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윤군군(尹珺君)
1949년이전, 장개석과 "사대가족" 및 국민당 고급관료는 중국의 주요한 경제명맥을 쥐고 있었다. 그들은 권력을 독점했고, 재산을 모았다. 도대체 그들이 얼마나 많은 재산을 가졌는지에 대하여 많은 민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연구하고 있다.
국민당정부의 고위관료들의 개인재산에 관하여는 계속해서 여러가지 설이 난무하고 있다. 논자들 중에서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방대한 재산을 가지고 있어서 이미 그들의 자산으로 중국경제와 정치를 지배하는 관료자산계급을 형성했다고 말한다.
이러한 주장의 유래는 최근들어 비롯된 것은 아니다. 일찌기 1949년이전에, 사회각계와 민간여론의 국민당정부 관료의 개인재산에 관한 여러가지 폭로가 있었고, 심한 비난도 있었다.
국민당원로인 채원배의 일기를 보면, 1934년 12월 26일의 <<강남정보(江南正報)>>의 기사에 따르면, 국민당요인의 재산은 대부분이 비밀이지만, 조사가능한 범위내에서 알아본 바에 의하면, 요인들이 본부(本埠, 즉, 상해)에 보유하고 있는 자산을 추정하면; 장개석 1300만원, 송미령 3500만원, 송자문 3500만원, 공상희 1800만원, 손과(손중산의 아들) 4000만원, 장정강 3000만원이다. 다른 요인이 상해의 각 중국계 및 외국계은행에 한 예금과 부동산은 중국은행의 조사에 따를 경우 약5억원이다. 그중 부동산과 회사는 대부분이 친척명의로 되어 있어, 상세한 상황을 확인하기는 힘들다고 하였다.
실제상황이 어떠했는지에 대하여 미국 스탠포드대학 후버연구소의 자료관에 소장된 장가(張嘉, 중국은행, 중앙은행총재역임)의 자료중에는, 1939년 10월 17일 일본특무기관이 국민당정부고위관료가 상해외국은행의 예금현황에 대한 비밀조사보고서가 들어 있다. 이름은 <<등집단특보병제1호 - 정부요인상해외국은행예금조사표>>인데, 발췌한 내용은 아래와 같다:
장개석 6639만원(미화809만달러,당시환율에 따라 환산한 결과. 이하 같음)
송미령 3094만원(미화377만달러)
송자문 5230만원(미화637만달러)
공상희 5214만원(미화635만달러)
송애령 1200만원(미화146만달러)
진입부 2400만원(미화292만달러)
송자량 550만원(미화67만달러)
장정강 3750만원(미화457만달러)
손과 2832만원(미화345만달러)
장군 2750만원(미화335만달러)
하응흠 2600만원(미화317만달러)
염석산 2800만원(미화341만달러)
하건 2000만원(미화244만달러)
진제상 6550만원(미화798만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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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예금은 모두 당시 상해에 개업한 외국은행 예를 들면 씨티은행(花旗), 매커리, 체이스맨해탄(大通), AIG(友邦), America Express Bank(運通), HSBC(匯豊), 네덜란드은행등에 예금되어 있었다. 위에 언급된 사람들으 일부는 국민당정부의 최상층에서 있던 사람들이다. 예를 들면, 장개석, 송자문, 공상희, 진입부등이 그들이다. 일부는 국민당정부의 군대내의 요인들이다. 예를 들면, 하응흠, 장군, 손과등이 그들이다. 일부는 재임중이거나 하야한 지방실력자이다. 예를 들면 염석산, 하건, 진제당등이 그들이다. 그러나, 이 조사보고서는 다른 어떤 방증도 없다. 그러므로, 얼마나 신뢰할만한 자료인지에 대하여는 당분간 단언할 수가 없다.
만일 이 조사보고서의 숫자가 믿을 만하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분석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국민당정부의 고급관료들은 확실히 많은 개인재산을 지니고 있었다. 상해에 소재하는 외국계은행에 예금한 금액만도 이미 상당한 액수에 달한다. 조사당해년도인 1939년을 예로 들면, 중국의 국내은행예금총액이 605,000만원(일본점령지구 제외)이었고, 정부예산수입이 74,000만원이었으며, 외화예금액은 25,000만달러였다(1937년).
