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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민국 후기)

평형관(平型關)의 수수께끼를 찾아서 (II)

by 중은우시 2008. 7. 9.

 

포기인가 함락인가

 

진장첩의 주장은 고빈과 고사결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 고빈은 이런 의문을 제기한다: "진장첩이 61군을 이끌고 200리 떨어진 후방에서 대기하고 있었고, 명령을 받아 평형관으로 지원을 왔으며, 선두부대는 24일 밤에 도착했다. 그는 무엇을 근거로 고계자의 부대가 적군의 "맹공"을 받아 "사상이 참중"하다는 것을 거짓말이라고 하는 것일까? 무엇을 근거로, 고계자가 "적을 피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임의로 진지를 포기하고" 심지어, "고의로 요새를 버리고" 우군에게 해를 입혔다고 하는 것일까?

 

84사단은 퇴각명령을 받은 것일까? 아니면, 궤멸되어 물러난 것일까? 84사단진지는 포기된 것일까 함락된 것일까? 이 두가지의 의미는 전혀 다르다. 섬서성사회과학원 부연구원인 곽윤우가 말하는 바와 같이, 포기는 지킬 수 있는데 안지키는 것이므로 어떤 목적을 위하여 고의로 버리는 것이며, 함락은 적과 아군의 역량차이로 지키고 싶어도 못지켜서 할 수 없이 잃는 것이다.

 

필자는 당시 각계인사의 글을 많이 읽어 보았다. 전범, 종군기자, 현지촌민의 수백만자의 전투보고, 전보, 회고, 진술 및 각지 학자의 분석과 평론을 보았다. 그리고 역사현장을 다시 재현해보고 싶었다. 당시의 포탄비와 피바람속에서 진실의 맥락을 찾고 싶었다.

 

많은 문자기록에서 알 수 있는 당시의 상황은 다음과 같다:

 

23일에서 25일까지, 일본군은 단성구를 집중 공격했고, 고계자의 부대는 30여리의 여러 산머리를 방어하느라 사상이 심각했다. 혈전으로 인하여 예비대도 가장 시급한 곳에 배치되었다. 심지어 수십명의 기병도 고계자에 의하여 보병처럼 전선에 투입되었다. 어떤 산의 관병은 모조리 희생되었고, 한층한층 위로 보고되었다. 고계자에게는 더 이상 투입할 병력이 없었다.

 

고계자는 화급하게 전선총지휘관인 양애원과 부총지휘관인 손초에게 보고했고, 증원을 요청했다. 양애원, 손초는 이 객군장군의 보고를 믿지 않았다. 군벌혼전이 여러해동안 이어진 중국에서 오늘은 악수하지만 내일은 칼을 뽑아야 한다. 그저 헛말로 지원한다고 안심시키기만 했다. 원군을 곧 보낼테니, 견뎌라. 조금만 더 견뎌라.

 

당시 제6집단군 비서장을 맡고 있던 노선랑의 회고에 의하면: "제6집단군본부는 회의를 개최해서 대책을 논의했다. 제7집단군총사령관인 부작의도 자리에 있었다. 여러 사람들이 전선이 더 이상 버티기 힘들다는 의견이었다." 노선랑은 특히 제15군에서 2개단의 병력을 빼내어 고계자를 증원해주어 압력을 감경시켜주자는 건의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손초는 지원군을 파견하지 않는 입장을 고수한다. "그저 곽종분의 부대를 이미 출격하도록 했다는 공허한 말만 할 뿐, 고계자에게는 함부로 후퇴하지 말라고만 명령했다"

 

명목상으로 고계자의 지휘를 받게 되어 있는 제21사단의 이선주도 상사의 증원명령을 거부한다. 어쩔 수 없어진 고계자는 자기의 진지후방에서 명을 기다리던 예비대 ?종분과 다른 우군에게 지원을 요청한다. 1개단, 1개영이라도 눈앞의 시급한 불은 끌 수 있었다. 곽종분과 그의 부하인 진광두 여단장은 모두 거절한다.

