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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민국 후기)

1949년 미군의 칭다오철수 내막

by 중은우시 2010. 6. 19.

글: 중청재선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무조건항복을 했다. 얄타회담에서 미국대통령 루스벨트와 소련최고지도자 스탈린은 밀약을 통하여 동북(만주)에 진주한 소련군이 뤼순(旅順)과 다렌(大連)을 점령하기로 하였다. <<중소우호동맹조약>>에서 소련의 이런 지위는 중국측의 확인을 받았고, 뤼순군항은 중국과 소련 양국군대가 공동사용하였다. 다렌은 자유항으로 되어 소련이 상당한 특권을 누렸다.

 

소련이 여순,대련을 지배하는데, 대하여 미국도 일찌감치 준비를 했다. 글로벌 군사배치의 필요에 따라, 미국측은 칭다오(靑島)를 주목했고, 칭다오를 장악하고자 했다. 이를 통하여 서태평양지역에서 소련과 군사력의 균형을 이루고자 한 것이다.

 

중국북방해안의 양호한 군항으로서 칭다오는 군사시설이 완비되어 있을 뿐아니라, 전략적 위치도 중요했다. 미국이 칭다오에 주둔함으로써, 군사력이 산동반도에 미칠 뿐아니라, 황해를 견제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하여 소련의 뤼순, 다렌의 군사력을 견제할 수 있다. 그러므로, 미국으로서는 칭다오에 주둔하는 것이 가장 좋은 선택이었다.

 

1945년 10월 9일, 미국해군육전대 제6사단이 칭다오에 상륙한다. 1945년 10월 11일 부터 12일까지 2.7만명의 미군이 칭다오 항구에 차례로 상륙한다. 그후 1945년부터 1949년까지, 미군은 칭다오에 4년간 주둔했다. 1946년 5월 13일에는 미국해군 제7함대가 칭다오에 도착한다.

 

미군의 행동에 대하여, 장개석은 허가하는 태도를 취했다. 이것은 미군이 칭다오에 주둔하는 것이, 장개석의 내전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었다. 칭다오에서 미군은 고문단을 파견하여 국민당정부가 중앙해군훈련센터를 설립하는 것을 도와주기로 합의했다. 이외에, 미국은 국민당군대가 북중국을 접수하는 것을 운수와 호송등에서 도와주었다.

 

1945년 11월, 국민당 제8군 이미 부대는 제7함대의 호송을 받아 칭다오에 상륙한다. 칭다오를 일본군으로부터 접수하는데 성공했을 뿐아니라, 교제선(胶濟線)을 따라 관련도시들을 장악했다. 그후, 미군은 국민당군대가 칭다오에 상룍하도록 호송하여, 교제선을 열 수 있도록 해준다.

 

1946년 11월, 미국정부는 국민당정부와 <<칭다오해군기지비밀협정>>을 체결하고, 이때부터 미국은 칭다오주둔에 대하여 국민당정부의 정식승인을 받는다. 칭다오는 이때부터 미군의 극동주요해군기지가 된다. 미국측과 장개석간의 이 협정은 잠재적인 동맹의 의미가 있다. 미국의 UPI는 "일단 전쟁이 발생하면, 미국과 중국은 공동으로 칭다오기지를 사용할 것이다"라고 보도한다.

 

1946년 6월, 중국은 전면적인 내전이 발발한다. 미국측이 생각지 못했던 것은 자신들이 지지하는 국민당정부가 전쟁에서 열세를 나타낸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전면공격을 감행하다가, 부득이 중점지역을 공격하는 것으로 변경하고, 나중에는 몇개 대도시를 방어하는 것으로 전략을 바꾼다. 이리하여 전략적인 주도권을 완전히 상실한다.

 

산동에 있어서, 1947년 3월부터 4월까지, 교제선은 다시 해방군에게 절단된다. 1948년초, 전체 산동반도에서, 국민당은 지난(濟南)과 칭다오의 두 도시만을 장악하게 되었다. 미국측이 소련에 대항하는 기지인 칭다오도 해방군의 포위하에 놓이게 된다. 이런 상황하에서 미군으로서는 칭다오에서 철수하는 것을 검토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미국의 비밀해제된 자료에 따르면, 미군측, 정보부서, 외교부서에서는 모두 이에 대하여 여러차례 검토를 거친다.

