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동북신문망
번화한 도시를 걷다보면, 우리는 자주 구걸하는 사람들이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것을 보게 된다. 쇼핑센터가 밀집한 곳에서는 심지어 거지들이 세걸음, 다섯걸음마다 하나씩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들 무리를 "신개방(新丐幇)"이라고 부른다.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걸개(乞丐, 거지)"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들은 정말 천하제일방이라고 불리우는 "개방(丐幇)"을 형성했을까?
역대왕조를 살펴보면 어느 시대이건 구걸하는 자는 있었다. <<후한서. 독행전>>에도 "향허(向栩)는 자가 보흥이고, 하내 조가 사람이다. 향허가 성장한 후 성격이 궤이했고, 말을 잘 못했다. 길게 소리지르는 것을 좋아하고, 나귀를 타고 시장바닥으로 가서, 다른 사람에게 구걸했다" 당나라때 원결의 저서인 <<개론(丐論)>>에서는 "장안에서 놀면서 거지와 친구삼았다"고 하였다. 구걸을 직업으로 삼는 자는 예로부터 있어왔다. 그리고 삼백육십가지 직업중에서 구걸도 한 업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그들 나름의 단체가 있는데, 세상에서 부르는 "개방"이다. 그들의 업종은 "궁교행(窮敎行)"이라고 부른다. 강호에서 어떤 사람들은 그들을 "간상적(杆上的)"이라고 부른다. 개방의 우두머리는 속칭 "개두(丐頭)" 혹은 "당가적(當家的)"이라고 부르고, 개방의 2인자는 "이당가(二當家)" 혹은 "호객(壺客)"이라고 부른다.
업종이 있으면, "업종에는 업종의 이름이 있는 법이고, 방에는 방의 규율이 있는 법이다" <<동경몽화록>>에서는 개봉성을 묘사하고 있는데, "여러 업종들마다 의복이 각각 다르다. 그리하여 어떤 색깔이 거지가 입는 것인지를 쉽게 알 수 있도록 한다. 그리고 규격도 있다. 조금이라도 다르게 하면 사람들이 받아들이지를 않는다" 소위 규격이라는 것은 거지들도 '방규(幇規)'의 구속을 받는다는 것이고, 일부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볼 때, 개방도 그저 아무렇게나 들어가 생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확실히, 아무나 마음대로 개방에 가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개방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소개인이 있어야 한다. 이 소개인을 "문무선생(文武先生)"이라고 부른다. 정식으로 스승으로 모시려면, 반드시 개방의 '이당가'의 주재하에 스승을 모시는 의식을 거행하여야 하며, 다른 사람이 대신해서는 안된다.
절을 하고 스승으로 모신 후에는 제자를 받은 스승이 자기의 거지제자에게 행명(行名)을 지어준다. 행명은 모두 "이(二)"로 한다. 예를 들어 성이 장(蔣)이면 그는 "장이(蔣二)"라고 부른다. 성이 마씨이면 그는 마이(馬二)가 되는 것이다. 만일 성이 중복되면, 스승을 모신 시간선후에 따라 혹은 연령에 따라 다시 성앞에 "대" 혹은 "소"를 붙이게 된다. 예를 들면, "대장이(大蔣二)", "소마이(小馬二)"가 되는 것이다.
스승을 모시고 개방에 가입한 후에, "스승의 명을 받들고, 스승의 행동을 보는"외에 규칙을 지켜야 한다. 예를 들면 이 업계에는 "삼불류(三不留, 세 가지 남기지 않는 경우)"와 "사부준(四不準, 네 가지 허용되지 않는 경우)"이 있다. "삼불류"는 도중에 집으로 돌아가는 자는 남기지 않으며, 다른 생계방식을 도모하는 자는 남기지 않으며, 도중에 군에 들어가는 자도 남기지 않는다. "사부준"은 절도를 허용하지 않으며, 사기무뢰를 허용하지 않으며, 싸움을 허용하지 않으며, 깡패짓을 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만일 위반하면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처벌을 받는다.
