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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종교

역사진상: 승려의 결혼금지

by 중은우시 2012. 1. 1.

글: 예방육(倪方六)

 

'홀아비의 날'이 왔다. 금년의 홀아비의 날은 백년만에 한번 오는 날이다. 11년 11월 11일. 그래서 인터넷에서는 '홀아비'를 주제로 한 많은 글들이 올라왔다. 홀아비는 과거 농촌에서 '화상(和尙, 승려)'이라고 불러왔다. 왜 이런 말이 생겼을까? 아마도 승려는 결혼하거나 자식을 낳을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왜 승려는 혼자살아야 했을까? 승려들은 정말 결혼도 하지 않고 자식도 낳지 않았을까?

 

화상(和尙)은 불교도이고, 우리가 통상적으로 말하는 출가인이다. 모두 알고 있다시피, 불교는 이천여년전의 인도에서 창시되었고, 창시자는 석가모니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현재는 8개의 주요 종파가 있다. 그중 3개의 종파는 승려가 결혼하고 자식을 낳는 것도 허용하고,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는 것도 허용한다. 지금까지 이렇게 하는 3개의 종파중 첫째는 밀종(密宗)이고, 둘째는 선종(禪宗)이고, 셋째는 정토종(淨土宗)이다.

 

'밀종'은 티벳불교에 이런 종파가 있다. 그들은 '남녀쌍수(男女雙修)'를 중시한다. 생각해보라. 결혼하지 않고 여색을 가까이 하지 않으면 어떻게 '닦을(修)' 수 있겠는가? '선종'은 정좌(靜坐)를 중시하고, 수심견성(修心見性)을 추구한다. 신교들은 재가수행(在家修行)을 선택할 수 있다. 처가 있는 것을 '가(家)'라고 한다. 재가수행하는 사람을 통상적으로 '거사(居士)'라고 부른다.

'정토종'은 <아미타경>을 신봉한다. 이 종교의 교의는 3세기경에 중국에 전래된다. 마찬가지로 승려의 결혼을 허용한다. 그리고 반드시 사원에서 생활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말해서, 불교는 '금욕주의'를 강조한다. 이것은 분명하다. 우리가 자주 불교는 오계(五戒)를 강조하는데, 그중 하나의 계(戒)가 바로 '계음사(戒淫邪)"이다. 그리고 '십악(十惡)'을 금하는데, 그중 1악이 바로 '사음(邪淫)'이다.

 

비록 이런 청규계규(淸規戒規)를 가지고 있지만, 승려도 사람이다. 승려들이 결혼하는 것에 대하여 역대왕조에서는 완전히 금지하지 않았다. 심지어 어떤 왕조에서는 아주 보편적인 현상이 되기도 했다. 역사상 대처승(帶妻僧)으로 가장 유명한 사람은 진체(眞諦), 현장(玄奘)과 더불어 중국불교의 삼대번역가로 불리는 십육국시대의 고승 구마라집(鳩摩羅什)이다. 구마라집은 일찌기 처를 두고 자식을 낳은 바 있다. 이것은 중국불교계의 유명한 '파계사건(破戒事件)'이다. 적지 않은 여색을 가까이 하는 출가인들이 자주 인용하는 사건이기도 하다.

 

구마라집은 원래 천축(지금의 인도) 승려이다. 서역의 구차(龜玆)국(지금의 신강 쿠차현 경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출가했고, 득도하여 고승이 된다. 구마라집이 '파계'한 것은 부득이한 상황하에서 발생한 것이다. 전진(前秦)의 장수 여광(呂光)이 구차를 정복한 후, '국왕의 딸'을 데려다가 그에게 그 여자와 함께 자도록 압박했다. 당시 구마라집은 비록 나이가 젊었지만, 여기에 마음이 동하지는 않았다. 여광은 그를 술에 취하게 한 다음, 국왕의 딸과 함게 밀실에 집어넣는다. "그리하여 수휴기절(遂虧其節)하게 된다. 구마라집의 '파계'는 이 한번 뿐이 아니었다. 전진이 멸망한 후, 후진(後秦)은 구마라집을 국사(國師)로 모신다. 국왕인 요흥(姚興)은 그를 성인으로 여겼다. 그리고 그에게 '후손이 없는 것'은 안타깝다고 여긴다. 그리하여 그에게 처를 두고 자식을 낳아서, 대를 이으라고 요구한다.

 

일대종사도 이러했으니, 다른 승려들이야 계율을 지키지 않을 수 있었다. 남북조시대에, 승려의 결혼은 아주 성행한다. 스님과 비구니가 결혼하여 집안을 이루는 일도 잦았다. 이때, 승려의 부인을 부르는 전문 칭호까지 생겨난다. 바로 "범수(梵嫂)"이다. 어린 승려들은 그녀를 "사낭(師娘)'이라고 존칭해서 불렀다.

 

그러나, 나중에는 '출가인은 결혼할 수 없다'는 것이 보편적인 사회의 태도가 된다. 당나라때가 되자, 법률에서는 비록 승려가 결혼할 수 없다고 못박지 않았지만, 실제 집행과정에서는 승려가 처를 두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만일 처를 둔 것이 확인되면, 승려는 처벌을 받았다.

