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고벌림(高伐林)
고빈(高斌)은 항일명장 고계자(高桂滋)의 외아들이다. "서안사변"이 폭발한 후, 장개석이 장학량, 양호성에게 붙잡혀서 고공관(高公館)에 연금되었다. 고공관은 당시 고계자가 막 완공하고 아직 입주하지도 못한 주택이었는데, 장학량이 임시로 빌려서 장개석을 구금하는데 썼다. 현지 이곳은 섬서성작가협회의 소재지이다.
1937년, "77사변"이 발발한 후, 고계자는 스스로 출전을 요청했고, 7월 9일 남구 전선으로 갔다. 나중에 제17군 군장(軍長, 군단장) 겸 제84사 사장(師長, 사단장)을 맡았다. 정아구(井兒溝), 희봉채(喜峰砦)의 두 전투에서 후쿠이(藤井) 소장이 이끄는 무기를 제대로 갖춘 친일몽골군 교도단과 악전고투를 벌였고, 280여명을 포로로 잡고, 800여명을 사상시켰으며, 박격포 6문, 경중기관창 13정등 대량의 무기장비와 120여필의 말을 노획했다. 후쿠이는 겨우 몸만 살아나갔다. 나중에 역사학자들은 "평수선 전장터에서의 유일한 승리"라고 평가한다. 9월 14일, 광령화소령에서 일본군 이타가키(坂垣)사단과 악전을 벌인 고계자는 제2전구사령관인 염석산(閻錫山)의 명을 받아 황급히 평형관 북익의 단성구(團城口), 미회촌(迷回村) 일대로 가서는 길이 약 30리에 이르는 많은 산에 방어진을 설치한다.
중국인들이 잘 알고 있는 "평형관대첩(平型關大捷)"은 실제로 임표가 이끈 팔로군115사단의 평형관매복습격전투이다. 이것은 전체 평형관전투의 한 구성부분이다. 전체 전투에서 가장 참혹한 피바람은 고계자가 지휘하는 제84사단이 죽어라 사수한 진지를 둘러싸고 일어났다.
고빈의 회고에 의하면, 그의 부친이 이끄는 84사단은 "잡패군(雜牌軍)"이었다. 당시 고계자에게 지휘권을 넘겼던 이선주(李仙洲)의 21사단은 장개석의 적계 중앙군이었다. 평형관전투에 참가한 것은 진수군(晋綏軍), 섬군(陝軍), 진군(晋軍), 중앙군(中央軍)과 팔로군(八路軍)에서 십여만명이나 되었다. 그중 고계자가 지휘하는 84사단, 21사단같은 곳이나 진군의 73사단, 독립3여단등의 부대는 전방에서 물러나서 참가한 것이므로 사상자가 많았고, 휴식을 취하고 보충을 받지 못했다; 진군의 곽종분(郭宗汾)의 군대는 후방에서 왔는데, 대일본군작전경험이 없었다; 사투리가 섞이고, 장비차이도 현격하며, 사기와 전력차이도 컸다, 주군과 객군은 서로 생각이 달랐다, 근본적으로 상하좌우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방법이 없었다. 일본군은 쉴 틈을 주지 않았고, 유명한 정예부대인 이다가티사단은 친일몽골군을 데리고 쉬지않고 하루에 수십리씩 추격해오고 있었다!
임전변괘(臨戰變卦)
왕정위는 일찌기 일침견혈(一針見血)의 견해를 밝힌 바 있다: 중국에 진정한 의미의 "국방(國防)"은 없고, "성방(省防)"만 있으며, 기껏해야 "수성연방(數省聯防)"만 있다. 이것은 중국이 일본의 침략을 맞이하는데 가장 핵심문제를 말하고 있다. 산동성주석 한복구(韓復榘)이든, 찰합이성주석인 유여명(劉汝明)이든, '전국을 하나의 전장터로 인식한다거나' '새집이 뒤집어지만 새알도 안전한 것이 없다'는 개념은 없었다. 그저 자기가 다스리는 지역만 화를 벗어나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일본사관학교를 졸업한 산서왕(山西王) 염석산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각종 수단과 사회관계를 이용하여, 일본의 침략손길이 다른 곳에만 미치도록 하는데 주력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평수선을 따라 직접 그의 근거지로 밀고 들어왔고, 더이상 피할 방법이 없었다. 할 수 없이 병력을 동원해서 항거해야만 했다. 남경중앙정부는 일본군이 산서를 점령하는 것을 우려했다. 산서를 점령하면 바로 아래로 남하하여 사천까지 밀고 들어올 수 있었다. 그리하여 환급히 지원군을 보내게 된다.
