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진시황)

병마용을 불태운 것은 진이세(秦二世)일까?

by 중은우시 2012. 6. 11.

글: 예방육(倪方六)

 

최근 이틀동안, 이전에 열기를 내뿜었던 진시황 병마용이 다시 뉴스거리로 떠올랐다. 최대의 뉴스는 병마용이 인위적으로 불태워졌다는 것이 추가로 증명되었다는 것이다. 그럼 누가 불태웠을까? 전 병마용관장인 위안중이(袁仲一)는 아마도 항우일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으로 병마용이 불에 탄 원인은 간단하지가 않다. 아마도 진이세가 시킨 것일 것이다.

 

소위 항우가 병마용을 불태웠다는 설의 '이론'근거는 유방이 항우에게 열거한 10대죄상중 네번째 죄상때문이다. <사기.고조말기>(권8)에 따르면 이렇게 되어 있다: "초회왕은 진나라땅으로 들어가서 폭력을 행사하거나 강탈하지 말도록 약속했다. 그러나, 항우는 진나라 궁실을 불태우고, 시황제의 무덤을 파서, 그 재물을 개인적으로 가졌다."

 

이것은 항후가 불을 냈다는 가장 직접적인 역사증거이다. 다만, 이 말에는 항우가 진시황의 병마용을 불질렀다는 말이 없다. 그 대상은 단지 '진나라 궁실'일 뿐이다.

 

<사기>에 이런 기재가 있는 외에, <한서.유향전>(권36)에도 유사한 기록이 있다: "항적(항우)는 그 궁실과 건물을 불태웠고, 그곳에 간 사람들이 모두 발굴을 했다." 아래 윗 글을 연결시켜보면, <한서>이 이 기록은 <사서>의 기록보다 지향성이 더욱 강하다. 불태운 것은 진릉의 지상건축물인 것이다.

 

그러나, 항우가 불태운 것은 진릉의 지상건축물이지, 항우가 병마용갱을 불태웠다고는 기록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현재 병마용갱에서 불태운 흔적이 나타났다고 하여, 항우의 행위로 추측하는 것은 사료에 근거가 부족한 것이다.

 

한발 물러서서 보더라도, 항우가 병마용갱을 불태우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 첫째, 병마용갱은 당시에 묻어두었다. 항우는 사람을 파견하여 아무런 가치도 없는 진흙을 된 진용을 찾으려 했겠는가? 그것이 합리적인가? 둘째, 진용갱은 면적이 너무 넓다. 현대 고고학으로도 일부분만을 발굴했을 뿐이다. 발견면적은 이미 20870평방미터에 달한다. 항우는 그렇게 넓은 면적에 묻어둔 진용갱을 파내서 불태우고 부쉈다? 가능한 일인가? 만일 원한을 풀기 위해서라고 말한다면, 진시황의 진릉 지하궁전에서 시신을 꺼내서 푸는 것이 더욱 쉽지 않겠는가?

 

그래서, 항우가 병마용을 불태웠다는 것은 학술적인 추측으로는 가능하지만, 직접적으로 '최대혐의자'라고 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이전에 누군가가 안양의 서고혈한묘를 조조묘라고 한 것과 마찬가지로, 근거가 없는 것이다. 신중하지 못하고, 웃음거리가 될 뿐이다.

 

기실, 진릉부근에서 불에 탄 유적지가 발견되는 것을 항우의 행위로 추측하는 것은 병마용이 발굴된 후에 비로소 출현한 것이 아니다. 일찌기 1960년 3월, 국무원은 진시황릉을 전국중점문화보호단위로 지정한다. 다음 해 2월, 섬서성 문물관리위원회는 '진릉조사공작조'를 구성한다. 구성원은 섬서성 문물관리위원회의 왕옥청, 낙충여 그리고 임동현문화관의 팽자건 등 3명이다.

