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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민국 후기)

민국시대 4대 서예가

by 중은우시 2011. 2. 3.

 

글: 유계흥(劉繼興)

 

학계에서 공인된 민국 4대 서예가는 각각 담연개(譚延闓)(해서), 호한민(胡漢民)(예서), 오치휘(吳稚暉)(전서), 우우임(于右任)(행서)이다. 이 4명은 모두 민국시대에 아주 대단했던 사람들이다. 민국시대 정계에서 호풍환우하던 인물이다. 사업과 학문에서 모두 남다른 성취를 거두었다.

 

담연개

 

 

 

 

 

 

담연개는 호남 다릉(茶陵)사람이고, 절강성 항주에서 태어났다. 부친 담종린은 진사로 섬서순무와 섬감, 민절, 양광총독의 직위를 지냈다. 학문하는 집안에서 태어난 담연개는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했다. 어려서는 광서제의 스승인 옹동화(翁同)로부터 '기재'라는 말을 들었다.

 

1904년, 담연개는 청나라말기의 마지막 과거시험에 응시하여 중시에서 1등으로 공사(貢士)가 된다. 즉 회원(會元)을 한 것이다. 4월에 전시에 참가하여 2등35명으로 진사출신이 된다. 이때부터 정계에서 활약할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동시에 그는 호남에서 청나라 00여년간 회원을 배출하지 못했던 공백을 메워주었고, 그는 진삼립(陳三立), 담사동(譚嗣同)과 함께 "호상삼공자(湖湘三公子)"로 칭해진다. 그는 한림편수의 직위를 받았다.

 

담연개는 근대 군주입헌파의 대표자이다. 1907년 '호남헌정공회'를 조직하여 입헌을 적극적으로 추진한다. 1909년에는 호남자의국 의장이 되어, 호남입헌파의 수뇌인물이 된다. 신해혁명때는 혁명에 가담한다. 장사를 광복시킨 후, 호남군정장 및 참의원 의장에 추대된다. 나중에 호남도독을 세 번이나 맡는다. 1912년 국민당에 가입하여, 호남지부장이 된다. 나중에 호남성장 겸 독군, 국민당중앙정치위원회 주석, 국민정부 주석, 행정원장등의 직위를 맡는다.

 

담연개는 변신에 능했고, 정치풍향을 잘 파악했다. 3번이나 호남총독을 역임하고 국민정부 주석까지 맡았으며, 나중에 초대 행정원 원장까지 맡아서, 전체 민국시대에 혁혁한 명성을 떨친다. 이를 통하여 그는 여러 인물들이 명멸하는 민국시대에 보기 드문 '정치오똑이'였다. 그는 평상동안 미색에 흥취가 없었고, 오로지 미식은 중시했다. 더욱 보기 드문 일은 그가 문인이면서도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하며, 마상기술도 아주 뛰어나서, 무인의 풍모가 있ㅇㅆ다.

 

담연개가 사람들에게 추앙을 받는 것은 그의 서예가 천하에 이름을 떨쳤다는 것이다. 청나라때 전풍지(錢之)의 뒤를 잇는 안진경체의 대가이며, 민국4대서예가의 으뜸으로 꼽혔다. 그의 글씨는 그 사람됨과 같이 대권을 장악한 기상이 있었다. 민국시대부터 지금까지 안진경체에서는 담연개를 따를 사람이 없었다.

 

담연개는 시와 서에 모두 뛰어나서, 시련(詩聯)을 잘 지었다. 서예작품은 예술과 문화재의 이중가치가 있고, 현재 남경 중산릉 반산요정의 안에 쓰여 있는 석비 "중국국민당장총리손선생어차(中國國民黨葬孫先生於此)"라는 두 줄의 거대한 황금글씨는 바로 담연개가 쓴 것이다.

 

담연개는 1880년에 태어나서 1930년에 죽었다. 담연개의 딸 담상(譚祥)은 송미령이 미국유학때 동창생이며, 나중에 장개석의 최측근심복이며, '부총통'에까지 오르는 진성(陳誠)에게 시집을 간다.

 

호한민

 

 

 

 

"만일 호한민 선생의 사람됨을 논한다면, 내가 가장 잘 안다. 그의 학문과 도덕은 모두 깊이가 있다. 광동에서만 보기 드문 인물이 아니라, 다른 성에서도 보기 힘든 인물이다....그의 평생의 큰 역량과 큰 재주를 생각하면 도독을 맡아서 할 정도일 뿐아니라, 총통의 직위를 맡아도 잘 해냈을 것이다."

