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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공통)

중국역사를 바꾼 고구마

by 중은우시 2008. 5. 21.

글: 정삼(丁三)

 

명나라 만력6년(1578년), 장거정(張居正, 당시 재상)은 복건성을 시범지역으로 하여, 일조편법(一條鞭法)을 시행하였다. 그러나, 이 남방의 복건성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도저히 이해하기 힘들었고, 그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홍무26년(1393년)의 전국인구조사시에 복건성은 81만5천여호(戶)에 391만6천여구(口)의 인구를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200년이 지난후에 이 복건성에 등록된 백성은 겨우 51만5천여호, 173만8천여구에 불과하였다. 몇대가 내려온 다음에 호구가 오히려 60%정도 수준으로 감소된 것이다.

 

호구가 급격히 줄어든 것은 민간에서 인구를 숨기고 등록하지 않은 것도 중요한 이유의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다시 200년이 흐른 후인 청나라 도광14년(1834년), 복건성은 여전히 재난이 그치지 않고, 백성들의 생활은 힘들었다. 그런데, 이 때의 복건성에 등록된 백성의 인구는 1500여만으로 급격히 불어난다. 200년전보다 9배이상 늘어난 것이다. 이와 동시에 전국의 호구도 마찬가지로 7배가량 늘어나서, 전국인구는 놀라운 수준인 4억900만에 이르게 된다.

 

이처럼 심한 기복은 이전의 여러 경험을 무색하게 할 정도이다.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해석은 무지몽매하고 스스로 빠져나올 길을 찾지 못한 '늙은 제국'때문이라고 하지만, 이같은 인구증가의 배후에는 외래농작물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그 중의 하나가 고구마이다.

 

인종(引種)

 

고구마가 중국에 들어온 것은 만력21년(1593년)이다. 이해 봄에 여송도(필리핀)에서 '주서(朱薯)'라고 불리우던 농작물이 진진룡(陳振龍)의 눈에 들어왔다. 그는 이 농작물을 보고는 바로 복건성의 홍토지(紅土地)를 떠올렸다.

 

이해에 진진룡은 50세였다. 그는 북건성 복주부 장락현의 한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고, 젊었을 때는 지방과거에 합격하여 수재가 되었다. 그러나, 그가 살았던 시절은 한편으로 과거에 합격하여 관리를 하는 것이 쉽지 않았고, 다른 한편으로 장사에 종사하는 풍조가 동남각성에 유행했다. '중산층의 자제는 열에 다섯은 외지로 나가서 먹고살았다" 언제인지 모르지만, 진진룡도 장사를 하기 시작했고, 복건성과 필리핀을 오가기 시작했다.

 

복건상인들이 대량으로 필리핀에 간 것은 스페인 사람들과 관련이 있다. 이전에 필리핀은 화교가 겨우 150명정도 있었다. 1571년, 스페인함대가 필리핀군도를 점령한 후, 대량으로 생사(生絲), 면포(棉布), 도자기등 중국상품을 구매했다. 짧은 20여년만에, 복건인들은 거리가 가까워 장사에 종사하는 자가 만명에 이르게 된다.

 

스페인사람들이 가져온 것은 은화만이 아니었다. 아메리카대륙의 일부 농작물을 가져왔다. 사료의 기록에 따르면, 고구마는 먼저 필리핀에 들어왔는데, 약 1565년경이었다. 스페인인들은 필리핀군도를 점령한 후, 항상 식량부족에 시달렸다. 그리하여 대량으로 고구마를 보급하게 된다. 1593년에 이르러 담자색의 작은 꽃을 피우는 등본작물은 필리핀의 산과 들에 널리 퍼졌다. 진진룡이 본 것은 바로 현지의 토착민들이 아무데나 심고, 곡식대신에 먹는 것이었다.

 

고구마는 가격이 아주 쌌고, 종자를 도입하기 쉬웠다. 그리고 줄기만 옮기면 아무데서나 자랐다. 그러나, 고구마줄기를 필리핀에서 복건으로 가져오는데에는 진진룡이 아주 고생을 했다. <<금서전습록>>에 따르면, "스페인사람들은 그 종자를 귀하게 여겨, 외국인에게는 주지 않았다" 그들은 세관에서 검사를 겹겹이 했다. 진진룡은 토착민에게 뇌물을 주고, '줄기 수 척(尺)"을 얻은 후, 진진룡은 고구마줄기를 밧줄에 넣어(혹은 바구니에 짜넣어) 세관을 통과해서, 7일밤낮을 항해하여 푸저우(福州)로 갔다.