1937년 8월말, 염석산은 전선총지휘부를 안문관 아래의 한 요동(窑洞)에 설치했다. 주은래, 팽덕회와 함께 제2전구전투계획을 상의하는데, 작전방침은 "산지를 이용하여 적군을 섬멸한다"는 것이었다. 염석산은 일본군이 몰려오는 것에 대하여 이렇게 평가했다: 일본군이 산서, 수원을 도모하려면 반드시 태원을 차지해야 한다; 태원을 차지하려면 반드시 먼저 대동(大同)을 빼앗아야 한다, 그러므로 병력을 모아서 전투를 맞이할 진세를 구축해야 한다.
생각도 못하였던 것은 일본군이 9월 13일 대동을 점령한 것이다. 주력인 이타가키는 레프트훅을 날려서 강한 곳은 피하고 허한 곳을 노려서, 군대를 이끌고 직접 평형관을 향했다. 이타카기 세이시로(坂垣征四郞)는 1년전에 오대산을 유람한다는 핑계를 대고 친히 노선을 조사해본 바가 있다. 평형관을 넘는다면, 안문관(雁門關)에 있는 중국군대의 후방을 급습할 수 있을 것이다. 염석산의 대동회전계획은 유산되었다. 안문관일대의 병력은 많지만, 쓸 데가 없었다. 그리고 평형관일대는 누란(累卵)의 위기를 맞이했다. 할 수 없이 병력을 빼내서 평형관으로 보내야 했다.
염석산의 원래 생각은 우리측 11개군은 10여만명이므로 일본군이 평형관에 진입한 후에 다시 퇴로를 봉쇄하고 평형관 서쪽, 번치(繁峙) 동쪽 사하일대의 개활지에서 전투를 벌이며, 포위전을 하는 것이었다. 이 방안은 리스크가 컸다. 그러나 결심만 내린다면 못할 것도 없었고, 승산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염석산은 이 방안을 "구대진(口袋陣, 호주머니진법)"이라고 부르면서 자랑했고, 자신의 적계(嫡係)인 진장첩(陳長捷), 곽종분등 두명의 군단장에게 요령을 전수했고, 평형관, 단성구등지로 고위참모를 보내서, 고자계등의 장군들에게 명령을 전달했다.
관건적인 순간에, 전선지휘부는 그러나 망설였다.
전선지휘관은 제6집단군총사령관인 양애원(楊愛源)이었고, 부총사령관은 손초(孫楚)였다. 손초는 양애원의 신임을 받고 있었고, 양은 그의 말이라는 뭐든지 따랐다. 바로 손초가 돌연 이 일본군에게 평형관 안으로 들어오개 한 다음에 문을 걸어닫고 포위전을 벌인다는 방침에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그는 먼저 양애원을 설득했다. 그 후에 염석산에게 달려갔고, 이 방침의 폐해를 낯낯이 설명했다. 그리하여 염석산은 적군을 앞에 두고 마지막 순간에 마음를 바꾼다. 일본군을 평형관내로 들이지 않기로 결정한 것이며, 평형관 바깥에서 적을 막아내기로 하였다.
군사상황이라는 것은 순식간에도 천변만화하는 것이다. 반드시 적군과 아군의 상황에 맞추어 신축성있게 대응해야 한다. 다만, 이번 변경은 너무 시간이 촉박하게 이루어졌다.
만일 진수군만 있었다면, 죽어라 이 곳을 막아냈을 것이고, 염석산은 있는 힘을 다하여 막았을 것이다. 그러나, 3무리의 객군(客軍)이 왔다: 팔로군 115사단, 고계자의 17군, 유무은(柳茂恩)의 15군. 그러다보니 염석산의 머리는 복잡했다. 그는 원래 팔로군과 고계자가 함께 평형관 정면을 막는 것으로 계획했다. 그러나, 주은래와 팽덕회는 이것은 팔로군이 잘하는 분야가 아니라고 하였고, 차라리 115사단을 몰래 일본군이 전진하는 도로의 측면에 집결시켜, 적의 후방에서 습격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고, 염석산도 동의했다.
