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의 지방/중국의 명소 (종합)

중국의 일곱군데 세외도원(世外桃源)

by 중은우시 2008. 10. 28.

글: 창랑지수(滄浪之水)

 

도화진일수류수(桃花盡日隨流水)

동재청계하처변(洞在淸溪何處邊)

 

복숭아꽃이 하루종일 물을 따라 흐르는데,

동굴은 맑은 시내의 어느 곳에 있을까?

 

당나라때 시인인 장욱(張旭)의 이 싯구는 천여년이래로 세상사람들의 마음 속에 품어온 의혹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도연명이 말한 도화원(桃花源)은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 무수한 사람들이 가보고 싶어하는 이 곳은 그저 작가의 이상향인 유토피아에 불과한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곳일까? 아니면 현실속에 창작의 원형이 존재하는 것일까?

 

"도화원"의 세계는 속세에서 번민하는 사람들을 유혹하고, 세상살이에 지친 많은 사람들에게 광명과 희망을 가져다 준다. 그리하여, <<도화원시>>는 백대를 전해내려오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찬양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몽매에도 그리워하는 도화원은 도대체 어떤 이상세계일까?

 

많은 사람들은 도화원은 도교적인 색채의 신선경지라고 본다. 개략 <<도화원시병기(桃花源詩幷記)>>에 나오는 "기종은오백, 일조창신계(奇踪隱五百, 一朝敞神界, 기적같은 종적은 오백년을 숨겨왔는데, 어느날아침 신선의 세계를 열어제쳤네)"라는 문구로 인하여 시인들은 모두 도화원을 선경(仙境)으로 보고 있다. 예를 들어, 한유는 <<도원도>>에서, "신선유무하묘망, 도원지설성황당(神仙有無何渺茫, 桃源之說誠荒唐, 신선이 있는지 없는지는 아득하여 잘 모르겠고, 도원의 이야기는 실로 황당하다)"라는 싯구를 지었고, 유우석은 <<도원행>>에서 "선가일출심무종, 지금유수산중중(仙家一出尋無踪, 至今流水山重重, 신선이 한번 떠남에 종적을 찾을 길 없고, 지금도 물은 흐르고 산은 겹겹이 있다)"라는 싯구를 지었으며, 왕유의 <<도원행>>에는 "초인피지거인간, 급지성선수불환(初因避地去人間, 及至成仙遂不還, 처음에는 난을 피해 이 곳으로 왔는데, 신선같은 생활을 하게 되니 돌아갈 생각이 없어졌다)"라는 문구와 "춘래편시도화수, 불변선원하처심(春來遍是桃花水, 不辨仙源何處尋, 봄이오니 온데가 도화꽃 물이어서, 신선이 있는 곳이 어디인지 찾을 수가 없다)"는 문구도 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사람들이 도화원을 찾으려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사람들은 도원명의 묘사에 따라, 지도를 통해 찾거나, 현지를 고찰하였다. 최근 몇년동안 중국의 관광산업은 아주 발달하여, 적지 않은 지방에서 이를 기회로 대거 선전활동을 벌이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문헌의 일부 문구를 이용하여 견강부회로 진짜 도화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하여 진짜 도화원이 우후죽순처럼 나타났다. 순식간에 전국에 다 퍼져 버렸다. 그렇다면, 현실세계에서의 도화원은 과연 어디일까?