 

선박이 푸저우에 도착한 날은 음력 5월 21일이었다. 며칠후, 진진룡의 아들인 진경륜은 보고서를 작성해서 복건순무 김학증에게 아래관청을 통하여 널리 보급하도록 요청하였다. 이와 동시에 중국의 토질에 적합하지 않을 것을 우려하여, 사모지(紗帽池) 후통의 주택일대에 진씨부자는 종자를 심었다.

 

4개월후, 고구마의 종자도입에 성공했다. 진씨부자는 고구마가 '모자가 연결되고, 작은 것은 팔뚝만하고 큰 것은 주먹만했으며, 맛이 배나 대추와 같았다" 그들은 기쁨에 넘쳐 복건순무아문에 다시 보고서를 낸다. 그리고 김학증이 고구마를 보급하게 되면 그 은혜가 산과 바다와 같고, 영원히 역사에 남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김학증도 마찬가지로 흥분해 마지 않았다. 진씨부자의 이 행동을 의거로 칭송하고, 고구마를 들여온 것은 '인사(人事, 사람의 일)'이지만, 실제로는 '천은(天恩, 하늘의 은혜)'이라고 말하였다.

 

그해 겨울, 필리핀에서 온 고구마에 대하여 '번서(番薯)'라고 명명한다.

 

홍토(紅土)

 

복건의 백성들에게, 고구마의 성공은 아주 시의적절했다.

 

종자도입한 다음 해에 복건남부는 가뭄을 맞이한다. <<장주부지>>의 기록에 따르면, "들판의 풀이 푸르지 않고, 벼가 낱알이 열리지 않으며, 굶주린 백성이 들판에 가득했다" 김학증은 즉석에서 결정을 내려, 복건남부의 각 현에 고구마를 널리 심도록 한다. ?은 몇 개월만에, 고구마는 풍성하게 나고, 굶주린 백성들이 배를 불릴 수 있게 되어, 재난을 넘길 수 있었다.

 

산을 등지고 바다를 마주보는 이 척박한 복건성에 고구마의 여러가지 특징은 마치 그들을 위해서 있는 작물같았다. 바다로 나가는 것을 금지하던 때에 바다를 건너 찾아왔다.

 

송,원시대에 복건성은 통상, 무역, 수공업, 토산품으로 천하에 부를 자랑했다. 그러나, 명나라에 들어서, 사방팔방에서 찾아오고 수만의 배들이 운집하던 광경은 그저 선조들의 기억속에서나 남아 있게 되었고, 한번 흘러간 좋은 시절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금해령(禁海令)'이 반포된 이후, 재난, 기근, 흉작, 민생도탄...의 각종 고난이 민간에 닥쳤다. 복건성은 구릉이 종횡으로 있고, 홍토지가 곳곳에 있어, 겨우 작은 면적의 평원과 분지에만 벼를 심을 수 있었다. 복건성은 논밭이 좁고 사람은 조밀할 뿐아니라, 토지도 척박하고, 작아서 가을걷이가 시원치 않았다. 혜안현을 예로 들면, 융경5년(1561년)에 만여호가 사는 조그마한 소현에서 식량을 수입한 것만 약7만석이었다.

 

이외에, 태풍, 폭우, 가뭄, 수리부족...이 모든 것들은 이 복건성이 금해의 기간동안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고구마를 도입한 후에는 기근이 점차 복건에서 사라졌다.

 

고구마는 험악한 땅에서도 잘 자랐다. 구릉지는 말할 것도 없고, 홍토지에서도 잘 자랐다. 흙속에서 자라므로 비바람의 영향도 받지 않았다. 가뭄도 잘 견뎠다. 생산량은 높았고, "상급 토지 1무(200평)에 만여근을 생산했고, 중급토지 1무에서는 7,8천근을 하급토지 1무에서는 5,6천근을 생산했다" 과연 장주이후 고구마는 널리 퍼져간다.

 

복건에서, 고구마는 처음에 장군(?郡)에서 시작하여 점차 천주(泉州), 보전(?田)으로 퍼져갔다. 고구마줄기는 전체 복건남부의 홍토지를 뒤덮었다. 당시 사람의 기록에 따르면, "온 땅에 종자를 심었다. 가격이 싸고 많이 나서, 세끼를 식사삼아 먹었고, 어린 백성들이 이에 의지했다" 이어서 고구마는 복건동부, 팽호와 대만으로 퍼져간다. 정성공의 함대가 태풍에 갇혔을 때, 팽호에서 식량을 조달하라고 했을 때, 식량관 양영은 그에게 현지에는 고구마뿐이라고 보고한다.

