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문학/삼국연의

삼국명장들은 어떤 무기를 썼는가?

중은우시 2013. 11. 10. 01:37

글: 불감왕언(不敢枉言) 

 

1. 여포(呂布)

 

척토마(赤兎馬)를 타고, 방천화극(方天畵戟, 畵杆方天戟)을 휘두르는 것은 우리가 잘 아는 여포의 대표적인 특징이다. 그러나, 이것은 소설적인 기법으로 승화된 후의 모습이다. 사료의 기재를 보면, 적토마는 진실로 존재했다. 그러나, 방천화극은 후세인들이 만들어 붙인 것이다. <삼국지. 여포전>은 '영웅기"를 인용하여 이렇게 말한다: 여포가 동탁을 주살한 후, 왕윤이 서량군벌을 모조리 주살하려 한다. 그러다다 이각(李傕), 곽사(郭汜)가 장안에서 반기를 든다. 여포는 말을 타고 나가서 싸우는데, 그는 적진의 앞에서 곽사와 1:1로 싸우자고 요구한다. 그 결과, "(여)포는 모(矛, 세모진창)를 가지고 (곽)사를 찔러갔다. (곽)사의 뒤에 있던 기병이 앞으로 나와서 (곽)사를 구한다." 이렇게 여포가 수중에 들고 있던 무기는 바로 "모(矛)"였다.

 

아마도 이런 의문을 가진 사람이 있을 것이다. "원문사극(轅門射戟)"은 어떻게 해석할 것이냐고. <삼국지>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여)포는 문후에게 영문(營門)의 가운데 극을 하나 들고 있으라고 하고...여포가 활을 들어 극을 쏘았는데, 한가운데를 맞추었다." 원래 여포가 쏜 극은 자신의 무기가 아니었던 것이다.

 

2. 관우(關羽) 

 

관우를 말하면 자연스럽게 청룡언월도(靑龍偃月刀)를 떠올린다. 만일 관우의 무기는 도(刀)가 아니라 극(戟, 창)이었다고 얘기한다면, 아마도 '관우가 대도를 휘두른다"는 옛 속담도 바뀌어야 할 것이며, 말이 되지 않는다고 여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다.

 

<삼국지. 관우전>에 관우가 안량을 참하는 내용을 보면 이런 기록이 있다: "(관)우는 안량의 휘개(麾蓋)를 쳐다보고, 말을 몰아 (안)랴을 여러 사람들의 가운데에서 찔렀다.. 그의 목을 베어서 돌아왔다" 여기에 두 가지 동작이 있다. 하나는 찌른다(刺)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벤다(斬)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글자를 그대로 읽어서, 관우가 안량을 찌른 후, 말에서 내려 칼로 목을 베어서 수급을 가지고 돌아왔다고 해석하기도 하나, 그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생각해보라. 양군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하에서 주장(主將)이 부상을 입거나 말에서 떨어지면, 궁전병은 활을 쏘아서 진격해 들어오는 것을 막을 것이고, 사병들은 죽어라 주장을 구하려 달려올 것이다. 어찌 다시 말에서 내린 다음 칼을 뽑아서 목을 베도록 놔둘 것인가. 그러므로, 먼저 찌르고 다시 베었다는 말로 분석해보면 관우의 수중에 있던 무기는 "극(戟), 과(戈)"와 같은 창류라고 볼 수 있다.

 

3. 장비(張飛)

 

장비의 수중에 쥐어진 것은 확실히 모(矛)이다. <삼국지. 장비전>에는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다: "(장)비는 물에 의지하여 다리를 막고는 눈을 부릅뜨고 모(矛)를 가로로 들고 말했다: '나는 장익덕이다. 와서 같이 죽자'" 그러나 '장팔사모(丈八蛇矛)'라는 명칭은 민간전설이나 혹은 소설기법으로 승화된 산물이라고 할 것이다.

 

4. 유비(劉備)

 

소설은 유비에게 쌍고검(雙股劍)을 쥐어주었다. 그러나, <삼국지>를 다 읽어보아도, 유비가 검을 들었다는 흔적은 찾을 수 없다. 유비의 무기는 사서에 두 가지 기록이 있다. 하나는 극(戟)으로, <조운별전>에 이런 말이 있다. 장판파에서 조운이 단기로 그를 구하기 위하여 진중을 여러번 왕래한다. 어떤 사람은 조운이 투항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유비는 믿지 않았다. 선주(先主, 유비)는 수극(手戟)을 던지며 말했다: '자룡은 나를 버리고 가지 않는다' 이 '수극'이 장식물인지 무기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둘은 도(刀)이다. 조조가 형주를 정벌할 때, 유종은 유비에게 투항할 것이라는 말을 감히 하지 못한다. 유비는 실제정보를 얻지 못했다. 유종은 송충이라는 사람을 보내어 말한다. 유비는 대노하여 도(刀)를 꺼내어 송충을 겨누며 말했다: "오늘 너의 머리를 잘라도 분이 풀리지 않겠다. 대장부가 떠나면서 그대같은 자를 벤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한번은 극이고 한번은 도이다. 어느 것이 그의 무기였을까? 그러나 절대로 쌍고검같은 것은 아니다.

