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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송)

경원당안(慶元黨案): 주희(朱熹)는 비구니를 첩으로 삼았는가?

by 중은우시 2012. 9. 19.

글: 월초(越超), 장수풍(張秀楓) 

 

남송영종 경원(慶元)2년, 일대거유 주희(朱熹)는 하룻밤만에 명성이 바닥에 떨어지게 된다. 주희는 그 후 몇년이 되지 않아, "납니위첩(納尼爲妾)", "위군자(僞君子)", "가도학(假道學)"이라는 질타와 욕설속에 비참하게 세상을 떠난다.

 

그렇다면, 역사상 주희는 '납니위첩'을 했던가? 사건의 진상은 어떠한가?

 

이 일의 근원을 추적해보면, '경원당안'부터 얘기해야 한다. <송사>권37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십이월 신미일, 금나라는 완안숭도를 파견하여 다음해 정단(正旦)을 축하한다. 그 달, 감찰어사 심계조(沈繼祖)는 주희를 탄핵한다. 조서를 내려 주희의 비각수찬직을 박탈하고, 궁관관직을 파면한다." 

 

이 기록에서 말하는 것은 남송 영종 경원2년 십이월(1196년)에 당시 감찰어사를 맡고 있던 심계조가 주희를 탄핵한 일이다. 심계조는 주희의 10대죄상을 열거했는데, "불경어군(不敬於君)", "불충어국(不忠於國)", "완모조정(玩侮朝廷)", "위해풍교(爲害風敎)", "사고지재(私故之財)"등등이다. 그중에는 "비구니 2명을 유인하여 첩으로 삼고, 매번 관직에 부임할 때마다 함께 갔다.", "집안의 며느리가 남편이 없는데 임신을 하였다" 이 뒤의 두 가지는 주희가 늙어서도 호색하였다는 것이다. 일찌기 두 명의 비구니를 유인하여 첩으로 삼았고, 관리로 있을 때 자주 곁에 데리고 다녔다는 것이고, 그의 집안에 며느리가 있는데 남편이 죽은 후에 임신을 했다. 이는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불륜으로 인한 것이다라는 것이다. 심계조는 이를 근거로 주희를 참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역사상 유명한 "경원당안"이다.

 

"경원당안"은 의문의 여지없이 잔혹한 정치투쟁이다. 송영종때 외척 한주(韓胄)가 한때 조정을 좌지우지했고, 주희의 가까운 친구이자 재상으로 있던 조여우(趙汝愚)는 그가 조정은 독단하는데 주요한 장애물이었다. 한주는 조여우를 치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제자들 중 관직에 있는 사람들이 아주 많아서, 잘못하면 자신의 발등을 찍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그는 '위학(僞學)'의 설을 만들어 조여우, 주희 및 그 문생(門生)들까지 타도하고자 했다. 원래 이 상소문은 당시 감찰어사로 있던 호모에게 초안하게 한 것이었는데, 나중에 호모가 태상소경을 승진하면서 언관의 자격을 잃어 잠시 보류하고 있던 것이었다. 마침, 심계조가 감찰어사로 승진하니, 한주는 호모가 초안해둔 상소문을 심계조에게 넘겨주고, 심계조가 황제에게 올렸다. 최종결과는 영종이 상소문의 내용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조여우는 영주로 귀양가고, 주희는 탄핵받아 삭탈관직당한다. 송영조는 도학이 위학이라고 선포하고, 도학의 전파를 금지한다. 그후에 도학선생은 '역당'으로 몰려 타도대상이 된다. 조정에 의하여 '위학역당(僞學逆黨)'으로 몰린 관리가 59명에 이른다.주희는 이 '위학역당'의 우두머리이다. 이로 인하여 주희의 여러 문생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혹은 숨어서 스스로 보신하고 혹은 다른 문하로 들어간다.

 

이렇게 보면, 한주, 심계조, 호모등이 고의로 주희를 모함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문제의 관건은 송녕종 조확(趙擴)이 왜 자신의 스승이자 당대의 거유에게 이런 심한 조치를 내렸느냐는 것이다. 기실 문제는 주희 자신에게 있었다.

 

주희는 실로 책벌레이다. 성격이 지나치게 강직했다. 송효종때 일찌기 연속 6번 상소를 올린 바 있다. 당시 탐관인 태주지부 당중우를 탄핵했다. 그리하여 많은 권력귀족들에게 미움을 산다. 송녕종이 즉위한 후, 재상 조여우의 추천으로 주희는 장각시제겸시강이 된다. 황제의 고문이 된 셈이다. 그리고 황제의 스승도 된다. 당시 주희는 이미65세로 이치대로라면 지족수기(知足守己)해야 한다. 그러나 그는 나이를 내세워 조정을 좌지우지하고 싶어했다. 한편으로 송영종에게 <대학>을 강의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상소를 올리거나 면담을 통하여 황제에게 "극기자신(克己自新), 준수강상(遵守綱常)"을 요구하고, 심지어 '상소를 올려 황제의 좌우가 권한을 잠탈한 잘못을 질책'하기 까지 하였다. 황제의 근신들이 황제를 허수아비로 만들지 못하도록 하라고 했으니, 황제가 그다지 좋아할 일은 아니었다.

 

생각해보라. 어느 황제가 혹은 1인자가 늙은 학자가 자주 자신의 곁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잘못을 지적한다면 누가 듣고 싶어하겠는가? 그래서 송영종은 아주 예의바르게 말한다: "당신은 나이가 많이 들엇으니, 당신이 이렇게 서서 강의하기 어려울까 우려된다. 그러니 궁관의 관직으로 가라." 그러나, 주희는 그래도 스스로 물러나지를 않았고, 시시때때로 관직을 사직하겠다고 황제를 협박한다. 송영종은 어쩔 수 없이 만류할 수밖에 없었다: "사직하신다는 말은 짐이 당신과 같은 현인을 우대하려는 본뜻에 맞지 않는 것같습니다." 황제가 말은 점잖게 했지만, 마음 속으로는 욕을 했을 것이다.

 

주희의 언행은 자연히 한주 일당의 원한을 산다. 그를 눈엣가시로 여기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심계조가 주희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게 된다. 송영종은 즉시 주희의 직을 박탈하고 궁관의 관직을 박탈한다. 심지어 문인 채원정도 쫓겨난다.  황제는 시원시원하게 처리했다. 아마도 누군가 주희를 탄핵해주기를 기다려왔다는 듯이.

 

더욱 치명적인 것은 주희가 글을 올려 자신이 '사고인재' '납기니녀(納其尼女)'등 여러가지 죄를 모조리 인정하고, '깊이 지난 날의 잘못을 반성하고(深省昨非), 지금 옳은 일을 찾아서 하겠다(細尋今是)"고 하여 참회하고 새롭게 태어나겠다는 의사를 표시한다. 주희가 '납니위첩'을 한 사실이 있는지에 대하여 역대이래로 논쟁이 끊이지 않았다. 문제는 만일 이 일이 터무니없는 것이라면, 주희는 왜 스스로 글을 올려 인정했을까? 만일 늙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부득이 타협한 것이라면, 주희의 이전의 성격에 비추어 맞지 않는다. 이 죄를 인정하는 상소는 후세에 주희를 '위군자'로 공격하는 주요한 근거가 된다.

 

일대거유가 이처럼 낭패한 지경에 처하다니, 주희 자신에게 얼마나 책임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