 

대만의 고구마도 바로 퍼진다. 이후, 강희초년에 절강성 온주, 광동성 조산(潮汕)에서도 고구마를 심은 기록이 나타난다. 2대의 시간도 지나기 전에 고구마는 벌써 동남 홍토지에서 백성들의 주요 먹거리로 자리잡는다.

 

강남에서의 보급은 여러 곡절을 거치게 된다.

 

산거(山居)

 

진진룡이 필리핀에서 종자를 도입하기 전에, 몇몇 절강적의 원양상인은 일본에서 고구마를 도입한다. 그러나, 보타산의 몇몇 중들이 절의 앞뒤에 몇 그루 심을 뿐, 전파되지는 않는다. 그런데, 강희초년에 진씨의 4대후손이고 진경륜의 손자인 진이주(陳以柱)가 고구마종자를 가지고 근현(녕파)에 나타난다. 그리고 고구마를 절강성에 보급시키고자 하나 실패하고 만다.

 

진이주는 영파에서 장사를 했다. 강남에 막 도착했을 때 그는 고구마가 현지의 토양과 맞지 않을까 걱정했다. 몇개월후, 고구마는 고구마가 알이 굵어졌을 때 오히려 복건보다 컸고, 의외의 수확을 거두었다. 그러나, 진이주가 현지의 농민들에게 고구마를 심으라고 아무리 권해도, 고구마종자를 가져가 심는 사람이 적었다.

 

강남에서의 고구마보급의 실패는 고구마의 운명에 대한 하나의 은유이자 상징이다. 고구마는 가난하고 천한 사람의 작물이다. 그의 생장뿐아니라 주인도 마찬가지이다. 복건이외의 온주, 조산, 대만에서 고구마가 널리 퍼졌다는 것은 바로 이들 지방이 빈곤하고 재난이 많으며 지형특색이나 언어풍속이 복건과 비슷했다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그곳도 홍토지의 한 부분이었따. 그러나, 물고기와 쌀이 풍부하고, 아주 부유한 강남에 있어서, 이처럼 과일도 아니고 식량도 아닌 식물은 그저 잉여품에 불과했다.

 

아마도, 바로 이러하기 때문에, 고구마의 보급은 다시 수백만의 빈곤한 유민의 발걸음을 따라서 이루어지는지도 모른다.

 

역시 강희초년에 동남각성에서 대만에 공급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하여, 청나라정부는 "천해령(遷海令)"을 내린다. 그리하여, 선박, 가옥, 벼를 모두 불태우는 외에, 연안해안의 주민은 모두 내지의 산지로 이주해야 했다. 위반하면 죽음뿐이었다. 20여년간 계속된 '천해령'으로 천만의 난민이 가축처럼 흐리멍텅한 눈빛을 하고 산간을 헤맸다. 그들은 물이 있는 땅에는 벼와 보리를 심었다. 구릉지에는 고구마와 또 다른 외래작물인 옥수수를 심었다. 복건서부, 강서, 광서 및 안휘는 이때부터 곳곳에서 고난을 상징하는 담자색의 고구마꽃이 피었다.

 

만일 천해령시기에 '곡성이 하늘을 진동'하고 계곡에서 죽어나가는 광경이 많았었다면, 얼마후 또 다른 규모가 더 크고, 지속기간이 더욱 긴 서천(西遷)이 나타난다. 강희33년, 강희제는 <<초민전천조서(招民塡川詔書)>>를 내려, 호광(湖廣, 호남호북 광동광서)의 사람으로 사천의 인구부족을 해결하기 위하여 이주시키는 정책을 시행한다. 수십만의 호남호북, 광동광서의 빈민들외에 강서, 광동, 섬서등 10여개성의 빈농들이나 유랑민들이 서천의 행렬에 속속 가담한다. 이번 이주에서 수백만명이 거의 백년에 걸쳐 이주하는데, 여기에는 백만이 넘는 객가인들이 포함되어 있다.  바로 그들이 고구마를 머나먼 사천으로 가져간다.

