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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민국 후기)

만영(滿映): 일본의 문화침략도구

by 중은우시 2010. 7. 21.

글: 석학봉(石學峰)

 

"만영(滿映)"의 풀네임은 "주식회사만주영화협회(株式會社滿州映畵協會)"이며, 1937년 일본 관동군이 동북 장춘에 만든 영화관리, 제작, 발행, 상영을 하는 문화기구였다. 이 '만영'은 일본군부가 중국에 대하여 문화침략을 하는 도구로 활용되었다. '만영'의 8년에 걸친 존속기간동안 제작한 다큐멘터리, 뉴스, 스토리는 하나의 예외도 없이 모두 일본의 중국침략정신을 선전하고, '일만협화(日滿協和)'를 고취시키며, 일본군국주의의 침략확장정책을 미화하며, 중국인민을 노예화시키는 '정신아편'이었지, 진정한 의미에서의 영화예술작품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만영'은 1937년 8월부터 1945년 8월 일본이 투항할 때까지의 이 8년동안 도대체 얼마나 많은 일본침략정책을 미화하고, 중국인민을 노예화하는 '정신아편'을 찍었던가? 통계에 따르면, '만영'은 각종 영화 877부를 찍었다고 한다. 그중 다큐멘터리가 189부, 뉴스가 680부, 이야기가 108부이다. '만영'이 당시 중국동북지역의 영화발행상영을 독점하고 있었고, 다른 영화의 상영을 엄금했으므로, '만영'은 동북삼성의 각지 영화관의 스크린을 모두 장악했다. 이리하여 중국인의 사상, 정신에 심각한 해를 끼친다. 이와 함께 '만영'은 돈도 많이 번다.

 

예를 들어, '만영'이 촬영한 <<'만영'통신>> <<만영시보>> <<만주아동>>등의 뉴스영화는 주로 일본관동군 및 만주국의 중대한 정치활동을 기록하였는데, 모두 일본관동군이 만든 만주국을 포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는 학교의 중학생, 초등학생들에게 '일본국책교육'과 '사상노예화교육'을 실시했고, 동북각지의 초중등학생은 반드시 정기적으로 관람해야 했다. 중국학생의 영화비용은 학비와 함께 납부해야 했다. 당시에 이를 경험한 동북지방의 노인은 '중국인들에게 돈을 내고 일본인의 망국노교육을 받게 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다큐멘터리영화, 뉴스영화의 적나라한 일본식민침략정책에 대한 선전, 일본군과 만주군의 선전, 노예화교육이외에 '만영'이 촬영한 절대다수의 스토리영화도 영화예술을 수단으로 하여, 일본의 침략정신을 선전하고, 일만협화를 고취시키며, 일본군국주의의 침략정책을 미화하고, 중국인민을 노예화시키는 정신적 아편이었다.

 

'만영'이 촬영한 첫번째 스토리영화인 <<장지촉천(壯志燭天)>>은 1938년에 찍었다. 평정여(坪井與)가 감독을 맡고, 만주국치안부의 위탁을 받아 촬영하였는데, 영화는 코미디의 형식으로 동북의 만주국국군의 생활을 측면에서 미화하여, 강렬한 정치적 색채를 띄고 있었다. '만영'이 같은 해에 촬영한 또 다른 스토리영화인 <<대륙장홍(大陸長虹)>>도 만주국경찰을 칭송하는 영화이다. 지나치게 만주국경찰의 이미지를 좋게 그렸다. "만영"의 초기 스토리영화에는 <<국법무사>> <<연귀>> <<전원풍광>>등등이 있는데, 하나의 예외도 없이 모조리 적나라하게 일본의 침략정책을 선전하고 만주인민의 정치교화를 주제로 한 영화들이다.

 

1938년 하반기부터 "만영"은 일본군측의 요구에 따라, 일본인여배우인 이향란(李香蘭)이 출연하는 부드러운 애정영화를 찍는다. 일본여배우인 이향란은 본명이 산구숙자(山口淑子)이다. 1920년에 중국에서 태어났고, 북경에서 중학교를 다닌 적이 있어 표준적인 중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1933년, 일본인들이 봉천방송국에 '만주신가곡'이라는 프로그램을 만드는데, 막 연예계에 진출한 산구숙자는 그들의 눈에 든다. 그리하여 만주신가곡을 부르는 여가수가 된다. 중국인의 반감을 누그러뜨리기 위하여, 방송국은 그녀에게 일본이름이 아닌 중국이름 이향란을 사용하도록 한다. 마찬가지 이유로, '만영'이 <<밀월쾌차>>를 찍을 때, 영화내에서 노래를 부르는 여주인공 신부의 역할을 할 사람을 찾는데, 관동군 보도부의 추천을 받아 북경에서 중학에 다니던 산구숙자가 다시 뽑히게 된다. 이때부터 이향란의  이름은 은막에 나타나고, 일본이 투항할 때까지 계속된다.

