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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청 후기)

청나라말기의 황제들

by 중은우시 2011. 3. 24.

 

 

: 장명(張鳴)

 

어지러운 세월에, 사람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금방 좋았다가 금방 나빠진다. 고귀하기 그지없는 황제조차도 예외는 아니다. 청나라말기에, 북경성은 두번에 걸쳐 서양군대의 공격을 받았고, 황제는 두번 도망친다. 청나라는 유목민족이 만든 왕조로 성을 지키는 것을 좋아하지 않은 듯하다. 병력이 밀려오기만 하면, 그냥 두 발바닥에 기름을 바른 듯이 도망치곤 했다. 1860, 함풍제가 북방으로 사냥을 떠난다는 명목으로 북경에서 도망친다. 그런데, 기실 그때는 아직 영국,프랑스 연합군이 북경을 공격하기도 전이다. 오히려 의화단을 미신했던 서태후는 좀더 오래 버티다가, 팔국연합군이 북경성에 진입하고서야 비로소 황급히 도망친 바 있다.

 

함풍제가 승덕으로 도망쳤다. 이치대로라면, 승덕은 황제가 자주 가는 곳이고, 황제에 대한 물자공급은 당연히 문제없어야 했따. 그러나, 그때는 어쨌든 왕조의 말기이다. 모든 일이 엉망이었다. 게다가 황제가 행궁으로 갔을 때는 아주 시기가 좋지 않아서, 행궁에서는 모두 어찌할 바를 몰랐고, 아무 것도 준비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막 도착하였을 때는 황제라 하더라도 무, 배추에 고기를 약간 얹어서 먹는 수준이었다. 시골지주들보다 먹는게 못했다고 할 수 있다. 황제를 따라간 후궁들은 더욱 비참했다. 황후는 그래도 나은 편이었으나, 나머지 후궁들은 고기조차 맛볼 수 없었다. 황실의 음식은 당시 중신인 숙순(肅順)이 관장했다. 숙순은 이때부터 의귀비 예허나라씨(나중의 서태후)와 사이가 벌어지게 된다. 숙순이 좀더 신경을 썼더라면, 황제와 황후만 챙길 것이 아니라, 의귀비 예허나라씨도 좀 더 잘 모실 수 있었다. 별달리 힘드는 일도 아니고 고기나 좀 더 주면 되는 일이었다. 아마도 그랬다면 기상정변(祺祥政變)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같이 모두 편안하게 받들어주는데 익숙해 있는 주인들인데, 돌지에 고기조차 먹기 힘들게 되니 화가 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당시 황제는 겨우 나이 서른 몇이었다. 그리로 이미 생육능력이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누가 알았으랴. 성깔이 만만치 않아서, 서양군대에 당하고 나서 홧병으로 들어누워 일어나지 못하게 될 줄을. 만일 그렇지 않았더라면, 황제는 분명히 아들을 몇몇 더 낳았을 것이다. 그리고 예허나라씨가 아들 덕분에 태후에 오를 가능성도 훨씬 줄었을 것이다. 숙순이라는 만주족 중에서는 보는 눈이 뛰어나다는 인물도 일찌감치 이런 형세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가 그런데에는 당연히 연유가 있다. 어쨌든 숙순의 운명 및 나중의 중국의 운명은 황제의 생육능력과 관련이 있다. 만일 함풍제가 강희제처럼 일찌감치 아들을 여럿 더 낳았더라면, 여러 후궁들에게서 황자를 더 많이 낳게 했더라면, 예허나라씨는 기회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처럼 대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녀만 혼자서 황제의 유일한 자식을 낳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외동아들이 자라면서 어찌된 이유에서인지, 부친과 마찬가지로 자식을 낳는 쪽으로는 영 형편이 없었다. 결혼한지 몇 년이 지나서 십칠팔세가 되었따. 아무리 발육이 늦다고 하더라도 어쨌든 자식을 낳을 수 있는 연령이다. 그러나 황후와 후궁들의 배는 전혀 불러오지 않았다. 그리고 돌연히 죽어버린다. 전설에 따르면 창녀로부터 지저분한 병에 옮아서라고 한다. 전설이 맞다면, 최소한 그는 욕망도 있고 능력도 있었다는 것이다. 젊은 황제가 돌연사하자, 청나라말기는 후계위기에 봉착한다. 다시 돌아와서, 만일 동치제에게 아들이 있었다면, 아무리 생모가 패도적이고, 정치야심이 크다고 하더라도, 동치제와 같은 배분의 형제중에서 황위계승자를 찾고서 자신이 여전히 황제의 황바바(모친)’으로 남아서 그를 데리고 수렴청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찌되었건, 한 단계 더 올라가서 태황태후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정치에 간여하고 싶어도, 제도적인 장애가 너무나 많다. 동치제가 죽은 후의 후계풍파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심지어 그 후의 조정정치가 어떻게 되었을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청나라는 함풍제이후 연속 세 명의 황제, 동치, 광서 및 선통이 모두 자식을 낳지 못했다. 최소한 외부인이 보기에, 그들의 생육능력은 문제가 있었다. 사실 함풍제는 외동아들 하나만 낳고 딸도 낳지 못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이 왕조의 기수(氣數)와 관련있다고 말한다. 왕조의 말기에는 사람기운이 없게 된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는 나중에 서태후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음기가 양기를 눌러서 생긴 일이라고 말한다. 또 어떤 사람은 영국프랑스연합군이 원명원을 불태우게 되면서 황제가 할 수 없이 자금성에만 머물게 되었는데, 자금성이 원래 사람이 살 곳이 못되며, 그곳에 오래 살게 되면서 생육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고 한다.

