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허화강(許禾鋼)
중흥황제 유수는 키가 크지 않았다. 겨우 7척3촌이었다. 그가 살았던 당시에 8척이상이어야 장대한 남자로 보는 기준에 따르면, 그는 '경량급'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경량급인 그는 중량급의 인간적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중국역사상, 그는 논쟁의 여지가 없는 치국평천하의 고수이다. 그리고 그의 성공은 어느 정도 그의 인간적 매력에서 비롯되었다.
유수가 처음에 그의 큰형인 유연(劉演)을 따라 반란에 참가했을 때, 무리들의 장비는 아주 형편없었고, 전마(戰馬)도 불쌍할 정도로 작았다. 일부 장군들은 군마를 서로 차지하기 위하여 얼굴을 붉히며 싸우기도 했다. 물건을 드물수록 귀한 법이다. 특히 신분등급을 중시하는 당시에, 드물게 보는 전마를 갖는다는 것은 바로 존귀한 신분과 지위를 나타내는 것이며, 군대내에서 체면을 중시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른 사람보다 못한 것을 가지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때 유수는 다른 사람이 모두 취해도 나만은 깨어 있겠다는 듯한 태도를 나타낸다. 제이인자인 그는 상당히 신사적이었다. 다른 사람과 다투지 않았을 뿐아니라, 자기으 전마를 양보했다. 그리고는 아주 독특하게 다른 사람과는 다르게 놀았다. 의거전에 집에서 쓰던 황소를 끌어다가 자기가 타고 다녔고, 조금도 이를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주 유유자적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것이 바로 유수이다. 중국역사상 독특한 "우배황제(牛背皇帝)"이다. 이때부터 이름에 빼어날 '수(秀)'를 가진 동한의 개국황제인 그는 초범탈속(超凡脫俗)의 "매력있는 수"로서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된다.
병사를 이끌고 전투를 하는데 있어서, 유수는 일류의 군사가이다. 군사학적으로 경전적인 전투인 곤양(昆陽)전투는 그의 대표작이다. 그런데, 천하를 얻고 나자, 이 녹림영웅은 하룻밤만에 역할을 완전히 바꾼다. 전장터를 누비며 휘황하게 싸우는데는 더 이상 관심을 가지지 않고, 나라를 다스리는데 집중하여 정력을 쏟으며, 흥미를 나타낸다. 연습도 필요없었다. 소타고 다니던 황제는 바로 컨디션을 정상화시키고, 매일 조회에 참석했다. 해뜨면 나가고 해지면 들어오는 날이 계속되었다. 아주 근면한 군주의 모습이었다.
태자인 유장(劉庄)은 부친이 한밤중까지 촛불을 켜고 글을 읽으며, 조정의 일을 처리하는 것을 보고는 가슴이 아팠다. 그리하여 기회를 보아 유수에게 이렇게 권했다: "폐하께서는 우임금 탕임금의 밝음이 있으시나, 황제 노자의 양생의 복은 잃으셨습니다" 이렇게 부친이 너무 피곤하게 일하지 말 것을 권했다. 아들의 효심에 유수는 감동했다. 그러나 그는 담담하게, "나는 좋아서 하는 것이다. 이것때문에 피곤하지는 않다" 아무렇게나 던진 이 한마디 말에서 그가 천하창생을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지가 드러난다. 이때부터 세상에는 "낙차불피(樂此不疲, 좋아서 하고 힘들지 않다)"는 말이 유행하기 시작한다.