 

옛 동맹회 회원인 속범정은 <<3년불언지언>>이라는 글에서 의분에 가득차서 기술했다. 염석산은 제6집단군 총사령관 양애원의 보고를 받았다: "곽종분 사단장은 총예비대로서 명령에 위배하여 증권하려 하지 않는다, 이미 좋은 시기를 하룻 밤 낮이나 놓쳤다. 가장 좋기로는 염사령관이 직접 내려와서 독전하시는 것이다...운운" 염석산은 밤을 세워 평형관으로 간다. 그날 저녁 제6집단군 사령부에서 "곽종분이 먼저 줄줄이 좋은 말은 다 해가면서 1시간여를 보고했다. 그는 증원하지 않은 이유를 구구절절이 설명했다. 그중 가장 중요한 말은 '우리는 여지를 남겨야 한다. 실력을 보존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역량을 다 써버리게 된다'는 것이었다" 곽종분이 나간 이후, 양애원은 비로소 전쟁상황을 상세히 보고했다. 그리고 곽종분이 전쟁을 회피하고 증원을 하지 않은 사실도 언급했다.

 

고사결은 많은 힘을 쏟아서, 노동개조국으로부터 당시 84사단 502단 3영의 기관총연 연장인 구앙악이 감옥에서 쓴 글을 찾아낸다. 거기에는 그 단의 전투상황을 잘 묘사하고 있다: 두문경 대리단장은 돌파구를 막으려고 하다가 총알을 맞고 순국한다. 삼영은 단성구의 좌익을 방어했다. 9월 25일 오전 10시, 진지에는 전투력을 가진 관병이 이미 얼마 없었다. 대부분이 죽거나 부상을 입었다. 총소리가 점차 줄어들었다. 일본군은 기회를 틈타 벌떼처럼 밀고 올라왔고, 진지는 함락되었다. 남아있던 부상병들은 일본군에 의하여 모두 죽임을 당한다. 고계자는 21사단에 증원을 명령했으나, 21사단은 항명했다. 진군에서 고계자부대의 작전을 지원하러 온 포병 1영은 대포 하나 쏘지 않았다. 목표물이 되어 일본군의 포격을 받을까봐 겁을 낸 것이다.

 

고빈과 고사결은 모두 이렇게 생각한다: 구앙악이 말한 "진지는 25일 오전 10시에 함락되었다"는 것이 가장 믿을만 하다고. 이것은 고계자가 장개석에게 보낸 전보, 이선주가 장개석에게 보낸 전보 및 고건백의 회고록에서의 주장등과 서로 맞아떨어진다.

 

일본방위청방위연구소전사실이 편찬한 <<중국사변육군작전사>>라는 책에서는 "전황이 곤란해졌고, 전투가 격렬했다. 25일, 여단은 마침내 당히 진지부근의 2킬로미터의 장성선의 정면을 점령했다. 그러나 같은 날 우세한 적군이 여단의 후방연락선을 차단하고, 계속 병력을 증가시켜, 당해 여단은 포위되는 곤경에 처한다" 여기서 말하는 일본군이 점령한 '2킬로미터의 정면"은 바로 502ㅇ단이 오전10시경에 함락당한 진지일 것이다.

 

아무도 고계자를 도와주지 않았다. 고계자의 부대는 강적의 계속되는 진공아래, 전투력을 극도로 소모하면서도 증원군을 받지 못했다. 다 흩어지고, 다 죽고, 결국 무너졌다. 서로 돌봐줄 수가 없었고, 아래위가 연락되지 못했으며, 진지는 사상자들로 넘쳐나고, 더 이상 일본군에 총을 쏠 사람이 없었다. 열사들은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하고, 호랑이같고 이리같은 일본군들이 산을 하나하나 점령하는 것을 분노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진장첩의 여러 주장은 모두 친히 겪은 사람, 친히 목격한 사람들이 부정한다.

 

종군기자인 추강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석산의 위에 임시로 동굴을 파서 몸을 숨겼다. 몸은 숨겨도 머리는 숨길 수 없을 정도였다. 적군의 포화가 맞지 않더라도 튀는 돌맹이에 맞아서 쓰러졌다." 서간에 임시로 동굴을 파고 겨우 몸뚱이만 숨겼는데, 무슨 '견고한 진지'인가? 추강이 친히 보고 들은 것은 고계자가 지원병이 오지 않는 것을 보고, 할 수 없이 부하들에게 최저한도의 전투를 지시한다: "다른 곳이 적에게 돌파되더라도 움직이지 말라. 그냥 죽을 때까지 저항하라. 끝까지 싸우는 것이 너희의 임무를 완성하는 것이다" 즉, 사람이 있는 한 진지는 있다는 것이다.