 

현재 비교적 인정받고 있고 가장 가능성이 큰 진짜 도화원은 아래의 일곱군데이다. 그들은 현대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곱군데의 세외도원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상덕(常德) 도화원

 

호남성 상덕시의 옛이름은 임원현(林沅縣)인데, 수나라때 무릉현(武陵縣)으로 개칭했었다. 1911년에 다시 상덕으로 이름을 고쳤다. 동한때부터 당나라때까지 수백년간 이곳은 무릉군(武陵郡)의 관아소재지였다. 도원(桃源)의 옛이름은 원남(沅南)이다. 역대이래로 무릉군이 관할한 속현의 하나이다. 도연명은 <<도화원기>>에서 이미 "무릉"을 언급했으며, 원수(沅水)의 물가는 도연명이 쓴 경치와 부합한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은 '도화원'의 창작원형이 이곳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지금 호남성 상덕시 도원현의 서남쪽에 있는 원수의 물가에는 도화산, 도원산 및 도화호로 구성된 경승지가 있다. 이곳에는 도화계라는 작은 시내가 있는데, 이 계곡물은 도화산에서 발원하여, 원수로 흘러들어간다. 양쪽에는 도화꽃이 숲을 이루고 있고, 꽃이 피는 계절에는 붉은 빛이 구름과 같고, 꽃잎이 온 바닥에 날린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이곳이 바로 무릉어부가 도화원으로 갈 때 만났던 작은 시내와 도화림이라고 한다. 작은 시냇물을 거슬러 올라가면, "경림교(瓊林橋)"를 지나게 되고, "도화담(桃花潭)"을 지나게 되며, "진인동(秦人洞)"이라고 불리는 옛날 동굴이 나온다. 산동을 들어가면, 처음에는 좁으나 나중에는 사람이 지나갈 수 있게 된다. 산동을 걸어나오면, 천지가 돌연 탁 트인다. 땅도 넓고, 가옥이 줄지어 있고, 논둑밭둑이 이어져있고, 닭소리 개소리가 서로 들리는 고박, 순진, 자연, 청신한 그림이 사람의 눈앞에 펼쳐진다. 이곳이 바로 사람들이 그리워하는 인간선경 "진인촌"인 것이다.

 

진짜 도화원이 무릉(지금의 상덕)에 있다는 것에 대하여는 아마도 논쟁이 가장 없을 것이다. 역대문인들이 앞다투어 '도화원'을 읊었다. 예로부터 남북조시기의 유신, 서릉등에서부터, 당나라때의 왕창령, 이백, 유우석, 두목등 수십명, 송나라때의 왕안석, 소식, 황정견, 주희등이 있다.

 

무릉(武陵) 도화원

 

무릉지구의 묘족(苗族)은 역대 이래로 복숭아나무를 숭배했고, 손님들이 찾아오면 술을 준비하고 닭을 잡아서 대접하는 풍속습관이 있다. <<묘족간사>>에 따르면, 무릉지구의 묘족은 쇠쟁기와 소로 농경을 시작하면서부터 자경농의 사유제가 실시되었고, 부계씨족초기의 물질조건을 갖추었다. 다만 생산력이 비교적 낮아서, 제공할 수 있는 잉여생산물이 많지 않았다. 그리하여 뛰어난 부자나 고귀한 사람이 나타나지는 못했다" 이리하여 계급착취가 없는 사회현상이 일어났다: "서로 도와서 농사짓고, 해가 지면 들어가서 쉬는..." 세외선경이 일반적은 묘족사회의 모습이었다. 그리하여 이런 광경이 바깥에까지 소문나게 된 것이다.

 

동진의 문인인 유경숙은 그의 <<이원>>에서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원희 초년에 무릉의 오랑캐들이 사슴을 사냥하다가 돌로된 동굴로 들어갔는데, 사람이 겨우 들어갈 만했다. 동굴로 들어가자 계단이 보였고, 계단을 오르니, 돌연 탁 트이며 넓어졌고, 뽕나무가 울창했다." 이것은 도연명의 <<도화원기>>의 내용과 아주 비슷하다. 서로 다른 점이라면 하나는 어부이고 다른 하나는 사냥꾼이라는 것뿐이다. 역사학자인 유자제는 <<학술월간>>에서 <<도화원기와 상서묘족>>이라는 글에서 <<도화원기>>에서 묘사한 압박이 없고, 착취가 없으며, 모두 일하고, 평등하고 자유로운 아름다운 생활의 광경은 작가가 아무렇게나 상상해서 쓴 것이 아니고, 환상을 재창조한 것도 아니고, 확실히 현지에 거주하는 무릉지구의 묘족사회의 생활을 반영하여 쓴 것이다라고 하고 있다.