중앙집권의 필요에 따라, 유수는 높은 작위와 두터운 녹봉을 주고 일부 개국공신의 실권을 빼앗았다. 그러나, 그들의 공로는 전혀 잊지 않고 있었다. 한번은, 유수가 여러 공신들과 연회를 베풀고 있었는데 연회중에 그가 물었다: "여러분이 만일 나를 따르지 않았다면, 지금쯤 어떤 작위와 녹봉을 받을 것인지 한번 생각해 보시오" 그러자, 운태이십팔장의 우두머리인 등우(鄧禹)가 제일 먼저 대답했다: "저는 군의 문학박사는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자, 유수가 말했다: "너무 겸손하다. 너는 명문세가의 자손이니 연공조(掾功曹)는 걱정없이 했을 것이다" 마무(馬武)의 차례가 되자, 마무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도적을 잡는 위(尉)는 했을 것입니다" 그러자, 유수는 슬쩍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도적을 잡는다고? 도적이 되어 잡히지만 않는다면, 정장(亭長) 정도나 했으면 괜찮겠다" 이 한마디로 자리는 온통 웃음바다가 되었다. 유수는 이렇게 거의 농담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서로 어울리고 융합하는 군신간의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교묘하게 자신의 공신들에 대한 감정과 관심을 나타낸 것이다. 동시에 공신들에게도 음미할만한 말들을 던진다: "만일 나를 따르지 않았다면 너희에게 어찌 지금의 부귀영화가 있겠는가? 그러니 스스로 만족한 줄 알라" 이런 수법은 한고조 유방이 공신을 대했던 방식에 비추어 실용성에 있어서도 전혀 손색이 없고, 예술성에 있어서는 같은 수준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높다.
유수는 공신들에게 아주 잘 대해주었다. 그리고 원수에 대하여도 도량을 발휘했따. 그와 주유(朱鮪)간의 은원관계가 대표적이다. 주유는 원래 녹림군의 장군이었다. 경시제(更始帝) 유현(劉玄)이 황제를 칭했을 때, 대사마가 되었다. 유현이 유연을 살해하였을 때, 주유는 주모자의 하나이다. 유수와는 형을 죽인 원한이 있는 자이다. 유수가 황제가 된 후에, 대군을 이끌고 주유가 지키는 낙양을 공격했는데, 3개월이 되도록 함락시키지 못했다. 그리하여 주유와 교분이 두터운 대장 잠팽(岑彭)을 보내어 주유로 하여금 투항하게 권유했다. 주유는 자신이 이전에 지은 죄가 가볍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유수가 용서할지에 대하여 자신이 없었고, 그것때문에 고민하고 있었다. 잠팽이 유수의 군영으로 돌아온 후, 주유의 속마음이 그러하다는 것을 보고했다. 유수는 말을 들은 후 담담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큰 일을 하려는 자가 어찌 작은 원한을 기억할 것인가? 주장군이 낙양성을 가지고 투항한다면, 관작은 그대로 보류해줄 것이다. 어찌 죽이려고 할 것인가" 잠팽이 반신반의하자, 바로 손을 들고 황하를 가리키며, "나는 황하물을 걸고 맹세하겠다. 절대로 식언하지 않는다!"
잠팽이 말을 타고 낙양성으로 돌아가서, 유수의 말을 그대로 주유에게 전했다. 며칠간 깊이 생각한 후에, 주유는 투항할 마음이 생겼다. 그리하여 허실을 알아보기 위하여 단기로 한나라군영으로 달려와서 스스로의 몸을 묶고, 잠영에 이끌려 유수의 군영으로 갔다. 유수는 두 사람이 오는 것을 보고는, 급히 몸을 일으켜 맞이하며, 친히 주유를 묶은 끈을 풀어주었다. 주유는 무릎을 꿇고 절하며: "신이 죄를 지었습니다. 폐하께서 용서해 주시길 바랍니다" 유수의 대답은 주유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주유를 부축하며 아주 담담하게 말했다: "주인을 위하여 충성하는 것이 무슨 죄가 되겠는가? 장군은 더 이상 그런 말을 하지 마시오." 그 후에 주연을 베풀어, 주유와 함께 마셨다. 그 가운데, 유수는 원수를 만나 얘기하면서도 마치 친구를 만나서 얘기하는 것과 같았다. 주유는 온몸에 식은 땀이 흘렀다. 다음날, 이 사나이는 낙양성의 장정들을 이끌고 유수에게 투항했다. 유수는 싸우지도 않고 적의 병사를 굴복시킨 것이다. 그 후에도 그는 이 은원관계를 원만하게 끝내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는 그 자리에서 주유를 평적장군(平狄將軍)에 임명하고, 부구후(扶溝侯)에 봉했다.
