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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학/시련취화

왕영하(王映霞): 항주제일미인과 세 남자 이야기

by 중은우시 2012. 6. 19.

글: 방초아(芳草兒)

 

중화민국시절, 현대문학사상 왕영하는 대명이 자자하다. 그녀와 욱달부(郁達夫)와의 아야기는 '현대문학사상 가장 유명한 사랑이야기'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왕영하는 당시 '항주제일미인'으로 불리웠고, 당시 사람들은 그녀에게 "발제백(荸薺白)"이라는 별호를 지어주어, 그녀의 놀라운 미모를 나타냈다. 왕영하는 일생동안 두 번 결혼하여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첫결혼은 욱달부에게 시집간 것이고, 두번째 결혼은 종현도(鍾賢道)에게 시집간 것이었다. 두 번의 결혼 이외에 당시 특공왕(特工王)인 대립(戴笠)과 숨겨진 이야기가 있다.

 

1928년, 왕영하는 욱달부와 혼인을 거행한다. 재자가인의 결혼으로 온 도시가 떠들썩했다. 그해에 그녀는 20살이고, 욱달부는 32살이었다. 당시 유아자(柳亞子)는 욱달부에게 시를 지어 축하했는데, 거기에 나오는 "부충강상신선려(富春江上神仙侶)"라는 말이 한때 유행할 정도였다. 1940년, 두 사람은 이혼한다. 1942년, 왕영하는 당시 중경화중항공국 경리로 있던 종현도와 결혼한다. 결혼식은 아주 거창했고, 왕영, 호접, 김산등 당시의 대스타들이 모두 결혼식에 참석한다. 산성(山城) 충칭이 떠뜰썩했다. 당시에는 "종현도가 대미인을 납치했다"는 말이 돌았다.

 

왕영하는 1908년 항주에서 태어난다. 부친인 김빙손(金氷遜)은 어려서 죽었고, 그녀는 모친을 따라 외조부의 집에 살았다. 외조부는 항주의 명사인 왕이남(王二南)이다. 그래서 그녀는 모친의 성을 따르게 된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외조부로부터 시문을 배웠고, 국학의 기초를 착실하게 다졌다. 1923년 그녀는 절강여자사범학교에 입학한다.

 

항주여사범은 인재를 많이 배출했는데, 그중 왕영하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녀는 품행과 학업이 모두 우수했고, 용모도 출중해서, 항주여사범에서 아주 유명했다. 학생시절의 왕영하는 문학을 좋아하여 문단의 풍운인물들에 관심이 많았고, 욱달부의 문학적 재주에도 마음이 끌렸다.

 

1917년 21살의 욱달부는 일본에서 귀국하여 가족을 만날 때, 모친의 명으로 고향의 대갓집 규수인 손효정(孫孝貞)과 정혼한다. 나중에 옥달부는 손효정의 이름을 손전(孫荃)으로 개명시킨다. 그후 그는 안경에서 기녀 해당(海棠)과 애정행각을 벌이기도 하고, 북경에서는 기녀 은제(銀娣)고 빈번히 교류했다. 왕영하를 만나서야 비로소 욱달부는 방탕한 생활을 끝낸다.

 

욱달부와 왕영하의 만남은 우연한 기회에 이루어졌다. 그것은 1927년이다. 욱달부가 31살이고, 왕영하는 19살이었다. 왕영하를 만난 후 욱달부는 첫눈에 반한다. 왕영하도 자신이 흠모하던 대작가의 구애를 뿌리치지 못한다. 그래서 두 사람은 현대문단의 유명한 연애를 하게 되는 것이다.

 

1928년 4월, 욱달부의 명의상부인 손전이 여전히 고향에서 욱달부의 모친을 모시고 그를 기다리고 있는데, 욱달부는 왕영하를 품에 안는다.

