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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공통)

중국고대의 여병(女兵)

by 중은우시 2013. 12. 26.

글: 이효교(李曉巧)

 

최근 미국국방부는 여군은 전쟁터에 나갈 수 없다는 규정을 취소했다. 미군이 1994년부터 시행한 금지령에 따르면, 여군은 직접 지상작전임무에 참여할 수 없었다.

미군의 14%를 점하는 여군은 많은 경우 의무병, 헌병, 정보병등의 신분으로 전선에 단기간 파견된다. 그러나 중국역사상,여병은 일찌감치 전쟁터에서 전투에 참가해 왔다.

 

1.

 

중국역사상의 여장(女將)은 수도 없이 많다.

중국의 사료에서 찾을 수 있는 첫번째 여장은 상(商) 고종(高宗) 무정(戊丁)의 왕후 부호(婦好)이다. 그녀는 병력을 이끌고 동서로 정벌전쟁에 나서서 부군을 도와 상왕조의 판도를 몇 배나 확대시킨다. 부호는 전투를 잘 했을 뿐아니라, 제사와 점복의 권력도 장악하고 있어, 무정조차도 그녀를 어느 정도 두려워했다.

그후, 중국군에서 여장은 많이 나타난다. 서한말기, 선후로 두 명의 농민의 난의 여성지도자가 나타나는데, 여모(呂母)와 지소평(遲昭平)이다; 북조에는 모두가 잘 알고 있는 화목란(花木蘭)이 있다; 수나라초기, 장애를 물리치고 자신이 관할하는 8주를 이끌고 수왕조에 귀의한 승부인(冼夫人)이 있다.

당나라에 이르러서는, 당고조의 셋째딸 평양공주가 부대를 조직하여 대당강산을 건립하는데 사라지지 않을 공헌을 세운다. 이 부대는 군기가 엄정하고, 전투에 용맹하여 널리 옹호를 받는다. 지금이 산서 평정현의 "낭자관(娘子關)"은 바로 평양공주가 주둔하여 얻은 이름이다.

송나라때 저명한 항금여영웅 양홍옥(梁紅玉)이 있다. 건염4년(1130년) 봄, 금나라군대가 항주로부터 실컷 재물을 약탈하고 북으로 돌아간다. 양홍옥은 송군을 지휘하여, 김올술(金兀術)의 군대를 황천탕(黃天蕩)에 고립시키고, 금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그후로는 더 이상 쉽게 강남을 넘보지 못하게 된다.그녀의 명성은 그녀의 남편인 한세충(韓世忠)에 전혀 못지 않다.

명나라때는 유명한 사천 충주(忠州)의 여자 진량옥(秦良玉)이 있다. 그녀는 국가의 편제에 들어간 '정식' 여장군이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부친을 따라 무예를 익히고, 말을 잘 탔으며 활쏘기에 능했다. 시문에도 통했고, 지모도 있었다. 남편이 죽은 후 그 직위를 넘겨받아, 친족을 심양으로 파견하여 후금에 항거한다. 그리고 일찌기 3천의 "백간병(白杆兵)"을 이끌고, 산해관을 지키기도 했다.

청병이 산해관을 넘어 들어온 후, 그녀는 청나라에 항거하며, 전공이 탁월했다. 전공으로 그녀는 태자태보(太子太保), 중군도독부 좌도독, 진동장군, 사천총병관, 충정후(忠貞侯)의 관작을 얻는다. 숭정제는 시를 지어 그녀를 칭찬하기도 했다; "학취사천작진도(學就四川作陳圖), 원앙수리악병부(鴛鴦袖裏握兵符), 유래건괵감심애(由來巾幗甘心愛), 하필장군시장부(何必將軍是丈夫)"

1860년, 영국프랑스연합군이 북경을 점령하고 도처에서 노략질을 벌인다. 19살의 사장(謝莊) 여자 풍완정(馮婉貞)과 부친 풍삼보(馮三保)는 함께 민단을 이끌고 영국프랑스연합군을 무찔러 사장의 백성의 생명과 재산안전을 지켜낸다. 그리하여 일시의 영웅으로 칭송받는다.