 

이뿐이 아니다. 대이민이 가져온 연쇄반응이 나타난다. '호광전사천'외에 강서사람들이 호광을 메우고, 객가인들이 강서를 메우는 현상이 나타났다. 몇척의 고구마줄기는 이때부터 장강유역의 곳곳에 뿌리를 내린다. 고구마는 마을 하나하나에서 부채꼴로 퍼져나갔다. 먼저 도착한 호광의 이민들은 먼저 비옥한 사천의 토지를 모두 차지한다. 나중에 이주해온 사람들 특히 객가인들은 구릉지구나 귀주, 운남에 가까운 깊은 산으로 갈 수밖에 없게 된다. 이 곳에서 그들은 벼나 보리를 포기하고, 하늘의 명에 따른다는 태도로 고구마와 옥수수를 심게 된다.

 

건륭연간에 대이민풍조는 점차 막을 내린다. 그러나, 고구마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이미 장강이남의 곳곳까지 퍼졌지만, 이때부터 황하유역으로 진군하게 된다.

 

사해(四海)

 

고구마를 황하유역으로 가져온 것은 진진룡의 또 다른 후예인 5대손 진세원(陳世元)이었다.

 

무명소졸인 그는 사료에 간단한 이미지를 남겼을 뿐이다: 진진룡과 마찬가지로, 그는 유생이며 상인이었따. 젊었을 때는 감생이었다. 이때 그는 이미 중년에 접어들었고, 세 아들을 두었다. 건륭14년(1749년), 그는 다시 한번 상인의 신분으로 산동교주(청도)로 간다. 거기서 부유한 청도가 재난을 맞이하여 기근이 퍼져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난 나중에 당시 산동성은 메뚜기떼와 가뭄으로 3년간 재난이 지속되었다.

 

그의 혈액에는 이 가족의 고구마에 대한 애정이 흐르고 있다. 그는 황하유역에서 면밀한 계획하에 고구마를 보급시킨다.

 

청도의 고진구(古鎭口)에서 그는 시험재배를 한다. 그러나, 리스크와 영예는 이 집안 사람들의 전유물이다. 그는 두 친구인 여서원과 유희를 이 사업에 동참시킨다. 다음 해에 그는 자금을 모아 농기구를 사고, 경험이 풍부한 장년의 농부를 고용한다. 처음에 고진구에서의 시험재배는 실패한다. 싹이난 것이 열에 한둘이었다.

 

건륭16년, 그는 다시 자금을 모은다. 이해에는 시험재배가 큰 성공을 거둔다. 가을에 캐내니 주먹만하고 팔뚝만했다. 고진구의 주민들은 놀라마지 않으면서 종자를 받아간다.

 

고진구에서 보급에 성공한 후, 그는 다시 눈길을 청도, 산동성 내지 전체 황하유역으로 돌린다. 이 기간동안 진세원의 세 아들, 진운, 진섭, 진수도 가담한다. 또한 얇은 책자인 <<금서종식법>>이 황하연안에 퍼지기 시작한다. 고구마의 잔파는 각성 지방관리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이끌어낸다.

 

건륭18년, 진운은 고구마종자를 가지고 교주관아로 간다. 지주인 주우지는 즉석에서 포고령을 내려 고구마는 '6가지 이로운 점과 8가지 큰 이익이 있다'고 한다. 다음 해에 고구마는 웨이팡에 전래되고, 오래지 않아 산동포정사 이위는 전체 산동성에 보급하게 한다.

 

산동이후에 하남, 직예(하북)로 퍼져갔다. 건륭22년, 진운과 그의 막내동생 진수는 주선진을 중심으로 하남성의 전역에 보급하기 시작한다. 이와 동시에 진세원의 두 친구인 여서원과 유희도 북경통주로 간다. 시험재배에 성공했을 뿐아니라, 고구마는 장성내외에 크게 성행하게 된다. 이때, 나이가 많았던 진세원은 이미 푸저우의 집에서 <<금서전습록>>이라는 책을 정리하였다.

 

교주, 웨이팡, 주선진, 통주..이들 사통팔달의 지역에서 시작하여 금방 고구마는 북방각성으로 퍼져간다. 수십년후, 푸저우 오산에는 김학증, 진진룡의 두 사람을 제사지내는 '김공사(金公祀)'가 생긴다. 언제부터인지 진진룡은 복건의 사람들 마음속에 성황신으로 자리잡는다. 사람들은 그를 '수부상서(水部尙書)'라고 칭한다. 지금까지도 푸저우의 여러 골목에는 여전히 그의 사묘와 그의 이름을 볼 수 있다.

 

역사의 깊은 곳에는 더욱 중대한 사실과 진상이 남아 있다.