 

욱달부는 왕영하에게 융중한 혼례를 거행해주지도 못했다. 왕영하는 애정의 단꿈에 빠져서 그런 것을 따지지 않았다. 결혼후 왕영하는 욱달부와 사랑의 집을 같이 건립하는 외에, 온갖 방법을 다하여 욱달부의 폐병으로 인한 신체의 건강을 회복시켜주기 위하여 애썼다. 욱달부는 '일기구종'의 형식으로 왕영하에 대한 애정을 매체에 공개한다. 사람들은 현숙하고 총명하며 아름다운 부인을 알게 된다. 이때 그들 사이에 첫째 아들이 출생한다. 부부의 애정은 깊었고, 5년간 달콤한 생활을 보낸다.

 

1933년, 욱달부 부부는 상해에서 항주로 온다. 그리고 "풍우모려(風雨茅廬)"를 짓고 거주한다. 항주로 옮긴 후, 두 사람은 당시의 상류사회와 많은왕래가 있었고, 사람들과 어울리기 좋아하는 왕영하는 당시 사교계의 스타가 된다.

 

왕영하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사람들은 찬탄을 금치 못했다. 당시 '풍우모려'에 가 본 적이 있는 일본의 역사학자 증정경부(增井經夫)는 이렇게 회고한다: "(왕영하)는 영화스타처럼 예뻐서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당시 그녀는 항주의 사교계에서 스타였다. 그녀는 좌석에서 주인의 신분으로 나에게 술을 계속 권하면서, '증정선생, 건배!'라고 하면서, 비운 잔을 뒤집어서 나에게 보여주었을 때, 그것은 확실히 사교에 익숙한 모습이었다"

 

신여성인 왕영하는 명분에 신경을 썼다. 처음부터 그녀는 욱달부가 손전과 이혼한 후 다시 결혼하고자 했다. 그러나, 욱달부는 계속 질질 끌어 그녀가 원하는 바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1932년 욱달부는 항주에서 병치료할 때 왕영하에게 쓴 칠률 <등항주남고봉>에서는 왕영하를 '첩'으로 본다는 것을 은연중에 드러냈다.

 

나중에 또 한가지 일이 생겨서, 왕영하의 '첩'의 신분은 명실상부하게 되어 버린다. 욱달부의 모친 70세 생신때, 욱달부는 왕영하를 데리고 부양(富陽)의 고향으로 축하행사에 참석한다. 옥달부의 모친은 높은 자리에 찭아 있고, 원래는 각 부부가 차례대로 절을 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욱달부의 모친은 갑자기 생각을 바꾸어, 남자는 남자대로, 여자는 여자대로 윗사람부터 아랫사람으로 순서대로 절을 하도록 했다. 욱달부의 형제는 세 명인데 그가 막내였다. 그의 처가 절을 할 순서가 되엇을 때, 왕영하는 앞으로 나가 절을 하려고 한다. 손전은 그 모습을 보고 왼쪽에서 빠른 걸음으로 끼어들이 왕영하의 앞에서 시어머니에게 절을 한다. 욱달부이 모친은 손전이 절을 마치자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고, 왕영하에게는 절을 할 기회도 주지 않는다.

 

욱달부의 시와 욱달부 모친 및 손전의 태도는 분명하게 욱씨집안에서 왕영하를 '첩'으로 대접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왕영하로서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생각도 달랐고, 나이도 차이가 있고, 성격도 차이가 있었다. 그리하여 욱달부와 왕영하의 사이의 간격은 갈수록 넓어진다. 부득이 왕영하의 외조부가 나서서 욱달부에게 '보증서'와 '판권증여서'를 써서 왕영하에게 주도록 한다. 욱달부는 왕영하가 물질, 재물을 무엇보다 소중하게 생각한다고 생각했고, 세속여자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환멸의 비애'가 마음 속에서 솟아났다. 그후 두 사람의 오해는 갈수록 깊어지고 간격은 갈수록 넓어졌다.