 

내향(內鄕) 도화원

 

하남성 남양시 내향현 하관진의 북쪽 8킬로미터지점에 있는 청강수촌(靑樹村)은 세계지질공원인 보천만자연보호구라는 뛰어난 경관인 도화원경구(桃花源景區)가 있다. 사료의 기록과 전문가의 고증을 거쳐, 바로 고대문학의 명문장인 도연명의 <<도화원기>>에 나오는 도화원의 소재지라는 것이다. 이는 보천만남록 옥병산의 여러 봉우리에 둘러쌓여 있다. 사방의 산세가 험준하고, 나무가 빽빽이 들어차서 잘 밀폐되어 있어 세상과는 단절되었다. 산꼭대기 높은 곳에는 근 백무(畝)가량 되는 산간분지가 있는데, 현재 11호, 30여명의 사람이 살고 있다. 이곳의 사람들은 천여년이래로 자연환경에 의하여, 역대왕조에서 관리, 병사, 비적, 도둑의 침입을 받은 적이 없다. 주민들은 순박하여, 밤에도 문을 닫지 않고 길에 떨어진 물건도 주워가는 사람이 없다. 이들은 지금까지 세상과 단절된 농경생활을 하고 있다.

 

도화원경구는 도화곡, 도화계, 도화원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도화계를 따라 도화곡으로 들어가면 곡의 깊이는 3.5킬로미터이다. 여기에서 구경할만한 곳이 18군데나 된다. 청산녹수가 울창하다, "산은 높아야 좋은 것이 아니라 기이함은 그 층차(層次)에 있고, 물은 깊어야 좋은 것이 아니라 곡절(曲折)이 있어야 묘하다" 도화곡은 속칭 "삼령구도만, 구만십삼담"이라고 불리며, 골짜기에 숲이 무성하고 꽃이 많으며, 빼어나면서도 그윽하다. 골짜기를 따라 들어가면서 하늘을 보면 '일'자로 보여서 '일선천'이라고 한다. '일선천'을 지나면, '천문폭(天門瀑)'에 이르는데, 이곳에서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다. 천문폭은 절벽에 100미터나 되는 폭포로 돌연 앞을 가로막고 있어 하늘에서 내려온 것처럼 기세가 대단하고, 장관이다. 사방은 절벽으로 둘러쌓여 있고, 이끼가 끼어 있다. 산봉우리는 도화곡과 도화원을 갈라놓고 있다. 산허리쯤에 동굴이 하나 있는데, 도화동이라고 불린다. 도화동을 따라서 올라가면, 약 백여미터만에 오래된 신비한 마을이 나타나니, 바로 당서촌(塘嶼村)이다. 이는 바로 "산중수복의무로, 유암화명우일촌(山重水復疑無路, 柳暗花明又一村)"의 광경이다. 이곳은 산이 푸르고 물이 빼어나며, 봉우리가 연이어 있어, 기화요초가 가득하고, 뽕나무, 대나무가 온데 펼쳐져 있다. 복숭아꽃이 활짝 필때면, 온 산이 꽃으로 뒤덥힌다. 아주 아름답다는 느낌밖에 들지 않는다. 이곳은 대자연의 산소를 마음껏 흡입할 수 있는 곳이라는 느낌이 든다. 샘물은 달고 물병에 때가 끼지 않는다. 사람들은 순박하고 선량하다. 이곳이 바로 사람들이 그리워하고 문인묵객들이 모두 찬양한 '세외도원'인 것이다. 유엔중국대표단의 전 비서장인 왕해중이 이곳에 온 후에 글을 썼다. "인간선경, 승사선경(人間仙境, 勝似仙境, 인간의 선경으로 선경보다 뛰어나다)". 유명한 작가인 교전운은 이곳을 본 후에 이렇게 썼다. "만리를 힘들여 돌아다닐 필요가 있는가? 이 곳에 오면 온갖 경치가 다 있다."