유수의 대범함과 겸허함은 무형의 거대한 친화력과 호소력을 부여했다. 그와 적이었던 사람들마저도 기꺼이 그의 휘하에 들어왔다.
건무4년(28년), 농우에 할거하고 있던 서주상장군 외효(隗囂)는 유수에게 귀순할 것을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그가 아끼는 장수인 마원(馬援)을 유수의 군영에 보내어 탐색하게 하였다. 유수는 통상적인 관례처럼 대청에서 자리에 앉아 맞이하던 것과는 달리, 특수한 방식으로 이 사자(使者)를 맞이했다. 그는 간편한 복장을 하고, 혼자서 선덕전의 복도에 있는 방에 앉아서, 환관 한명으로 하여금 마원을 데리고 들어오게 하였다. 유수의 목적은 가벼운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었고, 두 사람의 거리를 가깝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것은 유수의 장기이며, 매번 잘 통했다. 만나자마자, 마원이 입을 열기도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 "두 황제 사이에서 일하였으니 견식이 분명히 넓을 것이다. 오늘 이렇게 만나보니 정말 부끄러울 정도이다" 마원은 그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지만, 어쨌든 세상경험이 많았으므로 유수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는 멀리서 왔는데, 폐하가 저를 만나면서 위사도 하나 대동하지 않으셨는데, 제가 자객이면 어쩌시려고 그러시나이까." 그러자, 유수는 "당신이 자객일리가 있느냐. 당신은 그저 유세객이 아니냐"
이번 만남에서 마원은 유수의 인간적인 매력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유수는 예전의 한고조와 같이 진정한 제왕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오래지 않아 그는 외효에게서 벗어나 유수에게 투항한다. 그리고 전공을 많이 세우고, 유수는 그를 복파장군(伏波將軍)에 임명하고, 신식후(新息侯)에 봉하고, 나중에 그와는 사돈을 맺는다.
전공을 다투기를 싫어하여 대수장군이라는 별호를 얻은 풍이(馮異)도 일찌기 유수의 적이었다. 유수가 공성을 하는데, 풍이가 순시하다가 유수의 사병에게 체포되었다. 유수는 풍이가 인재라는 것을 듣고는 바로 그를 만나보았다. 그리고 그에게 같이 일하자고 한다. 풍의는 투항할 뜻을 비친다. 다만, 그는 효자여서, 성안에 갇혀 있는 부모를 버릴 수 없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유수에게 자기를 먼저 풀어주면 부모를 잘 피신시킨 후에 다시 투항하겠다고 말한다. 유수는 응락하였다. 부하들은 모두 그의 말을 믿기 힘들다고 말하고, 그를 풀어주는 것은 호랑이를 숲으로 되돌려보내는 것과 같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유수는 자기의 판단에 자신이 있었다. 나중에 풍이는 과연 그의 약속대로 성내의 사람을 설득해서 다섯개 현이 함께 유수에 귀순한다.
유수에게는 자석과도 같은 매력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기 힘들다. 이것이 호소력이다. 이런 역량이 있어야 비로소 그의 곁에 풍이와도 같이 싸움을 잘하는 사나이들, 그리고 죽을 때까지 충성을 다하는 의형제들 즉, 운태이십팔장을 끌어모을 수 있는 것이다.
드문 것은, 유수의 대범함은 고위관리에게만 미치지 않았고, 보통의 낮은 관리나 일반 백성들도 마찬가지로 대우받았다는 것이다. 유수는 취미가 다양하지 않았다. 사냥은 그의 몇 안되는 취미중 하나였다. 한번은 유수가 바깥으로 사냥을 나갔는데, 흥에 겨워 놀다가 돌아오니 한밤중이었다. 상동문을 통하여 성내로 들어가려고 하였다. 그런데, 성을 수비하는 병사인 질운(郅惲)이 통과시켜주지를 않았다. 부하가 가서 아무리 설득을 해도, 성문을 열어주지 않은 것이다. 유수는 어쩔 도리가 없어, 할 수 없이 중동문으로 돌아서 성으로 들어갔다. 다음 날, 유수가 죄를 묻기도 전에, 이 간덩이가 부운 문을 지키는 하급관리는 겁도 없이 글을 올려 유수를 질책했다. 스스로 즐겁자고 산속에서 사냥이나 하고 놀면서 밤새워 즐기며 강산과 사직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생각지 않느냐는 내용이었다. 하급관리의 무례함에 유수도 깜짝 놀랐다. 그는 글을 본 후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명령을 하나 내렸다. 질운은 100필의 포를 상으로 받았고, 유수를 성으로 들어오게 허용한 중동문후는 참봉현위로 강등시켰다. 이 사건은 유수로 하여금 질운을 기억하게 만들었고, 나중에 태자의 전중시강으로 등용한다.