중국군이 방어진을 펼칠 때, 비록 일본군의 주공격방향을 확실히 알 수는 없었지만, 지형으로 판단하여, 평형관, 동서포지(東西跑池)와 단성구가 주전장터가 될 것이었다. 이후의 사실은 84사단이 방어하는 단성구가 일본군으로부터 가장 큰 진공압력을 받는다.
영구현과 번치현의 경계지점에 있는 장성상의 단성구는 동남으로 평형관까지 직선거리가 8킬로미터이다. 단성구의 동쪽은 부채형의 대지(臺地)였고, 동서방향으로 마찻길이 있다. 단성구를 지나 서남쪽 약 20킬로미터바깥에는 번치현의 대영진이 있다.
고빈은 당시의 많은 전투보고, 전보, 관병회고록등을 뒤져보았다. 어떤 것은 미국에서 중문, 일문사적에서 찾은 것이다. 어떤 것은 그가 서안에서 일하는 여동생 고사결(高士潔)이 여러 해동안 자료관, 도서관과 정협등 기관에서 힘들게 찾아낸 것이다. 이들 자료상, "격전이 심하다" "중상" "사망" "전부순국" "모두 다치거나 죽었다"는 등등의 글자가 나타났고, 행간에서도 포연과 혈화가 묻어났다.
70년간 논쟁한 문제
9월 22일 밤 11시, 일본군 제5사단 21여단의 4,5천명은 전차를 끌고 중국군 제73사단을 추격하여, 평형관의 앞에까지 도달한다. 평형관앞의 번치, 대현의 도로에서 고계자부대의 왕신요 영(營)에서 파견한 부대와 만나서 격전을 펼친다.
84사단의 진지로 진공한 것은 이타가키 기계화부대였고, 장비가 뛰어나고, 하루종일 포병은 포로 공격했다. 전투전에 중앙에서 산서에 국방경비를 내려보냈지만, 이 일대에는 아직 공사를 마무리하지 못했다. 84사단의 관병이 주둔한 후 황금히 파놓은 진지로는 일본군의 맹렬한 포화를 견뎌내기 힘들었다. 돌맹이가 나르고, 중국군의 사상은 가중되었다. 오후 4시가 되어, 일본군은 격퇴되고, 여효도(呂曉韜)는 출격하여 경기관총 4정등 무기를 노획하기도 하였다.
23일 새벽 5시, 진수군 제7집단군 총사령관 겸 제35군 군장인 부작의(傅作義)는 제2전구사령관 염석산으로부터 전화명령을 받는다: "적은 우세한 병력으로 우리의 평형관진지를 공격하고, 우리 84사단은 적과 고전을 벌이는 중이다. 이미 71사단 곽종분의 부대를 앞으로 전진시켜 대영(大營)에 배치하였고, 35군소속 보병 2여단을 자동차로 대영부근까지 수송하여 평형관전투를 증원한다" 염석산은 부작의와 양애원에게 공동으로 평형관전투를 지휘하라고 명령한다.
부작의는 일본지원군이 도착하지 않은 틈을 타서, 중국군이 예비대를 단성구방향으로 투입하여 전선으로 돌격해나가서, 일본군을 섬멸시키자고 한다. 원래는 24일에 출격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곽종분이 "예비대 71사단이 행군으로 피로"하다는 점을 들어, 9월 25일 새벽에 출격하는 것으로 바꾼다. 부작의는 어쩔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팔로군본부의 임표에게 알려준다. 하루를 늦추어 출발한다고. 정말 위험했었다. 임표는 마침 무전기를 닫고 출발하려고 하는 참이었다. 그들은 황금히 통신원을 파견하여 이미 행군에 나선 부대에 알렸다.
9월 24일은 고계자의 장병들이 가장 참혹하게 싸운 하루였다. 적군은 5천여명이 증원되었고, 평형관의 동서포지, 단성구 및 강당촌의 각 진지를 맹공했다. 포격이 아주 극심했고, 고계자군의 사상자는 속출했다. 도처에서 위급함을 보고했으나, 보낼 병력이 없었다. 고계자는 급전을 보내어 염석산과 손초에게 증원을 요청한다. 그러나 기다리는 증원군은 오지 않았다.