 

미국측은 칭다오 주둔을 아주 중요시 했다. 칭다오는 국민당 해군의 훈련센터일 뿐아니라, 미국이 소련에 대항하는 중요한 거점이었다. 그러므로, 미국측은 국민당의 칭다오방어능력을 믿을 수 없다고 보았지만, 그렇다고 쉽게 칭다오를 포기할 수도 없었다. 그외에 미국측은 우방을 지지하는 태도를 나타냈기 때문에, 중공으로부터 칭다오를 공격할 가능성이 있지만, 미국측은 쉽게 칭다오에서 철군하낟고 말할 수가 없었다. 군사력으로 보자면, 당시 미국의 관련인원들은 미국이 칭다오에 증원하거나 전부 철수하는 것은 모두 미국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군사력으로 보자면, 작전부대의 규모는 3600명가량을 유지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것은 미국의 1948년 5월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해방군이 4월에 유현을 공격하여 점령하게 되어, 미국이 칭다오를 보위하는 것은 아주 실질적인 문제로 등장했다. 비밀해제자료를 보면 미국측은 칭다오에서 취할 행동, 그 행동이 미해군의 서태평양에 미칠 영향, 그 행동이 미국의 이미지에 미칠 영향, 그리고 국민당의 교제선의 주요거점에서의 군사력에 대하여 상세하게 평가하고 있다.

 

미국측은 이 시기에 국민당의 군사력에서의 손실이 클 뿐아니라, 전투의지도 상실했다고 보았다. 칭다오의 방어력을 신뢰할 수 없다고 보고, 해방군이 산동에서 군사적 주도권을 장악했다고 보았다. 이에 기하여 미국측은 해방군이 칭다오를 공격하는 경우를 상정하여, 4가지 조치방안을 준비했다:

 

첫째, 국민당군대를 원조하여, 도시와 인근의 설비(비행장과 수상시설)를 보호하도록 한다.

둘째, 국민당에 의존하지 않고, 미국이 단독으로 중요시설을 보위한다.

셋째, 일단 필요하면, 미국인원과 설비를 국공내전지역에서 철수한다.

넷째, 미국설비와 비전투인원을 철수시키고, 무장부대는 계속 부근의 함상에 남겨두고, 중국내전의 진전을 봐서 행동을 정한다.

 

미국 분석가는 첫째방안은 외교적으로 현명한 것이지만, 미국은 당시 국민당의 능력에 회의를 품고 있었다. 둘째 방안은 군사상으로는 정확하지만, 정치적으로는 중공측에 미국이 침략했다는 선전의 빌미를 줄 수 있었다. 셋째 방안은 비록 안전하지만, 국민당이 버림받았다는 느낌을 줄 수 있었다. 미국의 '자유국가'의 맹주라는 이미지에 불리했다. 당시의 상황으로 봐서는 넷째방안이 절충방안이었다. 그리고 가장 적절한 방안으로 보았다. 당연히 미국의 철수에 대하여 분석보고서에서는 미국의 체면을 잃는 일이라고 솔직하게 얘기했다.

 

언급할만한 점이라면, 미국은 추가로 분석하여, 국민당의 산동에서의 4개의 중요군사거점을 비교하여, 해방군의 다음 번 공격방향이 칭다오가 아니라, 산동의 성회도시인 지난이 될 것으로 보았다. 그후의 전쟁상황을 보면 미군의 예측은 정확했다.

 