 

이는 손중산이 호한민에 대하여 평가한 것이다.

 

호한민은 중국국민당 원로이며 초기 주요 지도자중 한 명이다. 그는 이론에 조예가 깊고, 문장이 뛰어났다. 일찌기 손중산이 가장 의지하던 오른팔이었다. 국민당내에서 그는 직위가 높았고, 경력도 오래되었으며, 명성도 뛰어났다. 후배인 장개석이 비길 바가 아니었다. 장개석도 호한민의 지원하에 비로소 당내의 경쟁에서 앞설 수 있었던 것이다.

 

호한민은 1879년생이며, 광동 번우 사람이다. 21세에 거인이 되고, 1902년에 일본유학을 하며, 1905년 동맹회에 가입한다. 1907년에서 1910년까지 무장혁명에 여러번 참가하고, 황흥과 함께 광주신군의거와 황화강의거를 이끈다. 1911년, 신해혁명후에 광동도독, 남경임시정부 비서장이 되며, 나중에 교통부장, 총참의등으 직위를 맡는다.

 

1924년 1월 국민당의 제1차전국대표대회가 광주에서 개최된다. 호한민은 5명의 대회주석단의 1인이었다. 그리고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고, 황포군관학교 정치교관을 겸임한다. 같은 해 9월, 손중산이 광주를 떠나 소관으로 가서 북벌대본영을 건설할 때 호한민은 대원수대행으로 광주에 남아서 지킨다.

 

손중산이 서거한 후, 국민당내에 가장 큰 세력을 가지고 있던 것은 왕정위, 호한민과 요중개이다. 이들은 '삼거두'로 불리웠다. 1925년 8월, 국민당 좌파의 지도자인 요중개가 피살된다. 왕정위, 허숭지, 장개석의 3인이 특별위원회를 만들어 국세를 장악하고 요중개사건을 처리한다. 요중개사건의 재판과정에서 국민당 우파의 지도자였던 호한민의 혐의가 가장 컸다. 그리하여 한때 구속까지 되었다가, 나중에 소련으로 시찰명목으로 보내진다.

 

1927년 영한분열(寧漢分裂, 남경정부와 무한정부의 분열)시, 호한민은 장개석을 지지하고, 남경의 업무를 주재하며, 반공청당에 참여한다. 나중에 입법원 원장등의 직위를 맡는다. 1931년, 장개석과 약법지쟁을 벌여 장개석으로부터 연금을 당한다. 나중에 광주로 가서 남방의 실력파지도자가 된다. 항일, 공산당소탕, 반장개석의 3대정치주장을 펼친다. 이리하여 장개석은 그를 '신군벌'이라 부른다. 1935년 6월, 호한민은 유럽으로 시찰을 떠나고, 장개석에 대한 공격을 멈춘다. 1935년 12월, 아직 프랑스에 머물던 호한민은 국민당 제5기 1중전회에서 중앙상무위원회 주석에 선임된다. 1936년 1월, 유럽에서 귀국하여 광주에 머문다. 1936년 5월 12일 호한민은 뇌일혈로 광주에서 사망한다.

 

호한민은 예서에 뛰어났다. 서예예술에서 상당히 높은 성취를 얻는다. 서법에도 연구가 깊어서, 스스로 일가를 이루었고, 남다른 품격이 있었다. 그의 예서는 단정하며 웅건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평한다: "호한민은 서예에 뛰어났다. 저수량, 미불을 하나로 합친 것같다. 만년에 조전비를 익혔는데 아주 닯았다. 남경 중산릉 대청의 정면 벽위에 음각된 <<총리유촉(總理遺囑)>>의 거대한 편액은 바로 호한민의 글이다.

 

오치휘

 

 

 

 

오치휘는 일명 경항(敬恒)이라고도 한다. 청나라 광서 신묘과의 거인이다. 강유위, 양계초의 <<공거상서>>에도 참여한 바 있다. 유신을 주장하고, 신정을 주장했다. 일본으로 가서도 공부하고, 영국 프랑스에도 갔다. 나중에 손중산 선생을 따라, 동맹회에 가입하고 신해혁명에 투신한다. 그는 장개석의 내외정책을 지지했다. 그는 1865년에 태어나서 손중산보다 1살이 많고, 장개석보다 22살이 많았다. 그는 국민당집권시기에 최연장자였다.