 

조사조는 진릉의 동, 서, 북 삼면의 내성문을 파서 탐색할 때, 각문의 변에서 기와조각, 붉게 탄 흙 그리고 재등 유물, 유적을 발견한다. 이런 붉게 탄 흙과 재는 당시 사람이 인위적으로 방화한 것으로 추측했다. 1962년 8월 발표된 <진시황릉조사간보>의 결론에서는 이것이 아마도 항우의 소행일 거이라고 하였다. 왜냐하며 이 곳은 지상건축물이고, 간보의 추측은 그래도 어느 정도 이치에 맞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한서. 유향전>의 기록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병마용갱을 불태운 유적도 항우의 소행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견강부회이다.

 

그렇다면, 진릉의 지하궁전이 불태워졌다는 말은 어떻게 된 것일까? 이 일은 항우와 더욱 관계없다. <한서.유향전>의 기록에 따르면, 이것은 항우가 진릉을 파낸 후에 발생한 일이다: "나중에 목동이 양을 치다가 잃어버렸다. 원래 양은 한 지하동굴로 파고 들어갔던 것이다. 목동은 횃불을 들고 들어가 양을 찾았는데, 잘못하여 불을 내서 진시황이 관을 태워버렸다." 이 기록이 믿을만한지 아닌지,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별론으로 하고, 진릉의 지궁을 불태운 것도 항우와는 무관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진시황의 병마용에는 왜 많은 면적에 불탄 흔적이 남아있을까? 항우는 당연히 혐의자중의 한 명이다. 그외에 또 누가 있을까? 먼저 병마용갱이 불타고, 파괴된 원인을 찾아보자, 그러면 최대의 혹은 진정한 혐의자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필자의 생각으로 병마용갱을 불태운 것은 최소한 이렇게 3가지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첫째, 기술에 따른 처리수법. 현재 볼 수 있는 병마용은 굽지 않은 것이다. 즉, 완성품이 아니어서 쉽게 손괴된다. 병마용을 완성품으로 만들어 더욱 단단하게 하려면 현장에서 불로 구워서 단단하게 만들어야 보존하기 좋다. 이곳에서 굽는 것은 실로 하나의 기술이다. 고대인들은 묘를 만들 때, 묘의 벽을 더욱 단단하게 하기 위하여, 이런 방식으로 처리한 현상들이 있다. 이것은 현대고고발굴에서도 많이 발견된다. 원시건축에서 일반민간건축에서도 이런 '분소법(焚燒法)'으로 벽을 단단하고, 땅을 견고하게 만드는 경우가 있다.

 

둘째, 장례풍속으로 인한 것. 중국은 지금까지도 명기(冥器, 무덤에 넣는 물건)을 불태우는 풍속이 있다. 병마용은 일종이 명기이다. 대량의 죄수신분의 장인들이 이 기회에 불만을 풀기 위하여 장인들이 미친 듯이 불사르고 파괴했을 수 있다. 어째든 이 때는 감독관이 와서 추궁할 리는 없으니까...이것도 좋은 해석이다. 왜 병마용이 인위적으로 파괴된 현상이 있는지에 대한.

 

셋째, 의외상황이다. 진릉의 공사는 대규모였다. 완공되지 못했다. 어떤 사람은 '중국최대의 미완공공사'라고 한다. 진시황은 동순 도중에 사망한 후 이어서 즉위한 진이세 호해는 당시 아주 격렬했던 정계와 사회의 모순을 잘 처리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조고정변과 진승오광의 난이 발생한다. 진나라제국이 무너지고, 농민군이 함양으로 다가올 때, 진이세는 할 수 없이 장한의 건의를 받아들여, 진릉을 만들고 있던 많은 범죄자와 노예를 풀어주고, 그들로 임시군대를 만든다. 이렇게 하여 30만 진압대군이 만들어져서 농민군에 대항한다. 이런 배경하에, 대충대충 진용을 땅 속에 묻는 과정에서 의외의 사건이 발생하여 진용이 불타버렸을 수 있다.

 

당연히 이상이 가능성은 개인적인 추측일 뿐이다. 이런 상황이 나타날 수 있는 것은 오직 한 사람밖에 없다.  바로 진이세이다. 진이세의 동의와 지시가 없으면, 일반인들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