상술한 18명의 예금총액은 56,785만위안(6918만달러)에 달하여, 당시 국내총예금의 9%를 차지한다. 그리고 정부예산수입의 77%에 달하며, 외환보유고의 28%에 해당한다. '부가적국(富可敵國, 부유함이 나라에 대적할 만하다)'이라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다. 이것은 단지 그들이 상해의 외국은행에 예금한 액수이다. 다른 도시나 중국이외의 외국은행이나 중국계은행에 예금한 것을 합산하면 도대체 얼마나 될 것인가? 그것도 절대 적은 숫자는 아닐 것이다.
둘째, 과거에 일반적으로 장개석, 송자문, 공상희, 진과부/진입부형제 중에서, 송, 공은 대량의 개인재산을 가지고 있지만, 장개석과 진씨형제는 개인재산이 많이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위의 조사자료에 의하면, 진입부가 적지 않은 예금을 가지고 있었을 뿐아니라, 장개석의 예금액수도 아주 많았다.
장개석과 송미령 부부의 예금액수는 9733만원(1186만달러)에 달하여, 당시 국내총예금액의 1.6%에 달하였고, 정부예산수입의 13%나 되었으며, 외환보유고의 4.7%에 이르렀다. 위에 언급된 국민당정부관리들 중에서 가장 많았다. 장,송,공,진 사대가문의 합계는 예금금액만 23,777만원(2896달러)에 이르러 당시 국내예금총액의 3.9%, 정부예산수입의 32%, 외환보유고의 12%에 달한다. 그들은 국민당의 군정대권을 장악했을 뿐아니라. 재산적으로도 다른 사람에 뒤지지 않았다. '사대가족'이라는 말이 그냥 나온 말이 아니다.
셋째, 국민당정부관리의 급여기준으로 보면, 그들은 절대 급여로 이렇게 거액의 재산을 모았을 수는 없다.
1933년 9월 23일에 공포한 <<임시문관관등관봉표>>에 따르면 특임관(장관 및 그 이상의 관리)은 매월급여가 800은원이었다. 당시의 은원과 화폐개혁후의 법정화폐는 기본적으로 동일한 가치이므로, 예금이 가장 적은 송자량의 예금액수만도 특임관급 관리의 573년치 급여에 해당한다. 1927년 국민당이 정권을 잡은 때로부터 짧은 12면만에 고급관리들이 이처럼 거액의 개인예금을 가질 수 있었다는 것은 분명히 급여이외의 수입이 있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급여외 수입은 두가지 채널이 있을 것이다: 합법과 불법.
만일 재산의 경로가 합법이라면(경영소득 혹은 상속소득), 바깥 사람들이 뭐라고 할 이유가 없다. 그렇지만 정부고위관리로서 회사경영에서 특권이 없었는지, 부하들이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일부러 바친 것은 없는지는 여전히 따져봐야 할 것이다.
하물며, 당시 국민들의 일반수입수준이 그다지 높지 않은 상황하에서, 정부관리들이 이처럼 부유하다는 것은 어떻게 보더라도 정상은 아니다. 만일 이들 재산이 불법적으로 형성된 것이라면, 이는 분명 뇌물이나 부패와 연관되는 것이다. 더구나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은 법이므로, 뇌물부패의 기풍은 전 국민당내에 만연되어 있었다고 봐야 한다. 항전승리후에는 더욱 심했을 것이다. 국민당통치가 짧은 기간내에 내리막을 걷게 되고, 결국 실패하게 되었는데, 이번 조사에서 그 중요한 원인의 하나를 엿볼 수 있는 것같다.
넷째, 위에서 조사한 관리의 예금액수로 추정하면, 국민당의 다른 관리들의 예금액수도 적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1949년 국민당이 대륙에서 패배한 후, 적지 않은 고급관리들은 해외로 망명하여 살았는데, 급여수입이 없으면서도 어떻게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는지도 아마 이번 조사에서 조금은 알 수 있을 것이다.
상술한 조사의 신뢰성은 이후 계속 연구해봐야 하겠지만, 최소한 연구자에게 약간의 구체적인 데이타는 제공한다. 그리고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국민당고위관리의 개인재산문제는 완전히 인상이나 감정으로 접근할 문제는 아닌 것이다. 민국사연구가 깊이를 더해가면서, 이 문제는 결국 답안을 찾아내리라고 본다. 속담에: "다른 사람을 모르게 하려면, 자기가 하지 않는 것밖에 없다(若要人不知, 除非己莫爲). 역사의 어두운 구석은 언젠가는 들춰진다. 역사의 수수께끼는 언젠가는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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