 

나중에 욱달부는 집안에서 절강교육청 청자이 허소예(許紹隸)가 왕영하에게 쓴 러브레터를 보게 된다. 그리고, 왕영하가 대립과 애매한 관계라는 것도 발견한다. 부부는 이로 인하여 반목하게 된다.

 

1990년대초, 욱달부의 친구이자 저명한 시인인 왕정지(汪靜之)는 글을 써서 다른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비밀을 털어놓았다. 이 글에서 왕영하는 일찌기 무한에서 대립과의 사이에 가진 아이를 낙태한 바 있다고 썼다.

 

왕정지와 욱달부는 1922년 <여신>출판1주년행사에서 만난 후 가까워진다. 그의 처인 부죽인(符竹因)은 바로 왕영하의 항주여사범 동기동창생이다. 양가는 이로 인하여 밀접하게 왕래했고 교분이 깊었다. 왕정지의 회고에 따르면, 1938년 봄여름이 교체하는 시기에 그는 집안 사람들과 무창으로 피난간다. 당시 욱달부의 집안도 모두 무창에 와 있었다. 양가는 이웃으로 자주 왕래했다. 태아장대첩이후 욱달부는 정부위로단을 따라 전선으로 가서 위문을 했다. 하루는 왕영하가 부죽인에게 말한다: "뱃속에 아이가 생겼다. 항전으로 피난가는 시기니 움직이기 불편해서 나는 병원에 가서 의사에게 낙태해달라고 하였더니, 의사가 '남자와 같이 와야 낙태가 가능하고, 남자가 동의하지 않으면 낙태할 수 없다'고 한다. 욱달부는 위문단으로 갔으니, 여러 날이 있어야 돌아올 것이고, 그때는 애가 너무 커서 낙태하기 힘들 것이다. 작을 때 지워버리는 것이 낫겠다. 죽인언니. 내가 정지에게 부탁해서 병원에 가서 내 남편인 것처럼 하면 의사도 낙태를 시켜줄 것이니, 남편을 한번 빌려달라." 부죽인은 당연히 동의했고, 왕정지에게 왕영하를 데리고 한구의 개인 병원으로 가서 유산수술을 받도록 해주었다.

 

한참이 지난 후 왕정지는 욱달부의 집으로 가서 돌아왔는지 보러 갔는데, 왕영하의 모친은 "돌아오지 않았다"고 얘기했다. 왕정지는 욱달부와 왕영하의 장남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한 것을 보고 왜 그렇게 기분이 좋지 않은지 물어보았다. 아이는 어젯밤에 엄마가 돌아오지 않았다고 말했고, 왕영하의 모친도 왕정지에게 왕영하가 어젯밤 작은 자가용을 타고 간 후에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다음 날 왕정지는 다시 한번 가보니, 왕영하는 행복하고 흥분한 모습이었다. 그에게 대립의 서양식정원집이 얼마나 화려하고 얼마나 예쁜지를 얘기했고, 얼굴에는 부러워하는 기색을 드러냈다. 왕정지는 즉시 그녀가 밤에 돌아오지 않았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왜 욱달부가 외출했을 때에 낙태를 했는지도 알았다. 왕정지는 <왕영하의 하나의 비밀>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당시 이것을 욱달부에게 얘기할지 말지를 고민했다. 이치대로라면 숨겨서는 안된다. 진실을 친구에게 얘기해주어야 한다. 그러나 욱달부가 화가 난 나머지 얘기가 새나갈까봐 걱정되었다. 대립은 국민당의 특무두목이고, 사람들이 살인마왕이라 부른다. 만일 욱달부가 얘기를 퍼트리면 대립은 절대 그의 목숨을 그냥 놔두지 않을 것이다. 너무 위험했다. 이렇게 생각한 후 나는 욱달부에게 얘기하지 않기로 결정했고, 다른 사람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나중에 왕정지는 무한을 떠나 광주로 간다. 얼마후 욱달부도 남양으로 간다. 이 일은 계속 왕정지가 마음 속에 품어두고 있었다. 다만, 우연한 기회에 왕영하가 욱달부를 질책하는 두 편의 회고글을 보게 된다. 욱달부를 변호할 목적으로, 왕정지는 글을 써서 수십년전의 이 지난 일을 남겼다. 이 글은 지금 상해노신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왕정지는 욱달부 부부와 모두 좋은 친구이다. 그리고 욱달부는 생전에 대립에 대하여 의심을 품었다. 이를 보면 왕정지의 회고는 믿을만하다.