 

민국괴인(民國怪人)으로 불리는 오치휘는 중앙연구원 원사였다. 그는 동서양의 학문에 정통했고, 교육을 중시하여 영향이 아주 컸다. 장몽린은 그를 중국학술계에 빛을 사방에 뿌린 혜성이라고 하였다; 호적은 그를 중국근 300년래의 4대반이학의 사상가중 한 명이라고 불렀다. 1962년 유네스코는 오치휘에게 '세계학술문화위인'의 칭호를 부여한다. 이리하여 그는 20세기에 이 영예를 차지한 첫번째 중국인이 된다.

 

오치휘는 1924년 국민당 중앙감찰위원에 선임된다. 1927년에는 국민혁명군 총정치부 주임, 중앙국방최고회의 상무위원, 국민당 중앙평의원, 총통부 자정이 된다. 사실, 이들 관직은 대부분 실권이 없는 허직이었다. 그는 일찌기 조카인 오여경에게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대회를 열면, 나와 같은 이런 소위 '원로'들을 주석단에 부른다. 사진을 찍을 때도 나를 앞에 서게 한다. 무석의 혜산니인과 같이 그저 장 속에 놓아두는 것이다." 국민혁명군 총정치부 주임은 당연히 실권이 있는 직책이다. 그러나 오치휘는 실제로 부임하지 않았다. 그는 일생동안 중앙감찰위원의 급여만 받았고, 그것도 실제로 가서 일을 하지는 않았다. 감찰원에 긴급공문이 있으면, 우우임이 비서장 적응을 그에게 보냈지만, 그는 뜯어보지도 않고 아무렇게나 서명해서 보냈다.

 

1943년, 국민정부 주석인 임삼이 중경에서 병사한다. 장개석은 오치휘를 새로운 주석으로 추대했지만, 그는 사양한다. 그의 말을 그대로 빌리자면, 오치휘가 사양한 이유는 3가지이다. 첫째, 나는 평소에 의복을 아무렇게나 간단히 입는다. 원수가 되려면 연미복을 입고, 넥타이를 매야 하는데, 나는 그렇게 하면 편하지가 않다. 둘째, 나는 얼굴이 못생겼다. 큰 인물같지가 않다. 셋째, 나는 웃는 것을 좋아한다. 뭘 보면 그냥 웃음이 나온다. 외국사절이 국서를 보내는데 웃는다면 그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

 

1946년, 국민정부는 훈정단계를 끝낸다고 선언하고, 남경에서 <<중화민국헌법>>을 선포한다. 오치휘는 제헌대표주석으로서 <<중화민국헌법>>을 장개석에게 넘긴다. 그리하여 '제헌대로(製憲大)"라는 말을 듣는다.

 

오치휘는 배분이 높은데, 자주 하고싶은대로 했다. 그는 일찌기 지팡이로 대립을 때리기도 했다. 쫓아가서 때리면서 욕을 해댔다. 나중에는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아쉽게도 이 개잡종을 따라잡지 못하겠다."

 

그는 아주 유머러스했다. 청나라과거에서 그는 거인이었는데, 나중에 그는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거인은 내가 사기로 얻은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쓴 글은 길지 않았다. 그러나, 모조리 전서로 썼다. 그랬더니 과거시험관이 글자를 알아보지 못했다. 다만 글자는 아주 잘 썼으니 합격을 시켜준 것이다. 한번은 한자 주음부호를 토론하는 회의상에서, 왕조(王照)라는 학자가 그와 얼굴을 붉히면서 논쟁을 벌였다. 왕조가 돌연 욕을 해댔다: "늙은 왕빠단, 그저 웃을 줄밖에 모른다." 주변의 사람들이 모두 대경실색했다. 분명히 한바탕 욕설전이 벌어질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오치휘는 웃으면서 한마디를 던졌다: "아, 네가 잘못 안 것이다. 왕씨성은 내가 아니다. 나는 오씨이다."