 

5. 감녕(甘寧)

 

소설과 민간전설에 따르면 감녕의 무기는 유성추(流星錘) 혹은 연자추(鏈子錘)이다. 이것은 아마도 사료의 기재와 관련이 있는 듯하다. <삼국지. 감녕전>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나중에 환(皖)을 공격하면서 성독(城督)으로 승진한다. (감녕)은 손에 연(鍊)을 쥐고 몸을 성에 연결시키고(手持練, 身練城), 사병들의 앞장을 서서 마침내 성을 격파한다..." 감녕이 손에 '연'을 쥐고 성벽을 오른다. 이 '연'은 분명 '밧줄' 혹은 '쇠사슬'일 것이다. 왜냐하면 뒤에 '신연성'이라는 세 글자가 잇으므로 감녕이 밧줄 혹은 쇠사슬을 가지고 성벽을 기어올라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감녕전>에는 이런 말도 있다. "여러 사람들이 서로 따른다. 궁노(弓弩)를 들고, 깃털 장식품을 등에 붙이고, 방울을 달았다. 민간에서는 방울소리가 들리면 감녕인 줄 알았다." 이 내용을 보면 감녕이 쓴 무기는 방울이 달린 궁노(弓弩)일 것이다. 동오대장 능통(凌統)의 부친은 바로 그가 쏜 화살에 맞아 죽는다. 그리고 그의 부하들은 모두 문신을 했다.

 

6. 태사자(太史慈)

 

삼국연의에서, 태사자는 수중에 창(槍)을 들고, 등에 쌍극(雙戟)을 꽂고 소패왕 손책과 싸웠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태사자전>에는 이렇게 적었다. "아름다운 수염을 가지고(美鬚髥), 원숭이처럼 긴 팔로 활을 잘 쏘았다(猿臂善射), 화살이 빗나가는 법이 없었다(弦不虛發), 일찌기 마보적을 토벌할 때, 적은 누각 위에 있었다. 손으로 누각의 기둥을 잡고 있었는데, 태자사는 활을 쏘아서 맞추었고, 화살인 손을 관총해서 기둥에 박혔다.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칭찬하여 마지 않았다." 성의 아래애서 성위에 있는 사람의 손을 맞추고 그리고 기둥에 박히게 만들다니, 이런 실력은 절대로 여포의 원문사극에 뒤지지 않는다.

 

7. 황개(黃蓋)

 

<삼국지.황개전>에는 황개가 현령으로 있을 때의 이야기를 적고 있다. 당시 현의 관원들은 다루기가 쉽지 않았는데, 황개는 부임한 후 두 관리를 임명하여, 그들이 각자 현의 관리들을 관리하도록 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했다. 누구에게도 채찍이나 곤장을 치지 말라. 그 결과 두 사람은 업무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을 뿐아니라, 스스로 법도를 지키지도 못했다. 황개는 두 사람을 불러서 다시 말한다. 나는 너희에게 절대로 채찍이나 곤장을 치지 말라고 했다. 지금 너희들이 법을 어겼으니, 그것은 내 잘못이 아니다. 그리고는 두 사람을 죽인다. 황개가 말한 채찍과 곤장은 일종의 형벌이다. 이것이 아마도 황개가 철편(鐵鞭)을 들었다고 하게 된 내력일 것이다.

 

8. 전위(典韋)

 

삼국지에서 유일하게 전위가 양간철극(兩杆鐵戟)을 들고 용맹무쌍하게 싸우는 이미지는 역사기록과 가장 들어맞는다. <삼국지. 전위전>에는 이런 말이 있다: (전)위는 대쌍극(大雙戟)과 장도(長刀)등을 잘 들었다. 군중에서 그에 대하여 이런 말이 있었다; '장사중에 전위가 있는데 쌍극 팔십근을 든다' 다만, 전위가 대부(大斧)를 들 때도 있었다. 부(도끼)의 날은 1척여 길이로 반짝반짝 빛났다. 장수(張繡)와 다른 장수들은 놀라서 감히 쳐다보지도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