 

광남(廣南) 도화원

 

동진 도연명의 <<도화원기>>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숲에 물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하나 있다. 산에는 작은 입구가 있는데, 마치 빛이 있는 것같다; 배를 타고 입구로 들어간다." 운남성 광남현 파미(美)를 가서 졸졸 흐르는 냇물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면, 마치 큰 붓과 같은 석산(파미촌의 입구)를 만난다. 이 '석필산'의 허리부분에 거대한 석동이 있는데, 동굴에는 무수한 종유석이 매달려 있고, 무리를 이룬 제비들이 사방을 휘돌고 있다. 계곡물은 이곳에서 흘러나와 폭포를 이룬다. 이런 광경은 도연명의 <<도화원기>>에서 묘사한 것과 일치한다.

 

폭포가 내는 물소리를 들으면서, 저조선(猪槽船)을 타고 조금만 가면 동굴 속에 이른다. 돌연 동굴바깥의 시끄러운 소리나 물소리는 완전히 사라지고, 그저 제비가 내는 소리만이 들릴 뿐이다. 어둠이 사람과 저조선을 완전히 삼켜버릴 때, '시간의 터널'을 지나간다는 느낌이 들 것이다. 하나는 현대의 시끄러운 외부세계가 사라지고, 다른 하나의 오래되고 신비한 작은 마을이 너를 기다리고 있다. 어두운 동굴속에서 이십여분간 시원한 바람을 맞은 후에 돌연 빛이 나타난다. 이어서 동굴입구의 수차가 보이고, 장족소녀의 아름다운 모습이 보인다. 배가 건너편에 닿는다. 배에서 내려 올라가면 돌연 눈이 확트인다. 옅은 파란색의 강물이 멀지 않은 곳에서 너에게 손짓할 것이다. 벽록의 들판에는 농민들이 열심히 일을 하고 있고, 취죽, 도화숲의 깊은 곳에는 오래된 집들이 있다.

 

흡현(縣) 도화원

 

최근들어, 고대사료와 현지고증을 거쳐, 황산시 흡현에서는 고신안군 경내의 가장 서쪽에 있는 하나의 현이 도연명의 증조부인 도간(陶侃)의 원적인 파양군과 경계를 마주하고 있다고 한다. 옛책의 기록에 따르면, 흡현의 남쪽에는 무릉령(武陵嶺)이라는 곳이 있었고, 고개아래에는 무릉촌이 있었는데, 마을 사람들은 물고기를 잡아서 연명했다고 한다. 부근에는 작은 계곡물이 있는데, 바로 도연명이 <<납일(蠟日)>>이라는 시에서 읊은 장수(章水)이다. 장수를 따라 거슬러 올라가면,  곳곳에 복숭아나무가 자라고 있다. 냇물이 끝나는 곳에 절벽이 있고 그 곳에 동굴이 하나 있는데, '도화동'이라고 부른다. 이 동굴은 비록 수십년전에 도로공사를 하면서 훼손되었지만, 이전의 석각이 지금도 남아 있다. 산동을 뚫고 지나가면, 바로 넓게 펼쳐진 산간분지가 나타난다. 그곳은 토지가 평탄하고, 곳곳에 좋은 밭, 연못, 뽕나무, 작은 다리, 흐르는 물, 인가가 있다. 비록 1500년이 지났지만, 광경은 여전히 <<도화원기>>와 유사하다. 이 분지는 역대로 "구진촌(舊秦村)", "도화원"이라고 불리웠다. 전설에 따르면, 당나라때 시인인 이백이 이곳을 놀러왔다가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고 한다:

 

흡현소도원(縣小桃源)

연하백리간(煙霞百里間)

지다영초목(地多靈草木)

인상고의관(人尙古衣冠)