미군이 예측하지 못한 점이라면, 지난이 그렇게 빨리 함락될 줄 몰랐다는 것이다. 1948년 9월, 해방군은 지난해방전쟁을 시작한다. 겨우 8일만에, 지난은 해방된다. 국민당의 산동에서의 최고사령관인 왕요무는 포로로 잡힌다. 지난을 잃음으로써, 칭다오는 국민당의 산동에서의 유일한 거점이 된다. 이렇게 되어, 미군은 부득이 다시 칭다오의 거취문제를 고려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번에, 미국측은 여러 방면과 긴급협의를 한다. 중공측이 지난을 함락시킨 후, 칭다오를 점령할 능력은 충분하다고 보았다. 이렇게 되면, 미군이 칭다오에 계속하여 주둔하는 것은 해방군과의 일전을 각오해야하는 문제가 있었다. 이것은 미국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미군으로서는 칭다오에서 철수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미국은 이렇게 평가했다. 이번 퇴각은 소련등 사회주의국가에 좋은 선전자료를 제공해주는 것이라고. 그러나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미국이 우려한 것은 일부 동남아국가 예를 들어, 인도네시아같은 나라에서 미군의 퇴각이 미국이 쇠약해진 것으로 여길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나아가 미국의 동남아에서의 이익에 불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미국은 칭다오는 중국공산당에 의미가 크지 않다. 왜냐하면 중공은 해군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련해군은 칭다오를 이용할 수 있었고, 다렌과 연결시킨다면 소련의 화북에서의 군사적 경제적 우세가 강화된다. 나아가 중공과 북한에 지원을 제공할 수 있게 된다.

 

해방군이 칭다오로 진군할지 여부에 대하여는 미군측의 분석이 모호하다. 어떤 때는 앞으로 6개월내에는 진공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고, 어떤 때는 이런 가능성을 완전히 보증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이에 비추어, 미군측은 한편으로는 칭다오의 미군함대에 비전투요원과 설비를 함상으로 철수시키고, 다른 한편으로 방어를 강화하는 태도를 보였다. 미군이 이런 조치를 취한 의도는 중공이 공격할 때, 미군측이 신속히 철수할 수 있게 하도록 하기 위함인 동시에, 방어를 강화하는 태도를 보임으로써, 국민당측의 기운을 북돋워주고, 중공을 겁먹게 하는 것이었다.

 

어쨌든 그냥 철수한다는 것은 영 체면이 서지 않는 일이었다. 체면을 보존하기 위하여, 미군은 장개석에게 중앙해군훈련센터를 칭다오에서 샤먼이나 타이완으로 옮길 것을 권한다. 그때 미군시설도 칭다오에서 철수하면, 자연스럽게 미군이 일방적으로 철수했다는 인상을 주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미군의 이런 시설이전방향은 일본본토와 괌도였고, 국민당이 가는 샤먼이나 타이완이 아니었다.

 

미군내부에서는 아주 분명히 말했다. 미국측은 일본기지가 공고하므로 타이완에 기지를 건립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중공이 화남지구를 점령하면, 타이완의 전략지위는 미국이 공산주의세력에 저항하는 임무를 감당하기에는 부족했다. 그외에, 미군은 다시 중국의 어떤 곳에도 해군기지를 두지 않았다. 그렇게 하면 미국과 중공간의 충돌이 일어날 뿐아니라, 중공에 미제국주의가 중국을 침략했다는 공격빌미를 줄 수 있었다. 그렇게 된다면 미국의 국제적인 이미지가 나빠질 터였다. 미국측의 이런 고려를 보면 미국은 소련에 대항하는 동방의 맹방으로 장개석을 버리고 일본을 선택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국내전에 대하여 군사적 불개입의 태도를 취하겠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해졌다.

 

미국은 칭다오를 철수하겠다는 결심을 굳히긴 했지만, 구체적인 철군일정은 계속하여 미루어졌다. 가장 중요한 원인은 내켜하지 않는다는 것때문이었다. 그외에 칭다오주군의 가치를 다 활용하려는 것도 있었다. 자료를 보면, 미군측이 처음에 철수를 결정했을 때, 방어를 강화하는 태도를 보였는데, 이것은 당시 해방군의 삼대전투가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군은 일방적으로 철수하면 국민당의 사기에 악영향을 미칠까 우려했다. 해방군이 장강에 배치될 때, 미군은 남경이 해방군에 함락될 때가 칭다오를 철수할 시간이라고 보았다. 1949년 4월 23일, 남경이 함락된 후, 미군은 다시 철수시간을 상해가 함락된 후로 잡았다.

 

1949년 5월 3일, 해방군은 청즉(靑卽, 靑島 및 卽墨)전투를 개시하고, 칭다오에 위협적인 공격을 가하기 시작한다. 미군은 이때 정식 철수일정에 들어간다. 1949년 5월 25일, 상해가 함락되기(1949년 5월 27일) 전에 미군은 칭다오에서 철수한다. 미군은 이때부터 중국대륙에서 물러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