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후기)

예비입헌(預備立憲)은 어떻게 무산되었나?

중은우시 2009. 9. 16. 17:33

글: 부국용(傅國涌)

 

역사에 가정은 없다. 역사는 그저 이미 발생한 사실일 뿐이다. 1906년 9월 1일 "방행헌정(倣行憲政, 헌정을 본떠서 시행한다)"의 상유(上諭)가 마치 하늘에서 툭 떨어진 것처럼 반포되었고, 민간사회는 환호성을 질렀다. 각종 헌정단체가 연이어 생겨나고, 신문들에서의 여론은 열기를 뿜었다. 학계, 상계, 언론계등 엘리트계층에서는 이 상유가 그들의 가슴 속의 희망에 불을 붙인 것이었다. 중국의 하늘에는 서광이 보이기 시작했다. 백년전의 그날 그들은 격동했고, 흥분했고, 밤잠을 설쳤다.

 

오늘날의 우리로서는 그 완고한 서태후가 어떻게 교량하고, 생각하고, 계산해서 이런 대담한 결정을 내렸는지를 알 수는 없다. 어찌되었던 지지부진하던 청나라말기의 신정(新政)은 '예비입헌'의 단계로 접어들게 되었다. 위기와 굴욕으로 충만했던 전환기에 당시사회는 새로운 것을 원하고 변화를 원했다. 장건, 탕수잠등을 대표로 하는 일군의 사람들은 대강남북을 돌아다니면서 여러해동안 입헌을 유세하고 추진했다. 이 사회역량도 무시할 수 없었다. 변화의 길을 모색할 수 밖에 없었던 청나라정부로서도 뭔가 대응을 보여야 했다. 이전에 5대신을 서양에 파견하여 고찰하게 한 바 있는데, 그 배후에도 그들의 그림자가 있다. 위로부터 아래로의 "예비입헌"은 그들이 주인공이 된 "입헌운동(立憲運動)"과 맞물리는 것이다. 후자는 바로 전자의 중요한 원동력이었다. 전제황권의 고목에 어떻게 새로운 가지를 자라게 할 수 있을까?

 

어떤 사람은 말한다. 청나라조정은 "입헌"에 성의가 없었다고. 그저 사람을 속이는 장난에 불과했다고. 어떤 사람은 또한 청나라조정이 그저 '입헌'을 가지고 자신의 목숨을 연장하고자 한 것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이미 고희에 접어든 서태후에 있어서 "입헌"은 그저 "예비"이므로, 예비기간을 길게 가져가기만 하면, 그녀가 죽은 후에 어찌되든 알 바 아니라는 것이다. 확실히 서태후를 포함한 통치자들이 100여년전의 어두운 밤에 '예비입헌'을 선택한 것은 자신의 목에 황금빛 찬란한 '헌정비'를 거는 것이므로, 이는 스스로 원한 것도 아니고, 적극적이지도 않았고, 주동적이지도 않았다. 오히려 피동적이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렇기는 해도, 우리는 여전히 백년전의 이 선택을 긍정적으로 본다. '방행헌정'은 더욱 진보한 정치문명을 선택한 것이다. 최소한 그들은 선진국가가 해본 적이 있는 제도모델, 치국이념을 배척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절대황권과 비교하자면, 군주입헌은 어쨌든 진보된 것이다. 그것은 대의제를 인정하고, 사법의 상대적 독립성을 인정하고, 민중의 기본권리를 인정하고, 지방자치 즉 사회의 자주성을 인정한다. 이 모든 것은 형량학 힘들 정도의 거대한 진보이다. 멀리 신강에서도 지방의회적인 성격을 지닌 자의국(諮議局)이 등장한다. 영국의 저명한 타임즈 주북경기자인 모리슨이 1910년에 찍은 '신강자의국' 사진을 보면 건물은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고, 그저 보통의 북방농가주택처럼 보이고, 가지에는 아무 이파리도 붙어있지 않고, 겨울의 황량함만 보여주지만, 자의국 내지 자정원(資政院)은 어쨌든 새로운 것들이다. 광서 계림에서 한 관방집회에는 "입헌만세"라는 플랭카드가 높이 걸려 있었다. 회의장에서의 서로 다른 복장은 바로 신구교체의 시대풍경이었다. 한편에는 청나라관복을 입은 대소관원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신식교복을 입은 소학교와 사범학당의 학생들이 있다. 이 모든 것은 중국이 고대에서 근대로 전환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1908년 8월 27일 반포된 <<흠정헌법대강>>에는 당연히 많은 문제가 있다. 그것은 헌법의 형식으로 군상대권(君上大權)울 확립하고자 했다. "대청황제는 대청제국을 통치한다. 만세일계(萬歲一係), 영영존대(永永尊戴)한다." "군상의 신성존엄은 불가침범이다" 그러나, 거기에 붙은 <신민권리의무>에서는 처음으로 '신민은 법률범위내에서 언론, 저작, 출판 및 집회, 결사등의 일을 하는데 자유를 허용한다" "신민은 법률에 정한 바에 따르지 않고서는, 체포, 감금, 처벌받지 아니한다" "신민의 재산 및 거주는 이유없이 침해받지 아니한다"등등. '군상대권'과 '신민권리'가 모두 법률의 틀 안에 들어왔다. 이것은 어쨌든 사상유례없는 일이었다.