 

욱달부와 대립은 모두 절강출신으로 동향이다. 대립은 1912년 항주의 절강제1중학당에서 공부한 바 있다. 이 학교의 전신은 욱달부의 모교인 항주부중학당이다. 이를 보면, 욱달부와 대립은 동창이다. 당시의 교분은 동향동창관계를 아주 중시했다. 이 관계는 아마도 욱달부, 대립이 교류하게 된 계기일 것이다.욱달부가 1936년 2월 14일자 일기에서 쓴 바에 따르면, "우농(雨農, 대립) 선생에게 글을 써서 보냈다. 귀비주를 다시 보내 준 것에 감사했다." 이것은 대립의 이름이 처음으로 욱달부의 일기에 나오는 것이다. 당시 욱달부는 이미 복주로 가서 복건성정부참의로 있었다. 대립은 귀비주를 복주까지 보내고, 그리고 '다시 보냈다' 이를 보면 욱달부, 대립은 항주에서 아주 밀접하게 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왕영하와 대립의 간통사실을 알게 된 후, 욱달부는 분노가 극에 달한다. 왕영하는 그러나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한다. 아예 인사도 없이 떠나버린다. 욱달부는 이로 인하여 밤에 잠을 못이룬다.

 

욱달부는 신문에 "경고도처(警告逃妻, 도망간 처에게 경고함)"라는 글을 싣는다. 그리하여 왕영하는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된다. 그리하여 대립이 중간에 사람을 넣어서 욱달부를 설득하여, 욱달부는 다시 신문에, "사죄글'을 올린다. 왕영하도 '회과서(悔過書)'를 쓴다. 쌍방은 화해했다고 말한다. 이때는 무한의 국면이 긴장되었고, 욱달부는 싱가포르 성주일보의 초청을 받아 왕영하를 데리고 싱가포르로 간다.

 

왕영하는 싱가포르에 도착한 후, 매일 욱달부와 싸운다. 욱달부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훼가시기(毁家詩記)'를 써서 홍콩의 <대풍순간(大風旬刊)>에 보내어 발표한다. 그 내용은 2년동안 욱달부, 왕영하의 혼인관계의 모든 것을 적은 것이다. 19수의 시와 1개의 규사(閨詞)로 되어 있는데, 크고 작은 모든 일을 적었다. 거기다 주석도 달고, 말투도 아주 심했다. 왕영하는 체면이 바닥에 떨어지고, 화가나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리하여 서신을 몇 통 써서 <대풍순간>에 보낸다. 서신에서 그녀는 욱달부를 "세상 사람들을 속이는 무뢰한 문인" "사람의 껍질을 쓴 여인을 속이는 짐승", "미치고 변태적인 소인"이라고 욕했다. 서로 상대방의 상처를 헤집었고, 냉전상태로 별거한다. 결국 왕영하는 두번째로 가출하였다는 뉴스가 나온다.

 

1940년 8월 중순, 왕영하는 혼자서 귀국한다. 홍콩을 거쳐 중경으로 간다. 욱달부, 왕영하 두 사람은 싱가포르, 홍콩, 중경에 각각 이혼했음을 공고한다.

 

왕영하가 떠난 후, 욱달부는 냉정해지자, 여전히 그녀가 그리웠다. 그래서 모자의 정으로 왕영하의 마음을 움직이고, 그녀가 다시 돌아오기를 기대했찌만, 모든 것은 이미 되돌릴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