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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사회/중국의 도시

중국식 도시계획

by 중은우시 2008. 6. 17.

글: 중국경영보

 

은퇴한 이후에, 중국도시계획원의 도시계획전문가였던 순개(旬凱)의 가장 큰 취미는 여행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일정표에서 한 도시에는 빨간 색으로 엑스표가 그려져 있다. 그는 그 도시에는 영원히 가지 않겠다고 말한다.

 

그곳은 바로 광동성 바닷가의 한 도시이다. 1991년, 순개는 지시를 받아 이 도시의 "도시발전총체계획"을 작성했다. 화원식의 제조업도시가 종이 위에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20여년 가까이 지난 후, 자신이 계획했던 도시의 모습은 전혀 달라지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순개와 이 도시의 운명은 중국도시계획에서 부닥치는 문제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도시총체계획은 상급정부의 비준을 받았으므로, 비교적 강한 법적 구속력과 행정구속력을 가지지만, 지방행정기관장 및 경제성장방식의 선택에 따라서는 그 도시총체계획은 아무 것도 아니게 되기도 한다.

 

영국의 런던, 캠브리지는 순개가 가장 좋아하는 곳이다. 왜냐하면 이 곳의 계획에는 그의 스승인 중국도시계획계의 전설적인 인물 진점상(陳占祥)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노인은 일찌기 양사성(梁思成)과 함께 북경신도시부지선택에 있어서, 구성벽을 보호하자는 "양진방안(梁陳方案)"을 내놓은 바 있다.

 

도시계획계에서는 경전으로 불리우는 "대런던발전계획"은 바로 진점상이 박사학위과정에 있을 때 지도교수인 아보크롱비가 주재한 것이다. 그의 학생 겸 조수로서 진점상도 거기에 관여했었다.

 

"이 계획은 제2차세계대전이 끝난 후에 실시되었으며, 현재까지, 도시계획의 '철칙'으로 준수되고 있습니다. 2012년의 런던올림픽과 관련한 체육관의 건설도 이 계획에서 남겨둔 개발예정지구에 건설됩니다. 진선생이 한 계획은 60년후인 지금도 실시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점상이 누리는 대우를 지금의 중국도시계획종사자들이 그리워할 수는 없다. 1991년, 조적(祖籍)이 광동인 순개는 마침내 자기의 고향을 위하여 청사진을 만들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도시계획업무를 시작하기 전에, 그는 대량의 독일 루르지역도시계획자료를 살펴보았다. 이 '광동인'의 구상에 따라, 이 제조업이 막 일어나기 시작한 도시는 독일의 루르와 마찬가지로, 화원식의 공업도시로 계획되었다.

 

순개는 1991년에 자신이 만든 청사진을 보여주었다. "비록 공업도시이지만, 내가 계획한 첫번째 생각은 환경보호였습니다." 그는 손가락으로 한 공업공능구역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곳에는 해안선에서 떨어져 있고, 이 도시의 가장 서쪽끝이 되는 곳이다. 이 도시의 동쪽 끝에는 항구가 있다. 순개의 계획은 이 동쪽과 서쪽에서 시작한다. 동에서 서로, 점차 화원에서 공장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당시 우리나라는 공업도시의 계획에서는 경험이 부족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순개의 이 방안이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주 시대를 앞서가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이 방안의 심사를 맡았던, 중국도시계획원 부원장인 두이덕의 말이다. 심사조의 인상에 가장 깊이 들이박힌 것은 바로 공업공능구를 도시의 가장 서쪽에 둔 것이었다. "그 도시는 해양성계절기후였습니다. 풍향은 동에서 서로 불기 때문에, 순개의 계획은 이것도 고려했습니다"

 

순개의 논리는 만일 공업구를 동부연해지역에 두면, 동에서 서로 바람이 부는데 따라서, 공업생산에서 나오는 오염된 공기가 전체 도시에 퍼지게 될 것인데, 반대로 도시의 가장 서쪽 끝에 두게 되면, 전체 생활지역은 오염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보았다.

 

"제가 생각한 것은 심양의 교훈이었습니다. 심양은 모든 공업시설을 바람이 불어오고, 강물이 흘러오는 곳에 두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온 도시의 공기가 오염되었습니다" 순개는 이 계획안은 아주 높은 평가를 받았고, 성정부의 비준도 취득했다. 순개는 원래 자기가 중국도시계획역사상에 한 획을 그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이 모든 것이 달라지고 말았다.

 

"1995, 1998년때 나는 한번씩 가봤습니다. 그런데, 이 도시를 도대체 몰라보겠더군요" 이것을 회고하는 순개의 격동한 모습은 이미 70노인의 것이 아니었다.

 

기자가 알기로는, 순개의 도시계획방안이 비준된 후, 집행과정에서 성정부의 비준을 거쳐 3-4차례에 거쳐 개정되었다.