 

84사단의 고건백 여단장의 진술을 다음과 같다: 9월 23일, 진군이 지키는 1886.4고지가 점령되었다. 염석산은 이를 듣고 깜짝 놀란다. 현상금 만원을 걸고 진지를 되찾아오도록 하였다. 고계자부대의 여효도 단장은 분용대를 지휘하여 진군을 대신하여 포화가 난무하는 가운데 이 고지를 빼앗아 와서 진군에 넘겨준다. 그래도 상금을 받지 못했고, 진군은 진지를 접수했다는 영수증을 주었다. 마찬가지의 사정이 25일 새벽 2시에 다시 발생했다. 진군은 다시 1886.4고지를 잃는다. 여효도 단장은 분용대를 뽑아서 다시 빼앗아 온다. 분용대 50여명중 생환자는 겨우 11명이었다. 자기의 희생을 무릅쓰고 우군의 진지를 되찾아 온 것이다. 이것이 '적을 피하려는 뜻이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인가.

 

진장첩은 고계자부대가 패퇴한 후 '항산에 숨었다'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더욱 근거가 없다. 9월 26일, 염석산은 장개석에게 전보로 보고하는데, "17군 군부대와 84사단 사단부대는 번치 상대촌에 있다" 그리고 17군의 "250여단과 251여단은 단성구 부근에 배치했다"; 진장첩이 염석산은 고계자를 '죽여버려야 한다'고 하였다는 것인데, 아무런 방증이 없다, 고계자와 같은 뒷배경도 없고, 병력을 많이 잃어 실력도 떨어진 잡패군 장군이 정말 군법을 위반하였다면 염석산이 '죽여야 한다'고 말했다면, 바로 '일벌백계"를 할 수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왜 염석산은 장개석에게 처벌해달라고 요구하지 않았을까?

 

염석산이 중앙에 보고한 내용을 보면, 진장첩의 주장이 허망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9월 24일, 염석산은 본부에 밀전을 보낸다: "특급. 남경대본영...영구방면의 적은 우리 평형관, 채가욕의 전진기지로 진공한다. 우리 수비병은 극력 저항한다. 야전에서 대부분 평형관진지를 맹습했고, 우리 군은 용감하게 항적했으며, 육박전이 여러차례있었고, 적군을 격퇴했다. 적 약 1개사단이 두 길로 나누어 평형관과 단성구를 공격한다. 전황이 극렬하고, 적군과 아군이 산머리를 다투어 사상이 심하다. 격전이 정오까지 계속되었고, 마침내 적을 격퇴하고, 20여리를 축겨했다. 단성구의 적도 오후 4시에 아군에 격퇴된다. 이 전투에서 우리 는 단장 1명이 부상을 입고, 영장 3명이 사상되고 사병 약 2천이...."

 

현지에서 이 전투를 목격한 백성도 이런 기록을 남겼다:

 

"비가 꼬박 7일간 내렸다, 전투도 꼬박 7일밤낮 계속되었다. 적과 아군 쌍방의 사상이 아주 컸다. 아군의 첫번째 방어선에서 희생자가 가장 많았다. 희생된 사병은 대부분 남군(고계자부대)이었다. 전호에는 시신이 가득찼다. 당시, 우리는 제2방어선 마을서쪽의 언덕에 엎드려 있었다. 쌍방이 싸우는 것을 확실히 보았다...비록 우리 장병이 전투들 용감하게 하였지만, 우군의 협조지원이 아주 안좋아서, 적군을 더 많이 죽이지 못하였다"

 

장개석 적계의 이선주 21사단은 당시 고계자의 지휘를 받게 되어 있었다. 진지는 고계자의 84사단과 붙어 있었다. 이선주는 9월 25일 장개석에게 밀전을 보낸다. 내용은 비교적 객관적이다: "오늘 정오 84사단의 사상이 비교적 중함. 전부 궤퇴(潰退)됨. 단성구진지는 적에게 돌파당함....이 사이에 작전의 불리한 원인 (1) 지휘관능력박약, (2) 지휘불통일, (3) 상하연락두절, (4) 우군간 상호불신, 상호구원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적에게 각개격파당함"

 

그에 따르면, 84사단은 "궤멸되어 퇴각(궤퇴)"당하였다. 이는 철수명령을 내린 것이 아니다. 시간은 '오늘 정오 즉 낮 12시이다. 그가 분석한 바에 의하면 작전불리의 원인에서 "상하간 연락두절"과 "우군간 상호불신, 상호구원하지 않음"을 꼽았다.