주당(周黨)이라는 은거기인이 있었는데, 명망이 높았다. 유수가 그의 이름을 듣고는 그를 불러 의랑의 직을 주고자 했다. 그러나, 그는 피하고 받지 않았다. 조정이 재삼 그를 부르다보니, 이 고집쟁이 늙은이도 할 수 없이 관리를 따라 경성으로 들어왔다. 유수는 친히 그를 만난다. 그런데도 이 늙은이는 자기를 대접해주는 줄 모르고, 유수를 보고도 고두배알하지도 않을 뿐아니라 이름도 아뢰지 않았다. 그저 자신은 관리가 되고 싶지 않다는 말만 지껄였다. 박사 범승은 이 늙은이의 오만무례를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바로 황상에게 그를 '대불경'죄로 처단하자고 청했다. 유수는 이렇게 말했다: "자고로 명왕성주라고 하더라도 모시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은 있기 마련이다. 백이 숙제는 주나라 곡식을 먹고 싶어하지 않았고, 태원의 주당은 짐의 녹을 먹고 싶어 하지 않으니, 각자 다 자기 뜻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주당의 죄를 묻지 않았을 뿐아니라, 오히려 그의 태도에 이해와 관용을 표시했다. 주당의 의삼이 남루한 것을 보고는 그에게 40필의 비단을 내리고, 그의 뜻에 따라 고향까지 데려다 준다.
양한의 황제중에서 유수는 호색하지 않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결혼이 가장 늦었다. 나이 삼십이 다 되어서 결혼했다. 그리하여 그는 중국황제중 가장 만혼을 한 기록보유자이기도 하다. 그는 일생동안 단지 3명의 여인을 취했다. 이 세명의 후비중에 허미인은 거의 명목상의 후비였고, 전황후 곽성통은 품행이 문제되어 일찌감치 폐위시켰으므로, 그는 그저 음려화 황후라는 원래의 부인과만 거의 살았던 셈이다. 이들 둘은 인생 거의 전부를 함께 걸었다.
다른 사람과 반대로 하는 것은 유수의 독문수법이었다. 다른 군주들은 엄한 형벌로 천하를 다스렸는데, 그는 '부드러움'으로 천하를 다스렸다. 과연 이유극강의 효과를 누렸다. 그리고 자기가 묻힌 곳 즉 원릉(原陵)의 문제에 있어서도, 이 독특한 황제는 세상사람들에게 또 다시 놀라움을 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는 제왕들의 왕릉선택에 있어서의 통상적인 방식처럼 망산령에 다른 제왕들과 같이 자리하지 않고, 혼자서 망산의 아래에 있는 황하의 강변에 묻혔다. 강을 베고 산을 밟고 누운 형국이다. 이것도 후세에 수수께끼로 남는다.
57년, 63세의 유수는 낙양에서 병사한다. 자신이 일하던 중에 죽었다고 한다. 남궁의 전전에서 문서를 살펴보던 용안의 앞에 쓰러진다. 그는 '낙차불피'는 말장난만은 아니었던 것같다. 이 동한왕조의 개창자는 광무제(光武帝)라는 시호를 받는다. 하남성 맹진현 백학진의 철사촌은 그가 잠든 곳이다. 현지에서, 그의 능묘는 상당히 평민화된 호칭으로 불리고 있다. 유수분(劉秀墳). 비록 우아하지는 않지만 친근한 호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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