 

흡현의 작은 도원에는

안개가 백리에 깔려 있네

땅에는 기이한 풀과 나무가 자라고,

사람들은 옛날 의관을 하고 있네

 

홍농(弘農) 도화원

 

대가 진인각은 그의 글 <<진짜 도화원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라는 글에서 우리에게 말해준다. 비교적 이른 시기에 역사책에 기록된 '도화원' 즉 고도림(古桃林)은 고대 북방의 홍농 혹은 낙수 상류일대이며, 전해지는 바로는 역시 주무왕이 은상이 소를 기르던 곳을 공격했다는 것이다. 춘추전국시대에 책으로 엮어진 <<산해경. 중산경>>에는 '도림'이라는 기록이 있다. 진나라때의 곽박은 주석에서 이것이 "지금의 홍농 호현 문향 남곡중"에 있다고 하였다.

 

진인각은 도연명의 <<도화원기>>는 특별한 우의를 담고 있으면서, 사실을 기록하는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우의를 담고 있다는 점은 모두 잘 안다. 다만 그 중에 사실을 기록한 부분은 고대인과 근대인들간에 파악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진상은 이러하다고 본다. 도연명이 사실을 기록한 부분은 북방 홍농 혹은 낙부상류일대의 '도원'이라는 오보(塢堡)에서 기원한다. 황천원 일대에서 멀지 않은 곳에 '도원'이라는 곳이 있는데, 원래 주무왕이 은상이 소를 기르던 '도림'을 공격하였던 곳이다. '도림'의 면적은 아주 넓다. 영보현에서 동관까지가 모두 '도림'에 속한다. 그곳의 지리위치는 오보를 만드는 특징과도 일치한다. 당고조 무덕원년(618년)에 영보현은 그 곳에 '도원궁'을 건축했다.

 

진인각은 다섯가지 측면에서 논증한다: (1) 진짜 도화원은 북방의 홍농, 혹은 낙수상류에 있지, 남방의 무릉에 있지 않다; (2) 사람들이 진짜 도화원에 도망쳐 들어간 것은 부진(符秦)의 난을 피하기 위해서이지, 진시황의 진나라의 난을 피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3) 동진 의희 13년(417년) 봄여름이 바뀌는 계절에 유유는 군대를 이끌고 함곡관을 공격했다. 도화원기의 사실부분은 군대를 따라간 대연지등이 본 재료를 가지고 쓴 것이다. (4) 도화원기의 우의부분은 유자기가 형산에 들어가서 약을 캐면서, "한나라인지 위진인지모르겠다'는 등의 이야기를 내포하고 있다, (5) 도연명의 <<의고시>>의 둘째수는 <<도화원기>>와 서로 방증으로 인용될 수 있다.

 

송나라때의 소동파는 전설속의 도화원의 이야기는 말이 사실보다 과장되었다(言過其實)라고 한 바 있고, 그것이 무슨 신선세계는 아니라고 하였다. 만일 도화원이 정말 무릉에 있다면 일찌감치 사람들이 죽어라 싸우는 쟁탈대상이 되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진인각은 소동파의 주장에 적극 동의했다. 그는 고금에 도화원을 논의한 사람중에서 가장 식견있는 말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홍흥조가 한유의 <<도화도>>라는 시를 해석하면서 도화원이 무슨 신선이 사는 곳이 아니라고 주장한 것은 소동파보다 훨씬 뒤라는 것이다.

 

연운항(連運港)의 도화원

 

고대의 해주(海州), 즉 지금의 연운항시지역은 무릉이라는 지명을 가진 곳이 두 군데 있다. 하나는 <<위서>>에 있는 "무릉군"이고, 고성의 유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지금의 감류현 사하성자촌이다; 또 하나는 운대산맥의 숙성산 서록인데, 지금까지 무릉고읍의 지명을 보유하고 있다. 청나라 함풍원년이전에, 이곳은 오양호라는 호수의 동쪽호안이었다. 수로가 산록을 따라 남쪽으로 흐르기 때문에, 해변에서 산이 끝나는 곳에 작은 길이 있어, 숙성산요(宿城山凹)로 들어갈 수 있었다.