 

주택및성향건설부 성향계획사의 사장인 당개(唐凱)에 따르면, 중국의 현재심사비준제도는 상급정부가 비준관할구역내의 하급정부의 도시총체계획에 대하여 수정할 권한이 있다는 것이다. 다만, 계획비준후 5-8년내에 3-4차례이 수정을 하는 경우는 중국에서도 드물다고 한다. 왜냐하면 도시총체계획의 연한은 10년-20년이기 때문이다.

 

"수정은 내가 생각하기로는 그때 광동의 전체 경제발전이 매우 빨랐고, 많은 계획이 경제발전을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다만 근본적인 조정이 나타나는 것은 이해하기 힘듭니다. 또한 이 수정은 원래의 계획방안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정확한 부분을 조정한 것입니다"

 

원래, 3-4차의 수정은 동부를 항구건설, 생태환경거주지역으로, 서부를 공업지역, 제조업으로 하여 점진적으로 이전해가는 것이었는데, 이것이 철저히 뒤집혔다. 대량의 공업제조기업이 동부연해지역을 선택했고, 순개의 아름다운 해안선계획은 밀집한 공장지역으로 바뀌어버렸다. 이 기간동안 이 시의 시위원회, 시정부는 사람이 바뀌고, 신임서기, 시장은 전혀 다른 사람이 부임했다.

 

주택및성향건설부의 부부장인 구보흥(仇保興)에 따르면, 중국에서 지방행정기관장이 바뀐 후에는 도시발전총체계획도 수정되고, 변경되는 경우가 잦다. 건설계통내부에서는 이런 상황을 빗대어 '수장계획(首長計劃)'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도시계획을 관장하는 부부장의 골치거리이다. 왜냐하면 이는 지방정부의 근시안적인 안목때문에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다.

 

순개의 계획에서 동서를 뒤바꿔버린 근본적인 원인이 이 지방이 제조업을 자기의 핵심산업으로 하고, 이 도시의 동부지역의 항구주위에 공장을 건설하면 한편으로 원재료의 수입이 쉽고, 동시에 완성품의 수출이 편리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물류원가를 줄이는 것이며, 외자유치를 쉽게 할 수 있다.

 

"거주지역의 공기가 그다지 좋지 않은데, 해안도시가 이래서는 안됩니다. 원래 둘 다 갖출 수 있었습니다" 순개는 아주 유감스럽게 말했다.

 

"만일 도시계획에서 잘못이 나타나면, 도시건설에 잘못이 나타나고, 그 잘못은 수정이 불가능합니다." 구보흥이 강조하는 말이다. 그의 걱정거리는 도시총쳬계획은 법률적인 효력을 지니는데, '기관장의 의지'앞에서는 도시총체계획은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순개에 따르면, 그 도시는 이제 더 이상 수정할 기회가 없다고 한다. 실제로 2007년이래로 국가거시경제정책의 조정과 미국의 서브프라임위기로 수출제조업체에 적지 않은 타격을 주었고, 이들 제조업기업이 계속 해안선자원을 점유하고 있는 것은 원가측면에서도 적절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주시키는 것은 이미 가능하지 않다.

 

순개와 같은 도시계획전문가들은 대부분 런던, 캠브리지와 같이 100년간 변하지 않는 도시계획체제를 바란다. 재미있는 점은 아보크롱비, 하르루와 같은 도시계획대가들이 한두번도 아니고, 사회주의체제하에서 도시계획을 하는 것이 자본주의체제하에서 도시계획을 하는 것보다 훨씬 쉽다고 강조하였었다는 점이다.

 

더 많은 세부사항은 하르푸가 쓴 <<국가계획>>이라는 책에 들어 있다. 진점상의 이전 회고에 따르면, 이 책은 하르푸가 소련의 전후 모스크바에 대한 재건계획을 상세히 고찰한 후 쓴 책이라고 한다. 이 책에서 하르푸는 소련을 계획업무수행자의 천국이라고 하였고, 도시계획은 바로 엄밀한 계획과 집행업무라고 하였다.

 

"영국미국에서 토지사유제이후, 많은 계획전문가들이 한 도시총체계획은 실현하기 힘들게 되었다. 왜냐하면 소유주가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주의의 토지소유제하에서는 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이는 진선생이 결국 귀국했던 주요한 이유이다"

 

그러나, 이런 이상상태는 중국에서 전혀 실현되지 않았다. 사유재산소유자들의 이익때문이 아니라, 기관장의 의지때문이다. 초기의 예로는 바로 북경성벽의 철거문제였다. 지금은 경제발전이 지방행정기관장의 핵심이슈이다보니, '도시계획은 더 이상 엄격한 구속력을 지닌 법률문서가 아니게 되었다'. 두이덕은 이런 것들을 하도 많이 보다보니 더 이상 이상하지도 않다고 한다.

 

지금 영국의 대런던발전계획이 오히려 도시계획계의 경전으로 일컬어지는 것은 아마도 진점상이나 하르푸, 아보크롱비의 예측을 완전히 벗어난 것인지도 모르겠다. 비록 진점상이 대런던발전계획에 참여할 시대에는 '사회주의가 건축과 도시계획을 배우는 학생에게는 이미 패션이었다'고 하지만 이상과 현실의 차이는 여기에서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