 

다른 집안에서라면 후손을 두느냐 못두느냐가 그저 한 집안의 운명에만 관련되겠고, 본부인과 첩간의 권력관계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겠지만, 국가정치와는 관련이 없다. 그러나, 황제는 다르다. 그들이 자식을 여럿 두느냐 아니면 자식을 두지 못하느냐는 정국의 변동을 가져올 수 있다. 국운의 전환은 황제의 성능력 및 생육능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말이다. 황제와 후궁의 밤에 하는 일 자체는 보통 사람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전혀 다르다. 황제에게 아들이 없어서, 방계에서 사람을 고른다면, 왕왕 조정 각파벌간의 세력다툼이 벌어지게 된다. 드러내놓고 혹은 암중으로 다툼을 벌이는 것이다. 다툼이 끝나고 후계자가 결정되고난 다음에 후계자의 나이가 아직 어리다면 잠시 문제가 없을 것이나, 그가 성인이 되고 나면 바로 새로운 사람들로 갈아치우게 된다. 선왕의 신하들은 선왕의 신하이다. 그중 몇몇은 승진하고 몇몇은 물러나는 것이다. 나이가 어린 황제가 성인이 되고, 자신의 권력을 다른 사람이 행사하는 것을 알게 되면, 곧이어 피비린내나는 숙청이 시작된다. 황제가 죽든지 대신들이 죽어나가든지 하게 된다. 명무종에게 아들이 없지 않았더라면, 나중에 가정제때의 대예의풍파도 없었을 것이다. 명희종에게 아들이 있었더라면, 역사상 권력이 가장 컸던 환관인 위충현의 권세가 그렇게 커지지 않았을 것이고, 명나라도 그렇게 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역대왕조를 보면, 많은 똑똑한 사람들이 여러가지 아이디어를 내서 이런 리스크가 발생하지 않도록 방지하려 애썼다. 그러나, 그 효과는 미미했다. 왕조정치는 황제의 생육능력을 놓고 말하자면, 아주 불안정한 정치이다. 평화로운 승계이냐 아니냐에 따라 여러가지 리스크가 있고, 대신들의 운명도 엇갈리는 것이다. 이는 모두 황제의 침실에서 일어나는 일로 결정된다. 생사와 귀천이 자신의 뜻과는 관계없이 엇갈린다. 이로 인한 정국의 혼란과 백성들의 유리걸식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완일 황실의 승계가 국가정치에 연루되지 않도록 하려면, 황실을 유지하는 전제하에서 유일한 방법은 황실과 정치를 분리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황제의 자리는 허위(虛位)가 되고, 군주입헌제에 가까워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