이외에 어떤 곳은 구걸해도 되고, 어떤 곳은 구걸할 수 없는 곳이 있다. 예를 들면, 청나라말기에 각 현에는 독립한 거지단체의 "개두"가 거지들의 구걸권리를 한 손에 장악하고 있었고, 어떤 집은 구걸해도 되고, 어떤 집은 구걸해서는 안된다고 정했다.
왜 이런 구별이 나타난 것일까? 그것은 바로 일부 상가나 일부 부잣집에서, 거지들이 매일 집으로 찾아와서 소란을 피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돈을 미리 '개두'에게 지급하는 것이다. 이미 돈을 받은 '개두'는 돈을 낸 가게나 집에는 호리병식의 종이를 상점에 주고, 문에 붙이게 한다. 이것을 "조문(罩門)"이라고 부른다. "조문"이 있는 곳에는 거지들이 찾아오지 않는다. 어떤 "조문"에는 이렇게 써놓기도 한다: "형제들이 이 집을 찾아와서 소란피우지 말 것". 어떤 경우에는 글자는 없이 그림만 그려서 표시하기도 한다. 이렇게 하면 거지들이 보기만 하면 바로 떠나버린다.
"조문"은 거지, 상가등이 약정을 통하여 서로 간여하지 않기로 하는 것이다. 만일 거지들에게 돈을 지급하지 않으려고 하면, '개두'는 거지들로 하여금 하루종일 집앞에 찾아가서 구걸하게 한다. 그리하여 타협을 이룰때까지 이렇게 지속하는 것이다. 이런 일에 대하여는 관청에 고발해도 소용이 없다. 왜냐하면 거지는 감옥에 갇히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부가 주는 밥을 얻어먹으니 나쁠 것도 없다. 관리들도 보고도 못본척 해준다. 만일 어떤 거지가 '조문'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구걸을 하게 되면, 개두는 가게주인에게 욕을 먹게 되고, 자연히 개두는 돌아와서 일을 저지른 거지를 처벌하게 된다.
규칙은 어긴 제자에 대한 처벌은 스승이 주재한다. 당시의 소개인인 "문무선생"과 스승을 모시는 의식을 주재한 "호객"도 모두 자리에 참석한다. 규칙을 어긴 거지는 스승의 책망과 훈시를 들은 후에, '벌을 달게 받겠다'는 표시를 한다. 이렇게 해서 끝나는 것은 아니다. 그 후에 스승은 200괴청(拐靑)을 치게 한다. '괴청'은 개방의 은어이며, 절름발이거지의 지팡이를 의미한다.
다만, 200괴청은 왕왕 많이 감해진다. 나중에는 개략 10괴청을 때릴 뿐이다. 왜냐하면 일반적인 상황하에서 다른 거지들이 모두 일부씩 책임을 나눠지겠다고 하게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소개인은 자기가 소개자로서 책임이 있으니 대신 맞겠다고 나선다. 이렇게 하여, 규칙을 어긴 거지에 대한 처벌은 용두사미가 되어, 육체적인 고통은 그다지 크지 않게 된다. 그러나, 이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너무 심하게 처벌하여, 병신이 된다든지 하면, 결국 다른 거지들이 먹여살려야 하기 때문이고, 다른 거지들의 부담만 커질 뿐이기 때문이다.
괴청은 청나라말기에 다른 명칭을 갖게 된다. 바로 "간자(杆子)"이다. 이 독특한 "간자"는 "개두"의 권력을 상징했다. 당시 경성의 거지는 한족도 있고 만주족도 있다. "개두"에도 "황간자(黃杆子)", "남간자(藍杆子)"의 구분이 있다. 보통 거지를 관리하는 사람은 "황간자"라고 불렀고, 전문적으로 종실이나 팔기자제를 관리하는 사람을 "남간자"라고 불렀다. 만일 거지가 방규를 위반하면, "간자"의 징벌을 받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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