 

이 주장은 진장첩의 말을 뒤집는 것이다. 진장첩은 고계자 부대가 싸우는 것을 보지 못했다. 왜 고계자가 마음 속으로 어떻게 생각하는지까지 알 수 있었을까? 섬서성 사회과학원 연구원인 곽윤우의 분석에 의하면, '주로 그의 군벌 파벌관념때문에 그럴 것이다'라고 한다. 그는 진군이고, 진군에 대하여는 칭찬해 마지 않지만, 책임은 모두 고계자의 섬군에 떠넘긴 것이다.

 

많은 역사학자들은 왜 대량의 진실한 기록을 무시하는가? 오히려 진장첩의 친히 겪지도 않은 '친력기'를 쉽게 믿어버리는가? 고사결의 분석에 따르면, 국내역사학자들은 자료를 얻기가 힘들다고 한다. 자료를 모두 장악하지 못한 것이 아마도 역사적사실의 본질을 판단하는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선입견을 가진다. 진장첩의 '친력기'가 발표된 후, 많은 사람들은 이것이 평형관전투의 '알려지지 않은 내막'이라고 생각했다. 진장첩의 파벌관념으로 사실을 왜곡했을 것이라고는 왜 생각하지 않았을까? 먼저 진장첩의 영향을 받은 것은 전국정협의 편찬한 <<진수항전>>이다. 진장첩의 주장과 일치시키기 위하여, 고건백의 회고록에 쓰여 있는 시간까지 고쳐버렸다.

 

출격허실

 

고계자가 지원군을 얻지 못했는데, 손초와 곽종분의 거절이유는 다음과 같다: 예비대는 출격을 위해서 남겨둔 것이다. 고계자와 그의 장병들의 유일한 희망은 그들이 계획대로 출격할 수 있느냐에 걸려 있었다.

 

상해학자인 양규송은 <<평형관전투의 사실재건문제에 관하여(수정)>>에서 하나의 의문을 제시한다: 국민당군은 그날 도대체 출격한 것인가 아닌가? "국민당의 당시 전투보고와 전보에 의하면, 국민당군 71사단등은 당일 고계자사단이 잃은 진지를 회복하는 임무를 완성한 후, 동서포지의 양측에서 대거 출격한 것으로 되어 있다. 기괴한 것은 일본군의 전사자료에는 유사한 상황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는 점이다. 임표의 그날(25일) 저녁의 전보에서는, 국민당측면의 기록을 어느 정도 뒷받침해주고 있다. 임표는 전보에서, "하루 종일 싸웠다. 황혼때부터 진군의 ?격보대가 보였다. 소위 두 길로 나누어 출격하는 것인데, 모두 억지로 했다!"

 

왜 양규송은 일본군 전사자료중에서 곽종분 사단이 출격한 기록을 찾지 못했을까? 고빈은 반복하여 증거를 찾아본 끝에, 내린 결론은 이렇다: "곽종분의 428단이 출동했다. 그러나 출격하지는 않았다!" 그는 <<평형관에서 전투한 428단>>이라는 책을 증거로 내밀었다.

 

행정원은 당시 곽종분의 71사단 428단 1영 3련의 반장이었고, 나중에 단부의 전령반장이 되었다. 그는 "(24일) 야간에 비가 내렸다. 그러나 84사단방어지역의 후방에서는 밤에도 여전히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포성과 총성과 죽여라는 소리가 아주 잘 들렸다."