 

중국역사상 최초로 법률로 승려결혼을 금지한 것은 송나라때이다. 송태조 조광윤은 이렇게 규정한다. 도사와 화상은 모두 결혼할 수 없다. 송태종 조광의는 즉위후 이 규정을 다시 한번 반포한다. 다만, '광남(廣南)'지방의 승려만은 예외로 해주었다. 그러나, 송나라때의 법률도, 승려들의 결혼을 완전히 금지시키지는 못했다. 대처승을 부르는 전용칭호가 생겨나는데, '화택(火宅)'이 그것이다. 나중에 청나라때는 '화거(火居)'라고 불렀다.

 

이어진 원나라때는 이 법규가 계승되지 않았다. 원나라때는 승려에게도 결혼하여 자식을 두는 것이 허용되었다. 예를 들어, 남송황릉을 도굴했던 양연진가(楊連眞迦)는 아들이 있었다. 당시는 티벳불교가 성행하여, 승려가 처를 두는 것이 문제되지 않았다. "염처농첩(艶妻穠妾), 오예불수(汚穢不羞), 탈리쟁명(奪利爭名), 분경무이(奔竟無已), 수속인소부설위(雖俗人所不屑爲)". 이런 상황이 태정연간까지 계속된다. 그때 천재지변이 일어나서, 조정신하들이 승려가 혼인을 해서, 천신을 더럽혔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원나라에서도 구법을 다시 시행하여 승려결혼을 금지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 법규가 제대로 집행되지 못했다.

 

명나라때도 명문으로 승려결혼을 금지했다. 그리고 역사상 규정이 가장 엄격했던 시기이다. 이는 아마도 개국황제인 주원장 본인이 승려출신이기때문일 것이다. 명나라때, 승려가 결혼한 것이 발견되면 그 결과는 엄중했다. "방망이로 마구 때려서 죽였다." 전문용어로는 "추사물론(捶死勿論)"이라 한다. 돈을 좀 써서 목숨을 구하다고 하더라도 승려의 자격은 박탈당했고, 사원에서 쫓겨나야 했다. 나중에 주체(영락제)가 황제가 되었을 때, 추가로 승려결혼에 대한 단속을 강화했다. "어기는 자는 죽인다". 이는 중국사법사상 승려의 여색을 가까이 하는 행위에 대하여 가장 엄격한 처벌수단이었다.

 

청나라때도 승려결혼을 금지했다. 그러나, 명나라와 비교하면, 승려의 대처행위에 대한 관리는 훨씬 느슨했다. 서북지역에서 승려가 결혼하는 것은 현지의 풍속이 되었다. 조기(趙冀)의 <해여총고>에 따르면 섬서성의 변경 산에는 "승려들이 모두 가정이 있는데,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고 한다.

 

이상을 보면 승려결혼은 계속 금지해왔지만 없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왜 금지하였을까? 여기에는 복잡한 역사적 문제가 있다. 그러나 주요한 것은 역시 불교에서 결정한 것이다. 과거 불교계에서는 승려가 결혼하고 여색을 가ㅏ까이 하고, 계율을 지키지 않으면, 수련해서 득도할 수 없다고 보았다. 수련하여 득도하더라도 시간이 훨씬 길게 걸린다고 보았다. 이런 주장하에서 득도하여 부처가 되기로 결심한 승려라면 스스로 처자식을 버리거나, 심지어 평생 결혼하지 않고, 깨끗한 몸으로 출가수행을 해야 했던 것이다. 이것이 또한 승려를 '출가인(出家人)'으로 부르게 된 연유이다. 송나라때의 장상영의 <호법론>에서 "처자식을 두지 않으면 일이 단순하고 짐이 가볍다. 도를 쉽게 이룰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이 결국은 같은 말이다. 원래 승려가 결혼하지 않는 것은 수행의 필요때문이었다. 점점 이런 스스로 원해서 하는 '육근청정(六根淸靜)'하며 여색을 가까이 하지 않는 행위가 불교의 '계율'로 굳어진 것이다. 통치계급은 종교윤리, 사회질서를 유지하려는 고려에서, 승려의 '대처행위' '여색을 가까이 하는 행위'에 간섭한 것이다.

 

연원을 따져보면, 출가인들에게 결혼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석가모니의 의사는 아니었다. 석가모니는 화상이 여색을 가까이 하면 안된다고 규정한 적이 없다. 바로 이런 상황으로 인하여, 불교의 교리에 대한 서로 다른 이해가 나타난 것이다. 그리하여 어떤 종파에서는 여색을 가까이 하고, 처를 두는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예를 들어, 일본에서는 정토종이 유행하는데, 승려는 결혼하고 자식을 낳을 수 있으며, 또한 이것을 국가법률로 허용하고 있다. '여색을 가까이 하는 것'은 계율에 위반되지도 않고, 법률을 어기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일본의 불교는 중국에서 처음 들여간 것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의 관련법률에, 사실 승려결혼을 금지하는 조문은 없다. 듣기로 법률을 제정하면서 의견을 징구할 때, 누군가가 중국에도 일본처럼, 법률에 승려결혼을 허용하는 규정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그러나, 반대의견을 지닌 사람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고, 이는 종교문제이므로 승려가 결혼할지말지는 불교계가 스스로 알아서 결정하는 것이 좋겠다고 남겨두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