염석산은 부작의로 하여금 대영부근으로 가서 지휘하도록 명령한다. 부작의는 막료를 이끌고 밤 12시에 대영부근의 하남촌에 진주한다. 그리고 곽종분사단이 비가 많이 내려 움직이기 힘들다는 보고를 받는다. 출격이 2시간 다시 연기된다. 작전방안이 변경되었지만, 총지휘관인 부작의는 이를 모르고 있었다.
9월 25일 새벽, 84사단의 501단 2영 영장인 소춘기가 다리에 부상을 입고, 근무병에게 구조된다. 2006년 10월, 95세의 고령인 이 노인은 고사결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부상을 입었을 때, 진지에는 이미 작전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고계자의 84사단은 연일 계속되는 혈전으로 손실이 참중했다. 점차 버티기가 힘들었다. 오전10시경 단성구일대의 진지는 점차 일본군에 의해 돌파된다. 502단의 대리단장인 두문경은 부대를 이끌고 진지돌파를 막아내다가 장렬하게 전사한다.
곽종분의 71사단의 다시 연기된 계획에 따르면, 오전8시에 공격위치에 도착해야 했고, 단성구에서 북으로 출격해야 했다. 그러나, 진수군 인원의 회고와 전투기록에 의하면 단성구의 고계자진지를 점령한 일본군의 사격때문에 출격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상하다. 오전10시에 고계자사단의 잔병이 일부 산지를 빼앗기기는 하였지만, 곽종분은 8시게 출격하였는데, 어떻게 고계자의 진지에서 일본군의 사격을 받을 수 있는가?
이것은 바로 이후 70년간 계속된 논쟁이다.
5번 바뀐 출격시간
고빈에 따르면, 부작의는 역시 명장이었다. 그는 극력 일본군이 대량의 증원부대를 보내기 전에, 우세한 병력을 집중하여 여러 갈래로 출격하여 평형관앞의 적을 섬멸시키자고 하였다. 그러나, 부작의는 진군의 장문인이 아니었다.
2전구는 "24일출격"으로 정해졌다. 그러나, 곽종분의 71사단은 '출격군이 행군에 피로한 이유로, 25일 해뜨기전"으로 바꾸었다.
이에 대하여 고빈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고계자등 적지 않은 부대는 하북, 찰합이등에서 계속 저지당하면서 천리를 이동하여 이곳까지 왔고, 전투원의 사상이 엄중하였는데도 2개월동안 작전을 계속하면서 휴식정돈할 시간이 없었다. 명령을 받은 후에는 즉시 간이공사를 마무리하고 전투에 투입되었다. 그런데, 곽종분의 부대는 일본군과 싸우지도 않았지 않은가? 그리고 산서가 원주둔지이므로 쉰다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무슨 '행군피로'로 즉시 싸울 수 없단 말인가? 마찬가지로 진군의 장군인 진장첩은 곽종분의 부대가 '처음으로 항일전장에 나가서 사기가 대단했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출격시간은 나중에 다시 미루어진다. 84사단의 고건백 여장의 회고에 따르면, 출격은 24일 오후 6시에서 저녁 8시로 미루어진다. 다시 저녁 12시로 미루어지고, 다시 25일 새벽 4시로 미루어진다. 그리고 다시 비로 8시이후로 연기된다. '5번이나 바뀌었고, 결과적으로 병사 1명도 출격하지 않았다"
출격시간이 계속 연기된 것에 대하여 최전선에서 버티기 힘들어진 84사단의 고건백 여단장등 사람들은 진군 202여단이 여단장인 진광두에게 도대체 언제 출격할 것인지 압박해서 물어보았다. 진광두는 명령서를 내밀어보였다: "곽재양(즉, 곽종분)은 염장관(염석산)의 명령을 전달했는데, '본장관의 전화명령이 없이는 출격하지 말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고빈은 말한다: "전투기회는 조금만 늦어지면 놓치는 것인데, 이렇게 하루를 미룬다는 것은 전투의 승부, 고계자부대에 있어서는 아주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곽종분의 71사단의 전투보고에서는: 9월 25일, 고계자의 84사단이 지키던 단성구진지를 일본군에게 점령당하여 우리에게 사격을 가하므로 71사단이 출격하는데 저지를 받았다고 되어 있다.