 

제428단은 25일 오전 8시에 출격했다, "84사단은 마음대로 퇴각하여, 428단은 앞뒤로 적을 맞이하게 되었다. 좁고 긴 산골짜기에 갇혔다." "동시에 출격한 것은 제202여단 제403단 중령 시국헌이 이끄는 두개 영이었다. 그들도 428단과 함께 포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출격시 부대는 모두 경무장을 하고 전투에 나섰다. 당시 단에는 무전기가 없었다. 포위된 후에 사단과 연락이 되지 않았다. 전황에 대하여는 아무 것도 몰랐다. 식량도 문제였다. 어쩔 방법이 없었다. 나중에 돌연 동남방에서 총소리가 들렸다. 보니 골짜기내의 도로에 부서진 자동차들이 보였다. 왕영작(428단장)은 서북으로 단성구내로 물러가기로 결정했다. 이후에 비로소 8로군 제115사단이 일본군을 저격했다는 것을 알았고, 휘황한 승리를 거두었다는 것도 알았다. 428단이 철수한 후, 한밤중에 안전지대로 가서 사단과 연락했다."

 

원래, 115사단이 적을 섬멸할 때, 428단은 "좁고 긴 산골짜기내"에 숨어 있었고,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중에는 길을 돌아서 물러났다. 양규송이 일본군의 자료에서 출격기록을 찾지 못한 것도 다 이유가 있었다.

 

행정원은 아주 상세하게 기록했다. 다만 산골짜기내와 산위의 일본군의 전투행동, 과정, 사상상황을 언급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중에 한 구절을 보면, "428단이 철수한 후, 곽종분은 왕영작에게 사단본부에서 명령을 받으라고 했다. 왕영작은 그의 변목, 마변과 나의 반을 이끌고 밤중에 도보로 사단본부에 갔다. 길을 걷는데, 변목 가국동이 왕영작에게 말했다: 현재 연좌법을 실행하는데, 우리는 출격임무를 완성하지 못했는데다가 손실까지 입었으니, 사단장이 보고할 방법이 없으면, 책임을 당신에게 떠넘기지 않겠는가? 만일 사단본부에 도착하면, 그가 얼굴을 바꿔 문책할 수 있고, 우리는 억울하게 희생양이 될 것이다." 왕은 그 말을 듣고는 사단본부에 가지 않기로 결정했고, 단본부로 돌아갔다. 그리고 신속히 전화선을 가설하라고 지시했다. 전화가 개통된 후 왕은 전선의 상황이 위급하여 몸을 뺄 수가 없다고 거짓말하고 부대의 다음 행동을 지시해달라고 하였다. 왕의 예상과는 달리, 곽종분은 그를 질책하지 않았을 뿐아니라, 그에 대하여 상을 내라고 격려했다.

 

고빈은 이를 근거로, 왕영작이 신속히 전화선을 가설한 후, 사단본부에 전선의 상황이 위급하다고 보고하였는데, 진군의 전투보고 및 회고록은 모두 이에 근거하여 71사단은 출격하다가 저지받았다고 한 것이다. 그는, "이것이 무슨 출격했다가 저지받은 것이냐? 출동은 했지만 습격은 없었다. 책임자는 당연히 단장인 왕영작이다"

 

임표는 평형관전투를 끝내면서 진군에 대하여 이런 평가를 내렸다: "우군은 전투에서 협조가 아주 안좋았다. 그들은 스스로 정한 출격계획을 그들 스스로도 지키지 않았다. 너는 싸워라 나는 구경한다는 식이었다. 그들은 자주 곧 결전(決戰)을 벌일 것이라고 하지만, 결(決)은 하나 전(戰)은 하지 않는다. 적군과 싸울 때도 끝까지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그들 본래 그다지 충분하지 않은데도, 돌격을 하면서 겨우 8개단으로 병력을 3갈래로 나누고, 다시 총예비대를 남긴다. 그리고 매로는 서로 10여리 내지 20여리 떨어져 있다. 이렇게 하면 출격력이 약화될 뿐아니라, 우리와 싸우다 패퇴하는 병사를 만나도 그들은 섬멸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포위망을 뚫는 적에게 당한다..."

 

진군은 "출격도 하지 않고, 증원도 보내지 않았는가?" 고사결은 부작의는 적의 증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모든 전선에서 출격하자는 의견을 누가 거부할 권리가 있는가? 단지 염석산이다. 출격명령을 5번이나 바꾼 것도 염석산 자신이다.