 

사람들에게 욕을 얻어먹었던 것은 오치휘가 항상 장개석을 위하여 앞장서서 깃발을 들고 응원을 했다는 점이다. 장개석이 나쁜 일을 벌이기 전날에 항상 오치휘가 나서서 여론을 형성한다. 이것때문에 민국18년 겨울, 풍옥상이 그에게 전보를 보낸 적이 있다: "창염노적(蒼髥老賊), 호수필부(皓首匹夫). 당과 국가의 원로로서 독불장군을 위하여 종노릇이나 하다니, 죽은 후에 무슨 면목으로 손중산 총리를 지하에서 만나볼 것인가라고 욕을 하는 사람이 있다. 선생은 이에 대하여 어떻게 해명하실 것인가?"

 

오치휘의 전서는 아주 유명하다. 민국에서 무적의 전서 서예가이다. 중경에 있을 때, 장개석은 그에게 "장금자원묘지(蔣金紫園墓碑)"의 전문800자를 써달라고 한 적이 있다. 오치휘는 당시 77세임에도, 정신을 집중하여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완성한다. 진포뢰가 이렇게 감탄했다: "원혼응중. 창경유력하면서도 힘을 바깥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해서전화의 정품이다."

 

1953년 10월 30일 오치휘는 타이페이에서 병사하니, 향년 88세이다.

 

우우임

 

 

 

우우임은 1879년 섬서 삼원현에서 태어난다. 청나라 광서때의 거인이다. <<반곡반소루시초(半哭半笑樓詩草)>>를 발간하여 당시의 정치를 풍자하였다는 이유로 청나라조정에 의하여 지명수배를 받고, 상해로 망명하여, 진단공학에 들어간다. 진단학원을 졸업한 후, 광복회와 동맹회에 가입한다. 1907년부터 <<신주일보>> <<민립보>>를 창간하여 민주혁명을 적극적으로 선전한다. 남경임시정부 교통부차장, 국민연군주섬총사령관, 심계원장, 감찰원장을 지낸 국민당의 주요인물이다. 1912년후에 남경정부 교통부장, 국민정부 심계원장, 감찰원장을 지내는데, 감찰원장을 34년간 맡았다. 나중에 국민당을 따라 대만으로 건너가서, 대만에서 15년을 지낸다.

 

만년에 대만의 우우임은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갈망했다. 그러나 끝까지 소원을 이루지 못한다. 1962년 1월 12일, 그는 일기에서 이렇게 적었다: "내가 죽은 후, 옥산 혹은 아리산의 나무가 많은 높은 곳에 묻어달라. 산은 높아야 되고, 나무는 커야 된다.그래야 시시때때로 대륙을 볼 수 있다. 나의 고향은 중국대륙이다."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 1962년 1월 24일 우우임은 진지하고 침울한 감정의 시작 <<망대륙(望大陸)>>을 완성한다.

 

장아어고산지상혜(葬我於高山之上兮), 망아대륙(望我大陸);

대륙불가견혜(大陸不可見兮), 지유통곡(只有痛哭).

장아어고산지상혜(葬我於高山之上兮), 망아고향(望我故鄕);

고향불가견혜(故鄕不可見兮), 영불능망(永不能忘).

천창창(天蒼蒼), 야망망(野茫茫),

산지상(山之上), 국유상(國有殤)

 

1964년, 우우임은 타이페이에서 병사한다. 그의 묘는 타이페이시 양명산 위에 있다. 옥산의 주봉에는 그의 조각이 있다.

 

"삼간노옥일고괴(三間老屋一古槐)

낙락건곤대포의(落落乾坤大布衣)"

 

이는 사람들이 우우임에 대한 간결한 평가이다.

 

근대서법사상의 대가로서, 우우임은 위비(魏碑)와 행서, 장초를 결합한 행초서(行草書)에 능했다. '우우임표준초서'를 만들었고, '당대초성(當代草聖)', "근대서성(近代書聖)", "중국서법사상 3개의 이정표중 하나"(나머지 둘은 왕희지, 안진경)으로 칭송받았다.

 

우우임은 서예에 뛰어났고, 1920년대에 "북우남정(北于南鄭)"(남정은 만주국 총리를 지낸 鄭孝胥를 가리킨다)라는 말이 있었다. 우우임은 1932년 상해에 '표준초서사'를 만들어, 알아보기 쉽고, 쓰기 쉽고, 정확하고 아름답게라는 원칙하에 중국한자의 초서체를 연구, 정리, 보급한다. <<표준초서천자문>>을 만드니, 영향이 아주 컸다. 그의 저작에는 <<우임시존>> <<우임문존>> <<우임묵존>> <<포준초서>>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