<<항일전사. 태원회전>>에서는: "평형관 정면의 적은 5천의 증원군을 받은 후, 본일(24일) 새벽부터, 다시 우리 평형관, 단성구 및 강당촌일대의 진지를 공격했고, 전차대는 우리의 동포지이남으로 밀고 들어왔다. 전투는 저녁까지 계속되었고, 적은 성공하지 못했다" "25일에 이르러, 우리 제71사단부대가 막 전진할 때, 적 스즈키(鈴木) 병단 및 친일몽골군도 우리 84사단 단성구부근진지를 공격했다. 84사단은 어쩔 수 없이 퇴각했고, 적은 단성구, 요자간, 육랑성일대의 고지를 점령했다. 우리 71사단의 도로를 따라 전진하던 404단은 2시경에 적과 만난다"
여기서 얘기하는 것은, 고계자의 제84사단은 9월 25일 스즈키병단과 친일몽골군의 공격하에 밀려서 퇴각하였다는 것이다. 시간은 명확히 적지 않았지만, 곽종분의 71사단이 2시경에 적과 만났다고 되어 있고, 곽종분의 부대의 출격은 오전 8시이후였으므로, 여기서 말하는 2시는 오후 2시일 것이다.
이때 84사단의 영장을 맡고 있던 소춘기는 지금도 건재하다. 그는 당시의 혈전을 글로 남긴바가 있는데, 놀랄만하다:
고계자는 비록 여러차례 총지휘관인 양애원 및 염석산에게 증원을 요청했고, 그들은 매번 응락하였지만, 한번도 병사 1명 보내준 적이 없다. 사상이 너무 심하여 진지를 지킬 사알미 없었고, 26일에 적군의 손에 넘어갔다.
그가 말하는 것은 진지를 지킬 사람이 없어서, 26일에 적군의 손에 넘어갔다는 것이다.
고계자를 "퇴각명령"을 내린 장군으로 공격하는 것은 당시 진군 61군 군단장을 맡은 진장첩이 대표적이다. 진장첩은 1948년 천진경비사령관을 맡았는데, 해방군에 포로로 잡힌다. 그리고 '전범'으로 감옥에 여러해 갇혀 있다가 1959년에 특사로 석방된다. 그의 회고록에는:
고계자의 부대의 단성구, 요자간, 서포지간의 전선은 비록 계속 적의 공격을 받았지만, 수비군은 견고한 진지에 의지하여, 장비는 부족하지만, 중대한 사상은 없었다. 평형관을 공격하는 적군이 계속해서 밀려오자, 고계자부대는 공황상태에 빠진다. 곽종분의 부대가 대영에 도착했다는 말을 듣자, 손초에게 지원을 호소하면서, 직접 곽종분의 부대에 전선에 증원하여 방어를 증강시켜달라고 요청한다. 곽종분은 명령에 따라 출격해야 한다며 거절했다. 손초는 쌍방의 다툼에 대하여, 명확히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고계자의 부대가 적을 피하고 싶어한다고 생각했고, 곽종분의 부대가 집결완료후, 출격을 전개하면 즉시 분규는 해결된다고 보았다. ...착각과 원한으로 임의로 단성구, 요자간, 동서포지의 각 부대를 퇴각시켜 미회촌으로 물린다. 그 다음에 다시 항산방면으로 물러난다. 유무은의 부대에 의지하여 실력을 보존하고자 한다. 이는 잡채군의 모습을 그대로 보이는 것이다....손, 곽에게 분을 풀기 위하여, 고의로 단성구, 요자간의 요새를 벗어났고, 출격을 감행하던 곽종분 부대는 의외의 저지를 당한 것이다...
진장첩의 글에서, 고계자의 부대는 '중대한 사상이 없었고" 그저 '공황이 발생하여", "적을 피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잡패군의 자태를 재현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손, 곽에게 분을 풀기 위하여, 고의로 단성구, 요자간의 요새를 벗어났고, 출격을 감행했던 곽종분 부대가 의외로 저지를 당한 것이다" 만일, 진지를 '임의로 버리지 않았다면' 자신을 보존할 수 있었을 뿐아니라, 고의로 진지를 버림으로써 곽종분의 부대가 일본군에 막히게 되었으니, 오히려 일본군을 도와서 우군을 해한 혐의가 있는 것이다. 항일군인의 입장에서 이것은 사소한 지적이 아니다.
진장첩의 이 주장은 후세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도순이 쓴 <<혈색웅관>>이라는 책이 바로 대표적이다. 문학적인 수법으로 이 과정을 아주 그럴 듯하게 묘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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