항일전쟁시기, 두 명의 몽골여왕공(蒙古女王公) - 서기(西旗)의 기중방(奇仲芳)과 동기(東旗)의 파운영(巴雲英)이 있다. 모두 수백의 몽골친병을 이끌고, 항일유격전을 펼쳐 송미령의 칭찬을 받는다.

난세를 맞이하여 역사에 이름을 남긴 여장군은 수도 없이 많다. 마찬가지로 여성호걸 추근(秋瑾)은 시를 지어 이렇게 말했다: "휴신여자비영물(休信女子非英物) 야야용천벽상명(夜夜龍泉壁上鳴)"

 

2.

 

비상시기에, 여군은 전쟁터에 나타난다.

사료의 기록에 따르면, 고대중국에는 여병이 있을 뿐아니라, 여병부대도 있었다. 전국초기, <묵자>에 따르면, "수법(守法), 오십보(五十步), 장부십인(丈夫十人), 정녀이십인(丁女二十人), 노소십인(老小十人)." "제남여수어성성자(諸男女守於城上者), 십육노(什六弩), 사병(四兵)." 이런 기록을 보면, 전쟁이 이어지던 전국시대에 여병의 비율이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고힐강은 <여자당병과 복요역>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한다: "<좌전>이라는 책을 보면 여러가지 일을 기록하고 있는데, 튼튼한 여자를 병사로 삼았다는 흔적은 없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전국시대에 대규모의 전쟁이 연이어 발생하여 남자만으로 부족하면 여자가 이었다....반드시 전국의 인원을 모두 동원해야 끝났다." 비상시기에, 여병은 전쟁터에 반드시 나타난다.

한나라초기에도 여병이 있었다. <사기.항우본기>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그래서 한왕이 밤에 여자를 나와 형양성 동문으로 나온다. 갑옷을 입은 이천명이었다. 초병은 사방에서 이들을 친다."

고대 흉노의 부녀는 모두 여전사였다. <자치통감>의 기록에 따르면, 기원전 36년, 한왕조의 군대는 서역의 질지선우를 토벌하는데, 흉노군단은 질지성내에 있었다. 흉노군은 죽음을 맹세하며 항전한다: "선우는 갑옷을 입고 누각 위에 오른다. 제씨, 부인 수십이 모두 활로 외인을 쏘았다." 전쟁터의 상황이 급박해지면, 흉노여인도 전쟁터에 나섰다.

태평군에는 여병부대가 10만에 이르렀다. 상군의 정보회편 <적정회찬>에 따르면, "적은 원래부터 여군이 있었다." 그리고 상세하게 태평군 여군의 편제를 소개한다. 천경을 수도로 정한 후, 태평군여병은 40개군으로 개편된다. 1개군은 약 2500명이었다. 천왕부내에서 일하는 여병만도 3천에 이르렀다. 위급할 때 천왕의 생명을 보호했을 뿐아니라, 마지막에까지 텨평천국과 동귀어진한다.

청일갑오전쟁때, 청군의 장수 좌보귀가 전사한다. <점석재화보>의 보도에 따르면, 그 부인은 부군을 위하여 복수하기로 맹세하고, 금은악세사리를 모두 내놓아 사병을 모집한다. 3천명의 부대를 조직했는데, 모조리 여성이었다고 한다. "별칭일군(別稱一軍)", 감숙에서 북경까지 항일전선에 내보내달라고 요청한다.

당시 매체는 이렇게 탄식한다: "좌부인과 같은 사람은 여중의 기걸이다."  좌부인이 모집한 사병은 모두 섬서, 감숙 두 성의 사람이고, 그들은 "많은 사람들이 귀고리를 하고, 의복을 한쪽으로 묶어서 여장과 비슷했다." 자부인이 데리고 다닌 부대는 기실 절대다수가 남자였다. 다만 그녀의 부대에는 상당한 수량의 여병도 있었다."