 

숙성산요는 삼면이 산으로 둘러쌓이고, 한면은 바다를 향한다. 호구령을 넘어가기 전에는 외부와 단절되어 있었다. 이로 인하여 숙성산요는 천연으로 만들어진 피난처가 되었다. 중간에는 아름다운 시내와 들판이 있었는데, 지명은 대죽원(大竹園)이었다. 동쪽으로 바다에 면한 곳에 반츰 바다에 잠긴 날카로운 산봉우리가 있는데, 큰 배와 같아서 선산(船山)이라고 불렀다. 산자락에서 굽어가는 곳에, 조그마한 협곡이 있는데, 구불구불하게 고공도와 연결된다. 이 세외낙원은 도연명이 욱주에 오기 전부터 유명했다. 도연명이 도화원을 쓸 때 이렇게 언급한 바 있다: "다시 앞으로 나가서 그 숲이 끝나는 곳까지 가면 물길이 끝나는 곳에 하나의 산이 있고, 산에는 하나으 입구가 있는데 마치 빛이 있는 것같다 배를 타고 입구를 들어가면 처음에는 아주 좁고 사람이 겨우 통한다. 다시 수십보를 들어가면, 돌연 확트이고, 토지는 넓다랗고, 집들이 들어서 있으며, 좋은 밭과 아름다운 연못이 있으며, 뽕나무와 대나무가 있다" 이것은 아주 재미있는 연상을 하게 만들어준다. 더욱 중요한 것은 시인 도연명은 실제로 이 곳을 와봤었다는 것이다. 그는 유명한 <<음주시>>에서 "재석증원유, 직지동해우(在昔曾遠遊, 直至東海隅, 옛날에 멀리 여행갔을 때는 동해의 귀퉁이까지 간 적이 있다)"고 한 바 있는데, 여기서 '동해우'가 바로 이 곳이다. <<진서.지리리>>에 따르면, 욱주산은 진나라때 동해로 불리웠고, 당시에 해주는 임구(臨)라고 불리웠는데, 모두 동해군에 속했다. 그래서 도연명이 '동해우까지 여행한 것'을 '멀리 여행한 것'이라고 한 것이다. 이는 바로 동해의 일각에 있는 숙성 고공도를 갔다온 것을 말한다.

 

남당의 시인 이중은 일찌감치 도연명이 숙성산을 왔다갔다는 것을 인식했다. 그는 욱주산을 여행하면서, <<춘일서회기구산손명부>>라는 시에서 "유련도정절, 시주매상친(猶憐陶靖節, 詩酒每相親)"이라고 읊었ㄷ. 소동파도 도연명이 욱주산을 읊은 적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해주 구산에 갔던 것을 회고하면서 도연명의 "재석증원유, 직지동해우"의 싯구를 모방하여 시를 지은 적이 있다. 그리고 청나라말기의 양강총독 도주도 자칭 도연명의 후예라고 했는데, 역시 도연명연구의 전문가였다. 그는 <<도정절선생연보고이>>라는 글을 썼다. 그리고 도광제 민녕에게 고공도, 숙성일대의 '계견상마"의 태평경상'을 묘사한 바 있는데, 민녕은 "그 광경이 도화원과 다를 게 무엇이냐?"라고 반문했다고 한다. 황제의 입에서 나온 이 말에 해주의 사람들은 모두 즐거워하였다.

 

중국인들은 1600년간이나 '도화원'의 꿈을 찾아헤맸다. 지금까지 누구도 진짜 도화원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이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지금까지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이다. 어디가 도화원인가? 위에서 언급한 7군데가운데 하나가 도화원인가? 아니면 모두 아니고 다른 곳인가? 아니면 그저 우리의 마음 속에만 존재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