 

이향란이 주연한 영화 <<밀월쾌차>>는 주로 신혼부부가 막 결혼한 후의 자랑스럽고 즐거운 심정을 그렸다. 그러나 효과는 그리 좋지 않았다. 다만 이향란은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진다. 그후 이향란은 속속 중국소녀의 역할을 맡아서 중국인민의 눈에 띄게 된다. 예를 들어, <<부귀춘몽>>, <<원혼복구>>, <<철혈혜심>>, <<황하>>등이 있다.

 

순진한 중국소녀역을 많이 연기한 후에, '만영'은 이향란을 일본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줄 아는 중국소녀의 이미지로 이용한다. 그리고 일본남자를 사랑하는 허구의 배역을 수행한다. 예를 들어, "만영"과 일본 동보가 합작한 영화인 <<동유기>>는 만주국의 농민이 동경으로 가서 그들의 일본에 간지 오래된 친구를 찾아가는 내용이다. 이 영화는 일본군국주의자의 중국에 대한 강렬할 멸시와 차별대우를 볼 수 있다. 친구를 찾아가는 중국농민은 갖은 추태를 다 보인다. 그들의 친구인 왕씨는 허영심이 있고, 이기적이며, 허풍이 세고, 거짓말을 잘하는 것으로 그렸다. 이와 비교하여 일본은 선진적이고 부유하며, 일본인들은 예의도 바른 것으로 그렸다. 이향란이 연기한 여금은 일본의 한 회사의 타자수인데, 그녀는 유려한 일어를 구사했다. 그리하여 두 농민과 일본인과의 의사소통을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그녀는 중국의 일본유학생과 사랑에 빠지는데, 마지막에는 모두 함께 돌아가서 '신만주'를 건설하자는 내용으로 끝난다.

 

'만영'과 일본 송죽이 합작한 스토리영화 <<영춘화>>에서 이향란은 백려를 연기하는데, 마찬가지로 유려한 일본어를 구사한다. 만주국의 일본인과 관계가 밀접하고, 여러가지 방법으로 중국청년을 도와준다. 이 두 가지 배역을 통하여 일본침략자들이 고취하고자 하는 '중일제휴, 공존공영'과 '오족협화'의 구호를 선전하는데 이용되었다.

 

일본의 침략전쟁으로 중국내지로 진격할 때, "만영"은 다시 일본 동보와 합작하여 '대륙삼부곡'을 만든다. 영화를 통하여 일본의 중국침략을 선전한 것이다. 소위 '대륙삼부곡'은 이향란과 동보의 유명연기자 장곡천일부(長谷川一夫)가 공동주연한 <<백란지가>>, <<지나지야>>, <<열사적서언>>이다.

 

<,백란지가>>는 비록 '만철'에서 일하는 일본청년엔지니어가 중국농촌아가씨인 설향을 사랑하는 사랑이야기이지만, 그안에 소개되는 각종 내용은 일본당국의 중국민중에 대한 노예화교육의 내용을 담고 있다. 영화에서 표면적으로 얘기하는 것은 사랑이야기이지만, 실제로 선전하는 것은 일본과 만주는 한가족이라는 일본의 오족협화의 침략사상을 담고 있다.

 

<<지나지야>>에서 얘기하는 것은 일본인을 아주 미워하는 전쟁고아가 남자주인공의 성실함과 낭만적인 사랑에 감동받아 결국 그 일본선원을 사랑하고 같이 결혼한다는 이야기이다. 여기서도 '만영'이 일관되게 사용해온 부드러운 애정이야기방식을 채택하면서, 침략일본군의 '공존공영'정책을 선전하였다.

 

<<열사적서언>>이라는 영화도 '만영'이 자주 써벅은 중국여자가 일본청년을 사랑한다는 이야기이다. 이는 일본의 중국에 대한 사상교화 식민교육의 적나라함을 보여준다. 당시 일본이 중국인의 식민화선전측면에서 얼마나 고심을 했는지를 알 수 있다.

 

"만영"이 후기에 제작한 영화중에는 스토리가 더욱 복잡하고, 사상내용이 더욱 반동적이며 더욱 악독해진다. 그중 어떤 경우는 공산당을 공격하기도 하고, 만주국경찰을 미화하기도 하며, 어떤 경우는 직접적으로 남태평양을 침략한 일본군의 활동을 미화하고 칭송하기도 한다.

 

"만영"은 2차대전시기 일본이 국외에 설치한 최대의 문화침략기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