 

"예비입헌"은 최종적으로 혁명의 고함 속에 매몰된다. 이것은 입헌파에게는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그들은 일찌기 진심으로 군주입헌을 추진했고, 입헌의 과정을 추진했다. 그들은 두 발을 땅에 딛고 있는 실업가이거나, 명망있는 지식인이었다. 그들의 본토에서의 사회영향력은 혁명파들 보다는 훨씬 컸음에 틀림없다. 그들은 자신감에 넘쳤다. 청나라제국의 고목에 신헌정이라는 가지를 접목시키고자 했다. 그들은 벌레먹고, 광풍에 시달리는 고목을 뿌리째 뽑아버릴 생각은 없었다. 그들은 정치적으로 온화하고 점진적인 개혁을 주장했다. 광풍폭우식의 혁명을 원하지 않았다. 그들은 최소의 댓가를 치르고, 최저의 비용을 들여서 사회전환을 완성하고자 했다. 위기가 사방에 잠복해 있던 청나라말기에 그들은 사회안정에 대한 가장 굳건한 지지자였다. 그들은 구체제를 신사회로 순조롭게 전환시킬 수 있었던 것같다. 이는 청나라조정과 그들간의 양호한 상호작용, 오대신의 서양파견부터 '방행헌정'의 상유를 발표하고, <흠정헌법대강>>을 반포하기까지를 보면 충분히 알 수가 있다.

 

그들은 "예비입헌"의 봄바람을 빌어서, 전국각지에 각양각색의 입헌단체를 조직하고자 했는데, 어느 정도 근대정당의 싹이 보였다. 새로 출판되는 신문잡지에서는 그들의 주장이 넘쳐났다. 그러나, 부패가 극에 달했던 권력집단은 기득권이라는 끈에 묶여 있었고, 사사로운 욕심을 앞세우다보니, 중요한 순간에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걸음을 멈추게 된다. 민간사회의 평화로운 변화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게 되자, 온건파들까지도 혁명파의 편에 서게 만든다.

 

1911년 봄은 청나라조정에게 마지막 기회였다. 제3차국회청원운동에서 겨우 9년 예비입헌을 6년 예비입헌으로 바꾸는 정도의 결과를 나타냈을 때, 이 왕조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1911년 10월 30일, 무창에서 총소리가 난 후, 남방각성이 속속 호응하고, 독립을 선포한다. 북경부근의 신군 제20진통제 장소(張紹)마저도 통전을 보내어, 병력을 움직이겠다는 위협을 한다. 즉, 청나라조정은 입헌의 주도권을 상실하고 완전히 피동적인 입장에 처한다. 그제서야 입헌파의 여러해에 걸친 요구에 응한다. 황급히 <실행헌정유>를 반포하고, 이어서 11월 3일에는 '헌정중대신조19조'를 선포한다. 여기서는 "황제의 권리는 헌법에 규정한 바에 따라 제한된다"는 것도 인정하고, "헌법개정제안권은 국회에 있다"는 것도 인정하고, "당해연도 예산은 국회를 거치지 않으면, 전년도의 예산에 따라 지출할 수 없다"는 것도 인정한다. 그러나, 모든 것은 늦었다. 시기를 놓친 것이다. 한 왕조를 영원히 이어지게 하려던 '예비입헌'은 이렇게 무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