 

3

 

고대의 여병부대는 통상적으로 무엇을 했는가?

군안에서 여병은 어떻게 관리했는가?

<묵자>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제작혈자오십인(諸作穴者五十人), 남녀상반(男女相半)". "장남지군(壯男之軍), 사성식여병(使盛食勵兵), 진이대적(陳而待敵). 장녀지군(壯女之軍), 사성식부루(使盛食負壘), 진이대령(陳而待令), 객지이작토이위험조(客至而作土以爲險阻), 급경격정(及耕格阱), 발염철옥(髮染撤屋)" 전국시대의 여병은 주로 참호동굴을 파고, 성벽을 수비하며, 흙을 파고 집을 철거하는 등등의 보조업무를 수행했다.

태평군의 여병부대가 종사한 것은 통상적으로 군수생산이다. 그리고 수리공사, 양초운송, 쌀을 찧는 것, 밧줄을 꼬는 것, 시신을 매장하는 것등의 일이었다. 청나라사람 사개학(謝介鶴)은 <금릉규갑기사략>에서 이렇게 적었다. 1853년-1854년의 사이에 태평군이 청군의 강남대영에 진공하였을 때, 여군들로 하여금 겨를 가득 담은 관주리를 들고 멀리서 따르게 했다.

일단 승리하면, 태평군은 승기를 틈타 추격한다. 여군은 겨를 가지고 영지의 도랑을 메운다. 그리고 광주리로 전리품을 주워서 돌아간다. 천경에 정도한 후, 시시때때로 광서적 태평군여군이 출전한다. 증국번은 이들 '대각만파(大脚蠻婆)'를 심히 꺼려했다.

"전쟁은 이미 중국부녀가 고개를 들고 해방되는 것을 가속화시켰다." 항전기간, 부대의 여군인외에, 중국의 보통부녀들도 뛰어난 활약을 보였다.

1938년 5월 국민정부는 고령에서 전국부녀회의를 소집한다. 그리고 부녀지도위원회를 설립하여, 전국의 부녀전시업무를 영도하고, 부녀를 조직하여 전쟁위문단, 담가대(擔架隊), 유격대등을 조직하여, 적후방의 도로를 파괴하고 교통을 절단하는 것을 도와 함께 침략자를 물리친다.

전시에 240마일에 이르던 천감공로(川甘公路)의 건설에는 수천명의 감숙부녀의 공로도 들어 있다. 감신공로(甘新公路)의 건설에도 현지 부녀의 공헌이 있었다. 당시 사용한 도구는 모두 극히 누추한 호미와 도끼였다. 부녀지도위원회는 전국에 9개의 판사조를 두어 항전에 봉사한다. 그 제도는 완비되어 있어, 방대한 규모의 '여병진영'을 방불하게 했다.

중국고대에 여병과 남병은 분리관리하였다. 남녀가 서로 접촉하는 것을 금지했다. 소위 "신사삼군무상과(愼使三軍無相過)", 남병여병을 섞어 놓으면, 전투력에 영향을 미친다고 보았다. 이것은 수천년이래의 전통사상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전체적으로 말하자면, 중국의 전통사상은 "남주외,여주내(男主外,女主內, 남자는 바깥일을 주로 하고, 여자는 집안 일을 주로 한다)"를 강조했다. 단지 비상시기에만 여성은 전쟁터에 나선다. 전쟁터에 나선 중국여성은 아름다운 이름 "건괵영웅"이라는 말을 듣는다. 모택동은 말했다. "중화아녀다기지(中華兒女多奇志), 불애홍장애무장(不愛紅粧愛武裝)". 여병부대는 갈수록 정치가, 군사가들의 중시를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