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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사회/중국의 성씨

소씨(蕭氏)가 묘비에는 왜 장씨(蔣氏)로 쓰는가?

by 중은우시 2009. 4. 2.

글: 소방(蕭放)

 

아침에 일어나니, 햇볕이 눈부시다. 거실에서 오가다가 서가에 있는 9차수정 <<장소가보(蔣蕭家譜)>>가 나를 향해 손짓하는 것을 보았다. 원래 본과 과정의 강의계획조정을 하려고 생각했던 나는, 돌연 족보를 읽어보고싶다는 알수없는 충동에 휩싸였다. 물론, 이런 충동이 아무런 이유없는 것은 아니다. 며칠전 가보망(家譜網, www.jiapu.com)의 손님으로 몇몇 매체의 친구들과 함께 족보를 주제로 대화한 적이 있다. 가보망은 현재 중국에서 새로 개설된 전문웹사이트로, 전통족보를 디지탈화하고 가족트리를 만드는 것을 주요업무로 하고 있다. 들은 바에 의하면, 이는 현재 보기드물게 네트워크자원공유를 중시하는 웹사이트중 하나라고 한다. 가보망의 활동중에서, 나는 내 자신의 가족이야기를 하는 것이 있다. 우리 가족은 소씨의 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돌아가신 조상들은 모두 장공장모(蔣公蔣母)라고 칭한다. "생소사장(生蕭死蔣)", 즉 살아서는 소씨, 죽어서는 장씨가 우리 집안의 전통이다.

 

어릴 때 조부등 선조의 묘비에 모두 "장공모모지묘(蔣公某某之墓)"라고 새겨진 것을 보고 조금 이상하게 생각했었다. 그래서 어른들은 우리에게 가족의 이야기를 해주게 되었다. 이것은 한 장씨성의 서당선생으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이다. 이 서당선생은 외지사람이었는데, 그는 영산(英山)에서 부유한 소씨(蕭氏)에게 데릴사위로 들어가서, 소씨성을 쓰게 된다. 나는 이 내력이 불분명한 서당선생에게 아주 호기심을 느꼈다. 나는 혹시 이 사람이 송나라말기 원나라초기에 난을 피해서 온 문인이 아닐까 추측해 보았다. 우리 가족의 글공부하는 전통은 혹시 그로부터 유전된 것은 아닐까. 이들 추측은 9차수정 <<장소가보>>에 "유장입소기(由蔣入蕭記, 장씨가 소씨로 입적한 기록)"를 읽고서 분명해졌다.

 

우리 지맥은 의흥(宜興)에서 황산(黃山)을 거쳐 강서(江西)로 들어와 영산으로 온 1대조인 장씨성의 발현공(發顯公)으로부터 시작한다. 발현공의 이름은 필거(必擧)였는데, 남송때인 신미년(1151년)에 진사가 되고, 관직은 이부시랑에 이른다. 나중에 모친이 돌아가시면서 사임하고 은거하였다. 여러차례 이사를 했는데, 최종적으로 영산에 정착한다. 그리고 그는 영산, 악서, 잠산, 회녕, 광산 다섯개 현의 장씨성의 시조가 된다. 발현공이 죽은 후, 영산의 유림하 양수교에 매장한다. 발현공의 아들인 만호공(萬浩公)은 영산에서 잠산으로 이사를 간다. 그리고 원일(元一), 원이(元二), 원삼(元三)의 여러 아들을 낳는다. 원일공은 다시 성일(省一), 성팔(省八)의 두 아들을 둔다. 성팔공이 바로 위에서 말한 서당선생이다. 그는 잠산에서 나와서, 영산 동하에서 학생을 가르킨다. 그 동네의 원외랑인 소유고(蕭維高)는 그를 높이 평가한다. 소씨는 원래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어려서 요절했다. 그리하여, 미혼의 동양식(童養, 민며느리)인 후씨(侯氏)를 양녀로 삼는다. 소씨는 후사를 잇기 위하여, 장성팔을 데릴사위로 들이게 된다. 성팔공은 아들 자재(子才)를 낳고, 자재부터는 소씨성을 쓰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그는 영산동하 소씨의 시조가 된다. 성팔공은 비록 아들이 소씨성을 계승하도록 하였지만, 원래의 성씨를 잊지 않고, 이후 그의 후손들은 "살아서는 소씨성을 쓰지만, 죽어서는 장씨성을 쓴다"는 전통을 확립했다. 소자재는 홍건적의 난때, 여러 무리를 이끌고 천마채에 자리를 잡고 동네를 보호했으며, 양식을 보내어 이재민을 구해주었다. 그리하여 주부(主簿)의 관직을 얻는다. 죽은 후에는 영산동하의 대옥토대에 묻힌다. 지금 이곳은 현급문화재보호단위가 되었다.

