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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남북조)

사마소(司馬昭)의 마음

by 중은우시 2013. 11. 24.

글: 조염(趙炎)

 

널리 알려진 헐후어(歇後語)가 있다: "사마소의 마음(司馬昭之心)". 그 뜻은 "누구나 안다(路人皆知)"라는 것이다. 그 배후의 이야기는 다음의 두 사람이 주인공이다. 조모(曹髦), 자는 언사(彦士), 조위(曹魏)의 제4대 황제, 사칭 '고귀향공(高貴鄕公)'. 6년간 황제로 있었지만, 정규의 황제칭호나 왕의 작위도 받지 못했다. 아무리 봐도 억울하다; 사마소는 자가 자상(子尙)이고, 조위의 권신중 한 명이다. 서진왕조의 실질적인 창업자이다. 비록 생전에 칭제하지는 못했지만, 사서에서는 그를 진문제 혹은 진태조라고 부른다. 역사는 왜 이렇게 불공평한가!

 

<삼국연의> 제114회의 이 일에 대한 서술은 정사의 기록과 기본적으로 일치한다. 조정의 군정대권은 사마소가 장악했고, 조모는 밤낮으로 불안하게 지낸다. 260년, 그는 수하심복을 불러서 대책을 논의한다. "사마소가 반역할 생각을 품고 있다는 것은 사람들이 다 알고 있다. 짐은 앉아서 폐위되는 치욕을 당할 수 없다. 경등은 짐을 도와 그를 토벌해달라." 그후에 상서 왕경이 말리는 것도 듣지 않고, 친히 대전의 숙위,잡역등 300여명을 이끌고 사마소를 치러 한다. 그 결과 불에 뛰어든 나방처럼, 태사사인 성제(成濟)에게 피살당한다.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호랑이를 그릴 때 가죽을 그릴 수는 있지만, 호랑이뼈를 그리기는 어렵다. 사람을 알 때 얼굴을 알 수는 있지만 마음을 알 수는 없다. 사람의 속은 헤아리기 힘들다. 마치 바닷물속을 헤아리기 어려운 것처럼. 나이도 어린 조모는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사마소가 찬탈하려는 마음을 먹었다고 단정했던 것일까? 무엇을 근거로 사마소가 찬탈할 것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다 알고 있다'고 한 것일까?  불행한 것은 근 2천년동안, 사람들은 이 헐후어를 가지고 '지구인이라면 모두 알고 있다고 얘기하는 야심과 음모를 비유하는 것만 생각했지, 그 진위에 대하여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렇다면, 사마소의 마음은 도대체 어떤 마음이었을까?

 

사마소는 조모를 죽일 마음이 없었다.

 

조모에 관하여 진수(陳壽)의 평가는 적절하다: "고귀공은 재주와 지혜가 있고, 묻기를 좋아하고 글을 중시했다. 문제(조조)의 풍류를 지녔다. 그러나 경박하고 함부로 행동하여 큰 화를 불러왔다." 당나라때의 시인 왕발도 마찬가지로 평을 한다: "고귀향공은 명결유여(名決有餘), 심심부족(深沈不足)했다. 그의 웅재대략, 경위원도(經緯遠圖)를 여러 사람들에게 물었으나 얻지 못했다." 그 의미는 조모가 비룍 재능이 있었으나, 성격에 '깊이'가 없었다. 경솔하고 경박했다. 황제의 심술을 갖추지 못했다. 성격이 운명을 결정한다. 황가로서의 권위를 모조리 잃고 만다. 조모는 참을 수 없었고, 결국 스스로 화를 부른다.

 

다만 조모는 원래 죽지 않을 수 잇었다. 권위가 붕괴되어도, 그의 신분상 우세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군신의 명분을 보면, 그는 군왕이고, 사마소는 신하이다. 그의 황위는 정정당당하게 앉아 있는 것이다. 사마소가 만일 그 선을 넘으려고 하면, 그저 '시군' 찬탈이라는 역사적 오명을 뒤집어 쓸 수밖에 없었다.

 

정사를 보면, 사마소는 발호했지만, 확실히 시군의 마음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설사 조모가 그의 조위에 대한 우충의 심리적 한계선을 잃어버리게 만들었을 수는 있지만, 그는 자신이 위를 대신하여 황제에 오르려고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조모를 폐위하는데 분명히 반대한다. 이는 그가 조위의 사직, 법통 및 황제를 보호하려고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생각해보라 조조는 어떻게 한헌제를 대했는가? 위공, 위왕이 되기 전에도 그가 <자명본지>에서 황제를 존중하는 말을 한 적이 있던가? 사마소는 이미 진왕이다. 그는 손호에게 보내는 서신에서도 조모를 존경하는 마음을 그대로 드러냈다. 관구검, 문흠등은 모두 긍정적으로 말했다. 사마소는 '고세군자(高世君子)'의 풍모를 지니고 있고, 나라에 충성하며, 신하의 도리를 지킨다고.

 

일보 양보하여, 사마소에게 시군의 마음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만일 조모가 한헌제를 제대로 본받았더라면, 고인이 말한 "그의 마음을 알기 어렵다. 희노를 알기 어렵다"는 것을 실천할 수 있었다면, 그리하여 겉으로 화를 적게 냈다면, 아마도 멍청한 척 할 수 있었고, 마음과 은혜로 상하를 끌어들여 권위상실을 보완하면서, 시기를 기다렸다면 국면을 뒤집을 기회가 있었을 수도 있다.

