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사회/중국의 성씨

중국의 성씨(姓氏)

by 중은우시 2012. 3. 27.

글: 여이위(余以爲)

 

'전국공민신분정보시스템"의 도움으로 어떤 사람이 중국공민의 이름에 대하여 통계를 내본 적이 있다. 그는 지역적인 특색에 주목했다. 북방도시에는 왕(王)씨성이 가장 많고, 상해에는 장(張)씨성이 가장 많으며, 광주에는 진(陳)씨가 가장 많았고, 서녕에는 마(馬)씨성이 가장 많았다. 이들 지역특징은 모두 유래가 있다.

 

성(姓)을 글자의 구조에서 알 수 있듯이 혈연관계를 나타낸다. 한자문화권의 초기 성에는 희(姬), 규(嬀), 사(姒), 자(子), 강(姜), 영(嬴)이 있다. 그들은 각 민족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강은 강(羌)족을 대표하며 염제(炎帝)의 후예이다. 희는 황제와 주무왕의 후손이다; 규는 우순(虞舜)의 후손이다; 사는 하우(夏禹)의 후손이다; 자는 상탕(商湯)의 후손이다; 영은 진왕실의 성이다. 늦어도 서주말기까지, 이들 부족간에는 구분이 분명했다.

 

현대의 성(姓)은 기실 고대의 씨(氏)에 해당한다. 씨(氏)라는 것은 저(氐), 저(底)와 근원이 같다. 바닥이라는 뜻에서 '관적(貫籍)'이라는 의미가 파생되었다. 그리고 '관적'에서 성의 갈래가 파생되었다. 씨는 주로 국명이나 지명에서 따왔다. 많은 한족들은 성을 가지고 이천여년전에 조상이 살던 거주지를 찾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범(范)씨의 조상은 하남 범현에서 생활했다, 추(鄒)씨의 조상은 산동성 추평에서 생활했다. 주(周)나라때, 주왕실은 바티칸과 유사했고, 신앙적인 의미가 행정적인 의미보다 강했다. 각국은 고대희랍의 도시국가와 유사했다. 아주 큰 자주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스인은 성씨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조상의 지역을 찾아갈 단서가 없다.

 

국가가 많이 들어서면서 주왕실의 권위는 쇠약해진다. 혈통의 귀천도 차이가 약화된다. 지역의식은 강화된다. 사람들은 관적을 혈연보다 중요하게 여기게 된다. 정치용어로 표현하자면, 지방주의가 민족주의를 압도했다. 성을 쓰는 경우는 적었고, 씨를 쓰는 경우는 많아졌다. 이렇게 천천히 씨가 성의 지위를 대체하게 된다. 진,한의 천하통일로 지방주의는 소멸된다. 성이라고 부르지만 실제는 씨인 것이다. 성은 다시 혈연을 표기하는 기능을 회복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관적을 중시하는 개념은 계속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이합비(李合肥, 합비출신인 이홍장을 가리키는 말), 원항성(袁項城, 항성출신인 원세개를 가리키는 말)과 같은 별호가 나타나고, 위경생(魏京生), 등호생(藤滬生), 주수생(朱穗生)과 같은 정식성명도 나타나는 것이다.

 

왕(王), 장(張), 유(劉). 이(李)의 4대성은 씨에서 유래하지 않았다. 각각 4건의 역사사건과 관련이 있다.

 