 

고빈은 출격이 무산된 과정에 대한 생각의 변화를 이렇게 설명한다. 처음에 그는 진군이 증원도 거부하고 출격도 지연한 것은 곽종분이 그랬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고건백의 회고록을 보고, 진군202여단의 여단장 진광두가 "우리는 장관의 명령을 집행한다"는 말을 하면서 인쇄된 명령지를 보여주었는데, 붉은 연필로 곽종분이 "염석산의 명령을 전달하는데, 본장관의 명령이 없이는 출격하지 말라"는 내용을 듣고는 원인이 염석산에게 있다고 믿게 되었다.

 

일본의 <<화북치안전>>이라는 책에는 일본군이 한복구, 유여명 및 염석산에 대하여 어떻게 평가하는지를 적어놓았다: "산동 및 찰합이 29군의 일부는 중립을 유지한다. 산서 및 수원군도 일부는 성경계까지 나와서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고, 감히 적극적인 태도를 나타내지 못한다"

 

고빈에 따르면, 나중에 염석산의 행동은 이것을 설명해 준다고 한다. 1941년부터 염석산은 갈수록 이상해진다. 일본과 정전의 '분양협정'을 체결하고, 염석산은 친히 친일파를 데리고 일본군의 '안평회의'에 참석한다. 거기서 염석산은 일관되게 친일적인 태도를 나타낸다. 이 회의는 우연한 사건으로 중단된다. 일본군은 진군에 대한 공격을 강화하는데, 그래도 염석산은 일본군에 서신을 보낸다: "너희는 너희를 동정하는 사람을 적으로 만들지 말라" 일본군은 진군을 향한 진격을 멈춘다. 제6집단군사령관인 양애원이 염석산에게 곽종분이 출격도 하지 않고 증원도 하지 않았다고 보고하였음에도, 염석산은 곽종분을 질책하지도 처벌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곽종분을 제2전구 참모장으로 승진시킨다.

 

고빈은 이렇게 강조한다: 고계자의 84사단은 평형관에서 3일낮 4일밤동안 혈전을 벌인다. 사상자가 아주 많았다는 것은 다툼의 여지가 없다; 단성구가 일본군에 돌파된 것은 항전군인으로서 책임을 면할 수 없다. 당연히 부끄러웠을 것이다. 만일 위로는 군단장부터 아래로는 말단병사까지 모두 죽었다면 책임을 면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진지는 어쨌든 함락되었고, 여전히 일본군을 모조리 섬멸시키지 못했다. 원래는 이런 기회가 있었다. 왜 전멸시키지 못했는지를 추궁하자면, 염석산, 손초와 곽종분이 책임자이다. '출격도 하지 않고, 증원도 해주지 않은' 것은 무엇때문인가? 항전에 소극적이어서인가? 우군을 희생하겠다는 것인가? 실력을 보존하겠다는 것인가? 판단착오인가? 조치실패인가? 어찌되었건 책임을 84사산에 떠넘겨서는 안되었다. '군중무희언'. 출격한다고 했고, 증원한다고 했으면면 말로만 하고 실제 행동으로 나타나지는 않았다. 이선주가 장개석에게 제2전구의 상황을 밀보하고, 이후 중앙에서 급히 인력을 산서에 파견하여 주재하게 한 것도 이해가 된다. 이후 위립황(衛立煌)이 산서로 파견나와 제2전구부사령관, 전선총지휘관을 맡아 염석산을 대신하여 흔구(?口) 전투를 지휘한다.

 

고빈은 항전후기때 이미 10여세였다. 부친의 군영에 여러번 가보았고, 전쟁의 포화를 경험했다. 부친대에서 전투에 관하여 하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많은 아저씨들이 희생되는 것을 보았다. 고사결에 따르면, 군인성격의 부친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딱 한번 보았다고 한다. 그것은 1955년 8월 섬서성 정협의 "세계반파시스트승리10주년기념회"상에서였다. 전 국민당군인이었던 정협부주석이 발언하면서, "국민당은 항일하지 않았다"고 했을 때, 고계자는 그 자리에서 그와 다투었다. 고계자는 비분강개하여 눈물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