 

여음(餘音)

 

고구마가 중국으로 전래된 것은 마침 '일조편법'을 전국에 추진할 때였다. 주요한 내용은 요역의 편제를 인구에서 재산으로 바꾼 것이다. 그것은 역사에 깊은 영향을 준다. 징세편제의 권한이 이갑(里甲)에서 주현(州縣)으로 올라갔다. 만일 징세편제권한이 이갑에 보류되어 있던 시대에는 인정, 명성, 자발감독, 정보투명도....모든 이런 것들에 민간자치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징세편제권한이 이갑에서 주현으로 올라가게 되자, 관청과 민간의 대립은 피할 수 없게 되었고, 첨예하게 되었다. 당대의 학자인 오사의 <<혈수정률>>에서 묘사한 것은 바로 이 시기의 관민대항이다.

 

이뿐아니라, 요역은 재산을 기준으로 하므로, 제도적으로는 인구가 과도하게 늘어날 수 있는 여지를 남겼다. 복건을 예로 들면, 만력초기, 인구는 보고에서 빠트리는 허위보고가 많았다. 이는 호구가 급격히 감소한 직접적인 원인이다. 그런데, '일조편법'의 시행이후 인구를 늘이더라도 부담이 늘지 않게 되었따. 그리고 사회의 공정에 대하여 아무런 믿음이 없어졌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인구투기에 나선 것이다. 이후 중산가정은 이런 생활이 이루어진다. 한 아이는 농사를 지어 가업을 잇고, 한 아이는 장사를 하거나 수공업에 종사하여 추가수입을 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총명한 아이는 글을 읽게 하여 과거를 보게 하여 가장의 사회적인 지위를 확보한다.

 

고구마의 전래는 바로 이런 시기에 이루어졌따. 과연 고구마는 척박한 홍토지에 금방 퍼져간다.

 

청나라는 명나라제도를 승계하였다. 일찌기 강희50년에 내린 조서에서 강희제는 "호구는 늘어나는데, 토지는 늘지 않으니, 백성의 생계에 우려가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소수민족이었고, 그들이 다스리는 것은 인구가 많고 땅덩어리가 넓은 국가였다. 그들은 편협한 시야를 벗어날 수 없었다. 강희제의 조서에서는 "이후 태어나는 사람들에게 전량을 추가로 거둘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11년이후, 건륭제는 이를 근거로 전국에서 '탄정입무(?丁入畝)'의 정책을 시행한다.

 

소위 "탄정입무"라 함은 인두세를 철폐하고, 토지를 유일한 세금기초로 삼는 것이었다. 농업중국의 시야 속에서 이는 빈부격차의 확대를 막을 수 있는 좋은 정책이었다. 그러나, 사람이 많아지면서 토지가 부족한 현상이 심각해졌다. 인구의 과도한 번성을 막을 수 있는 마지막 빗장을 열어제킨 것이다. 건륭14년은 바로 진세원이 교주의 재난을 목도한 해이다. 그 때 다시 한번 전국인구조사를 한다. 오래지 않아, 각부, 각성은 속속 보고를 하는데, 전국의 인구가 1억7천7백만에 달하게 된다. 그리고 이를 태평성대의 표지로 생각한다.

 

사람은 많고 땅은 적으므로 관리가 부패한 상황하에서, 소농경제는 계속 더욱 세분화되고 강화된다. 배을 불리기 위하여, 농민은 최대한 상품소비를 줄인다. 거의 집집마다 베를 짜게 된다. 상품생산에 사용되던 기계는 사장된다. 일찌기 성황을 이루었던 수공업투자는 고리대금투자와 토지투자로 대체된다.

 

더욱 중요한 것은 두번의 중대한 재세개혁으로 인구증가에 따른 부담이 계속 줄어들면서, 공정이 결핍되고, 인구투기가 나타난 사회적 배경하에서, 유일한 백성들의 출로는 바로 생육이었다. '아들이 많은 것이 복이다'라는 전통적인 사상에서뿐아니라, '사람이 많아야 힘이 세진다'는 시골계산법이 모두 이를 증명한다. 그러나, 투기행위는 실패가 성공보다 많다. 그리하여, 고구마, 옥수수, 감자와 고량은 점차 백성들의 주요작물로 되어간다.

 

잡곡이 널리 퍼질수록, 숲은 점차 줄어든다. 가뭄과 메뚜기떼는 더욱 날뛴다. 황하는 점점 더 다스리기 힘들어진다. 인구, 잡곡 그리고 재해의 악순환은 이처럼 가속화되었다. 이 모든 것들은 결국 늙은 제국의 희망을 앗아갔다.

 

그러나, 고구마는 말기제국의 여음속에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