전국시대말기 육국이 패망하면서, 왕공귀족들은 속속 시골로 내려가서 성과 이름을 숨기고 산다. 몇십년이 흐르자, 진승, 오광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왕후장상에 씨가 따로있느냐"는 구호를 외친다. 이 구호의 숨은 의미는 "육국의 왕후장상에 후손은 없는가?"라는 것이다. 왕손들이 나와서 하층농민이 혁명을 이끌어달라는 것이다. 나중에 반란군은 과연 초회왕이 손자를 찾아내어 명의상의 지도자로 삼는다. 일세를 풍미한 서초패왕 항우도 육국의 고관자제라 할 수 있다. 당시는 현재의 중동과 유사했다. 부족수령은 평민백성보다 호소력이 크다. 육국의 왕공귀족의 후손은 당연히 아주 많은데 모두 왕(王)으로 성을 바꾼다. 춘추시대에는 잘 보이지 않던 왕씨가 진,한시대에 돌연 많아진다. 한나라때 왕씨 중에 많은 인재가 나타나는데 가장 유명한 인물은 당연히 왕망이다. 위진남북조시대에 이르러서는 왕씨가 사대부계층을 대표하게 되고, 황실을 견제하는 하나의 역량이 된다. 주나라때부터 이러져 내려온 이 귀족혈맥은 수, 당때 과거제도가 실시된 이후부터는 점차 평범해진다. 현재 왕씨는 북방에 많고 남방에 적다. 왜냐하면 전국말기에 남방에는 초나라만 있었고, 다른 나라는 모조리 북방에 있었기 때문이다.

 

유씨와 이씨의 팽창은 각각 대외확장에 주력한 두 왕조와 관련된다. 대량의 이민족이 귀순하면서, 이민족들이 가장 먼저 한 것은 황실의 성을 자신의 성으로 삼은 것이다. 한나라의 건립초기에 유씨성은 아직은 숫자가 적은 성이었다. 통치기반을 확대하기 위하여, 유씨성을 사성으로 내리는 방식으로 인심을 회유한다. 심지어 항우의 후손들에게까지 그렇게 했다. 남방에는 양(楊)씨성이 많은데 이는 수나라의 남정과 관련있다. 광주에는 진씨성이 많은데, 이것은 진나라의 개국황제 진패선이 일찌기 영남에서 기업을 일으킨 것과 관련있다. 이와 밴대로 확장보다는 내치에 주력한 진, 송, 명의 세 왕조의 황족성은 그다지 늘어나지 않았다. 한족의 성중 하나는 귀순해오는 이민족을 위하여 준비해 두었다. 바로 김(金)이다. 흉노왕자인 김일제가 한나라 황제에게 받은 사성이 '김'이었고, 만청황실의 성씨인 애신각라의 만주어 의미는 금(金)이다. 많은 애신각라씨의 후손들은 현지 한족성으로 김(金)을 쓰고 있다.

 

장(張)씨성의 팽팡은 왕조의 흥망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한나라때 도교가 흥성하면서 많은 도교신자들이 성을 장씨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나라말기에 장씨성을 가진 인물이 대거 출현하게 된다. 삼국연의는 마치 유씨, 장씨 두 성씨의 천하인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도교의 풀뿌리성은 장씨성의 저명한 인물이 총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주요성씨들 중에서는 뒤쳐지게 하였다. 장씨성을 가진 인물들 중에서 반란을 일으킨 인물이 비교적 많다. 한말의 장각은 말할 것도 없이, 명말의 장헌충, 청말의 장락행(張樂行), 민국의 장학량, 당대의 장춘교가 있다. 또한 종교적 원인으로 마(馬)씨는 서부일부도시에서 가장 많은 성씨가 되었다.

 

호남의 성씨는 특별히 집중되어 있다. 유, 왕, 장, 이의 몇개 대성이 많다. 호남이 한문화권에 통합된 시기가 마침 한나라에서 당나라로 넘어가고 이 몇 개의 대성이 발흥하던 시기였다. 통합된 과정은 한화가 위주이고, 이민이 보조적이다. 그래서 대성이 많고 소성이 적다.

 

한민족은 시작부터 지금까지 외래문화와 외래혈맥을 계속 받아들였다. 공씨의 조상인 공구를 예로 들면, 그는 송양공의 후손이다. 송나라왕실은 상나라의 후예이다. 이 상나라의 후예는 주나라문화의 적극적인 숭배자가 되었다. 그는 "주나라는 하나라, 상나라 이 대의 제도를 모두 본받았으므로 문화가 번성했다. 나는 주나라문화를 따르겠다(吾從周)"라고 말한다. 본받고 계승하는 것이 이렇게 조화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