 

북위의 효장제 원자유는 조모의 처지와 유사했다. 일찌기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차라리 고귀향공처럼 죽을지언정, 한헌제처럼 살지는 않겠다." 다만 원자유는 시기를 잡아서 적시에 출격할 줄 알았다. 성공적으로 권신 이주영을 죽인다. 아쉽게도, 조모는 원자유가 아니었다. 곽태후마저도 그를 지지하지 않는다. 사마소도 이주영이 아니었다. 사람들의 마음이 어디로 향하느냐가 성패를 결정한다는 인식에서, 사마소가 훨씬 뒤어났다.

 

조위를 위하여 일하다.

 

조모는 멍청하게도 자구식의 최후일전을 벌인다. 이때 사마소는 무엇을 하였는가? 촉나라를 멸망시킬 대계를 계획하고 있었다. 이전에 즉 258년, 제갈탄이 회남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사마소는 조모의 친정을 건의한다. 곽태후의 지지를 받아, 최종적으로 수춘전투에서 승리한다. 이 전투에서 전쟁포로 10여만을 생포한다. 부하가 모조리 생매장하자고 건의한다. 그러나 사마소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들을 돌아가게 놔주어, 대위의 큰 도량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 조치는 조조가 자신의 개인적인 욕심으로 수만의 전쟁포로를 갱살한 것과 선명한 대비를 이룬다. 나중에 양주의 백성들은 더 이상 그에게 반대하지 못한다.

 

사마소의 집권은 이인치국(以仁治國)이고, 백성을 근본으로 하는 것은 일관되었다.

 

그는 백성을 보호하고, 형벌을 감경해주었다. 백성이 평화를 사랑하고, 통일을 희망한다는 마음을 잘 알았다. 초무의 게책으로 소수민적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북방의 팔백만명의 민족을 귀순시킨다. 촉을 멸망시킨 후에도 후주 유선을 잘 대해준다. 명장 양호(羊祜)는 이렇게 말한다: '선제(사마소)는 하늘을 따라고 시대의 흐름에 맞추어, 서로는 파촉을 평정하고 남으로는 동오와 화합다. 해내는 휴식을 취하고, 백성들은 편안하고 즐거운 마음을 가진다." 장제(張悌)도 이렇게 말한다; "(사마소)는 강한 적을 썩은 나무를 부러뜨리는 것같이 쉽게 무너뜨렸고, 적을 소탕하는 것은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 쉽게 처리했다. 현명한 사람을 기용하여 각자 자신의 능력을 다하게 하였다. 지용을 겸비한 사람이 아니라면, 어찌 이렇게 할 수 있었겠는가?" 이런 사람이 어찌 성공하지 못할 것인가.

 

사마소는 은덕과 인정(仁政)으로 인심을 얻었다. 결국은 모두 조씨를 위한 것이다. 당시 조야는 사마소를 추대하는데, 이미 그의 부친 때보다 더 격이 올라간다. 사마의가 승상으로 있을 때 구석(九錫)을 받지만 태상왕숙만이 추대했다; 그러나 사마소에 이르러서는 이미 태위, 사도가 추대했는데, 태상보다 직급이 높았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사마소는 구석을 6번이나 사양한다. 첫 번에는 9차례나 사양한다. 이를 보면 그는 결국 권위가 붕괴된 조위정권의 주문왕이 되고자 했던 것이고, 찬위의 마음은 없었던 것이다.

 

사마소의 마음을 다시 보자

 

권위있는 자라고 하여 반드시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지는 않는다.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려면 먼저 권위를 얻어야 한다. 정권을 전복시킨 사람은 모두 내생성과 외생성의 두 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다. 이 두 가지 요소는 상호작용을 하고 관련된 것이다.

 

조위정권을 예로 들면, 위명제 조예는 토목공사를 대거 일으키고 사치스러웠다. 내생적 위기의 씨는 이미 뿌려졌다. 세가종족의 자제는 그저 향락만 알고 사직은 몰랐다. 문무백관은 탐욕스럽고 착취하며 백성을 아낄 줄 몰랐다. 조방이건 조모이건, 그들의 자질로, 단기간내에 이런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 그외에 촉한, 동오 및 북방유목민족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우리는 간단하게 사마소의 조위에 대한 충성을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우충이나 매명(賣命)으로 이해할 수 없다. 황제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충신은 최하층의 충성심을 가진 자이다. 고금이래로, 사대부의 황실에 대한 충성기준은 사직을 보호하고, 통치지위를 지속시키는 외에, 백성을 사랑하는 것이 최고의 도덕기준이다.

 

사마소가 한 것은 바로 '안내, 양외'를 동시에 진행한 것이다. 민심을 모으고, 황권의 안정을 도왔으며, 내생성위기를 소멸시킨다; '서로는 파촉을 평정하고, 남으로 동오를 화합시키고' 이민족을 회유하여, 외생성위기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해내가 휴식을 취하게 된다.'

 

아이러니한 것은 사서에서 사사소의 죄행은 많이 적어놓았지만, 그가 한 좋은 일에 대하여는 거의 적지 않아서 아주 기이할 정도이다.

 

조조와 비교하면, 사마소를 소개하는 글은 너무 적다. 그러나 역사의 공과는 이야기가 많으냐 적으냐, 기재된 문자가 얼마이냐로 결정되지 않는다. 그의 정책, 업적을 보아야 한다. 난세에 능력있고 인의있는 인물이 그런 시대를 종결시킨다면 그것은 좋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역사인물의 부정적인 면만을 일방적으로 얘기하는 것은 불공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