었다. 그저 무혜비때문에 총애했던 것이었다. 지금 무혜비가 죽었다. 사람이 죽으면 차도 식는 법이다. 그를 태자로 세우지 않았을 뿐아니라, 오히려 그의 부인 양옥환(楊玉環)을 빼앗아 오기까지 한다. 이 수왕은 멍청하기 그지없는 자였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당현종은 황제의 귀한 몸으로 천하의 미녀는 원하는대로 다 얻을 수 있다. 왜 하필이면 후안무치하게 자신의 며느리를 빼앗았을까? 이것은 아마도 남자들의 천한 근성일 것이다. "처는 첩만 못하고, 첩은 기녀만 못하고, 기녀는 남의 여자만 못하다." 천하의 어떤 여인이든 당현종이 다 원하면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의 며느리는 건드릴 수 없는 여자(禁臠)이다. 한 친구가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그 친구는 옷벗기마작을 하는데 재미를 붙였는데, 시간과 힘을 들여서 겨우 여자이 옷을 다 벗겼다는 것이다. "인터넷을 뒤지면 누드사진을 무수히 많고, 보고싶으면 언제든지 몰 수 있는데, 왜 하필 그렇게 고생해서 하는가?" 그는 이렇게 말했다: "보고싶을 때 볼 수 있는 게 무슨 재미냐?" 이것이 바로 남자들의 천한 점이다. 당연히 당현종이 자신의 며느리를 빼앗는 것은 드러내놓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명목상으로 먼저 양옥환을 출가시켜 여도사가 되게 하고 도호를 태진(太眞)으로 하여 사람의 이목을 가린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정식으로 그녀를 궁으로 부르고 귀비에 책봉한다. 고증에 따르면, 양옥환은 수왕과 최소한 3,4년간 생활했다. 그들은 당시에 분명히 서로간에 감정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증에 따르면, 양옥환과 수왕은 자식을 낳은 바 없다. 수왕의 두 아들은 다른 첩이 낳은 것이다. 당연히 이것은 수왕과 양옥환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하지는 않는다. 나중에 그녀와 당현종간에도 일생동안 자녀를 낳지 못한 점을 보면, 양귀비는 아마도 생육능력에 문제가 있었던 것같다.

 

양옥환은 부득이 나이어린 이모를 떠난다. 이때부터 항상 나이 예순에 가까운 당현종과 함께하게 된다. 그녀의 심정은 아마도 그다지 좋지 않았을 것이다. 비록 그때의 여자는 후세와 같이, 그다지 많은 사상적인 부담을 지고 있지는 않았다. 이모에 있어서, 마음은 분명히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당나라때 시인의 다수는 고의로 이 일을 회피했다. 이 사건은 당나라에서 민감한 사건이다. 그래서 백거이도 그저 자기기인(自欺欺人). 스스로를 속이고 남을 속이는 방식으로 "양가유녀초장성(楊家有女初長成), 양재심규인미식(養在深閨人未識)". 그러나, 만당(晩唐)이 되자, 이상은은 전혀 사정을 봐주지 않고 이 모든 것을 폭로하고 풍자했다.

 

<여산유감(驪山有感)> 이상은

 

여수비천범난향(驪岫飛泉泛暖香)

구룡가호옥련방(九龍呵護玉蓮房)

평명매행장생전(平明每幸長生殿)

부종금여유수왕(不從金輿惟壽王)

 

<용지(龍池)> 이상은

 

용지사주창운병(龍池賜酒敞雲屛)

갈고성고중악정(羯鼓聲高衆樂停)

야반연귀궁누영(夜半宴歸宮漏永)

설왕침취수왕성(薛王沉醉壽王醒)

 

이 두 개의 시에서, 비록 말하는 것이 상당히 함축적이기는 하지만, "부종금여유수왕", "설왕침취수왕성"등의 구절은 모두 한 가지 뜻이다. 그것은 바로 수왕은 마음이 계속 좋지 않았다는 말이다. 당현종의 이러한 행위는 자신의 아들 수왕의 마음에 깊은 상흔을 남긴다. 비록 수왕 이모는 그가 일찌기 가장 총애하던 무혜비의 아들이지만. 제왕들은 자녀에 대한 감정이 그저 담담한 경우가 많다. 그들은 일일이 자신이 직접 할 필요가 없고, 죽 한 숟가락, 기저귀 하나까지 직접 갈면서 키울 필요가 없다. 그러다보니 상당히 많은 경우 부자간 모자간에 그저 윤리상의 도의만이 있다. 실제로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것은 결핍되어 있다. 심지어 어떤 때는 피차간에 세불양립의 적이 되는 경우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