 

족보는 가족의 역사문헌이다. 단순히 가족의 원류를 기록할 뿐아니라, 윤리와 도덕을 전승한다. 영산의 소씨종족은 은공의 소씨성을 이어받았지만, 장씨혈족이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명나라말기에 족보가 불타면서 청나라 강희초기에 장소족보를 다시 만들었다. 건륭42년 회녕, 잠산, 영산 세 속의 장, 소씨 두 개성은 족보를 합하여 하나로 만든다. 통일된 항렬을 정한다. 이렇게 세 곳의 후손들이 비록 성씨는 장씨와 소씨로 다르지만, 족보의 원류나 항열 파는 같았다.

 

족보는 가족의 문화백과사전이다. 전통가족은 아주 강한 가족자치체였다. 족보는 강렬한 제약과 봉사적인 의미를 지닌다. 우리 가족문화는 일찌기 봉건문화로 치부되어 철저히 청산된 바 있다. 여기에 현대사회경제활동의 변화로, 젊은이들은 가족문화에 대하여 비교적 낯이 설다. 많은 젊은이들은 족보를 구경해본 적도 없다. 그러므로 어떻게 족보문화를 현대사회에 계승할 것인가는 곤란한 점이 있다. 그러나 필자는 어쨌든 방법이 곤란보다는 많다고 본다. 먼저,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은 언제나 정신적인 생존동력을 추구한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어디서 왔는지에 호기심이 있고, 명예감과 자부심이 있다. 사람은 자기가 가족문화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알고 싶어한다. 다음으로, 중국인들을 가족을 중시하고, 혈친을 중시하는 정서가 아직 바뀌지 않았다. 셋째는 사람은 친척들간에 서로 도울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족보문화는 현대에도 생존의 공간이 있다.

 

중국굴기에 수반하여, 중국전통문화가 부흥하고 있다. 우리가 보는 것은 청명절을 포함한 전통명절이 이미 국가공휴일로 지정된 것이다. 이는 전통문화가 정부측면에서 중시된다는 표지이다. 족보는 전통사화의 중요한 문화현상이고, 현대의 족보문화부흥도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고 있다. 지난세기말 민간에서 족보를 편찬하는 현상은 보편적이 되었다. 사람들이 친족관계를 중시하고, 혈친간의 동질성을 중시하는 것이 조화사회를 건설하는데도 도움이 된다.

 

우리는 오늘날 사회환경에서 중대한 변화를 맞이하고 있다. 가족은 문화개념이고, 가족구성원간의 관계는 주로 혈친동질성에 기초한다. 우리의 족보의 의미는 변화했다. 오늘날 족보는 주로 사회서비스적인 의미를 지니고, 조상을 존중하는 정신을 체현하여 뿌리의식을 중시하고 가족윤리의 전통을 계승하는 것이다.

 

이상의 고려에 근거하여, 우리는 전통족보를 현대사회의 젊은이들의 필요에 맞추어가야 한다. 그러면 족보를 기록하는 전통적인 방법이 바뀌어야 한다:  첫째는 족보원류를 소개하는 것을 중시하고, 가족중 역사문화명인 자원을 발굴하는 것을 중시하고, 상응한 기념활동을 펴고, 선조를 기념한다; 둘째는 가족사와 보통인물전의 비중을 강화하고, 더 많은 보통사람들이 족보전기에 기록되도록 함으로써 족보를 보통민중의 역사서로 만든다; 셋째는 족보를 가족관계의 유대를 강화하도록 한다. 종친간에 서로 돌봐주고 서로 격려하며, 사람들에게 특수한 사회적 보장을 제공한다. 이것은 젊은이들로부터도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족보를 읽을 뿐아니라, 실제행동으로 자신의 족보를 쓰게 될 것이다.

 

동시에 우리는 현대정보기술수단을 충분히 활용해야 한다. 현대사회의 업무와 학업의 필요에 따라 떨어져사는 가족들이 시공을 초월하여 함께 향유할 교류의 플렛폼이 필요하다. 며칠전 가보망의 활동중에서, 나는 그들이 현대디지탈기술수단을 이용하여 전자족보를 만드는 것을 보았다. 나는 이것이 현대사회의 종족을 연결시키는 새로운 방향이라고 본다. 그것은 친족간의 긴밀한 연락을 실현하고, 친족의 정과 가족의 이야기를 나누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