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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사회/중국의 사회

마작의 기원

by 중은우시 2008. 1. 22.

 

 

글: 고청생(古淸生)

 

마작(麻雀, 중국에서는 麻將이라고 함)이 내포하고 있는 지혜는 아직 발굴되지 않았다. 그것은 기패(棋牌)가 결합된 산물이다. 고대의 돈(筒子 혹은 餠), 돈을 묶는 삭(條索)과 숫자단위(萬)의 3종류의 패(牌)로 나눌 수 있고, 여기에 동남서북(東南西北)의 바람과 중발백(中發白) 및 꽃패인 춘하추동(春夏秋冬)으로 되어 통상적으로 144장의 패로 구성되어 있다. 함께 탁자에 앉아 지혜를 겨루는 중에 패의 조합은 무궁무진한 변화를 일으킨다. 이것이 마작을 하는 가장 즐거운 점이고, 마작이 발명된 때로부터 지금까지 사랑받고 있는 이유이다.

 

마작의 기원에 대하여는 마조패(馬弔牌)에서 생겨났다는 것은 공인된 바 있다. 또 하나의 주장에 따르면 정화가 동남해안으로 갔을 때 배 위에서 발명한 것이라는 것이 있으나, 견강부회이다. 닝보(寧波) 사람들은 닝보사람인 진어문(陳魚門)이 발명해서 해외로 전파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이 주장도 완벽하지 못하다 세계의 오락기기와 오락방식의 탄생을 보면, 모두 오락을 즐기는 중에 완비되어 갔다. 단번에 모양을 갖추고 사람들이 즐기는 것도 없는 것은 아니나, 보통은 생명력이 길지 못하다. 텔레비전에서 건강체조를 8가지나 만들어서 보급하였지만, 필자가 아는 사람중에서 그중 하나라도 제대로 하는 사람을 볼 수 없다. 그리고 혁명군기(革命軍棋)도 있는데, 어릴 때는 즐겼지만, 나이가 들면서 시들해졌다.

 

마조패는 명나라말기에 성행한 지패(紙牌)이고, 전체가 40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십만관(十萬貫), 만관(萬貫), 삭자(索子), 문전(文錢)의 네가지 화색으로 이루어져 있다. 만관, 삭자의 두 색은 1부터 9까지 각 1장씩이다. 십만관은 20만관부터 90만관까지, 백만관, 천만관, 만만관이 각 1장이다. 문전은 1부터 9까지이며, 반문(半文, 枝花라고도 함)과 몰문(沒文, 空湯이라고도 함)이 각 1장이다. 십만관, 만관의 패앞면에는 수호지의 인물상이 그려져 있다. 만만관에는 송강(宋江)이 그려져 있다. 삭자, 문전의 패앞면에는 삭, 전의 도형이 그려져 있다. 마조패도 4명이 노는데, 모든 사람이 처음에 8장의 패를 나누어 가지고, 남은 8장은 탁자의 중간에 둔다. 4명이 돌아가며 패를 내놓고 패를 가져간다. 패를 낼 때는 큰 것이 작은 것을 이긴다. 마조패를 노는데에는 장가(庄家)와 한가(閑家)로 나뉘며 장가는 돌아가면서 맡는다. 3명의 한가는 힘을 합쳐서 장가를 공격하여, 장가를 이기면 장가의 지위를 넘겨받게 된다.

 

마조패는 마자(馬子)에서 변한 것이다. 요즘말로 번역하자면, "돈에 관한 패"라는 의미이다 마조는 일찌기 박희(博戱)에서 유래한다 <<사기>>의 기재에 따르면, 은나라 주왕(紂王)이전에 박희라고 있었는데, 육박(六博)이라고도 했다고 한다 육박은 6개의 저(箸)와 12개의 기자(棋子)로 구성되어 있는데, 저라는 것은 길다란 대나무로 만든 것이며, 요즘 마작할 때의 투자(子)와 비슷한 것이다. 박희는 대박(大博), 소박(小博)으로 나뉘는데, 노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두 사람이 마주하고 앉는데, 기반(棋盤)은 12줄이다. 양쪽의 가운데에는 물이다. 흑백의 각각 6개의 기자를 기반위에 놓고, 물고기 2매를 물안에 둔다. 경기는 쌍방이 돌아가면서 경(瓊, 즉 투자)을 던져, 던져서 나온 대소에 따라 기자가 나가는 발걸음의 수를 정한다. 한위(漢魏)이후, 박희에는 변화가 발생한다. 박희의 기자는 경에서 독립하여 별도의 행기(行棋)로 발전하며 지금의 상기(象棋, 중국식 장기)로 발전한다. 박희의 경은 5개의 나무로 된 투자로 발전하는데, 오목(五木)이라고 부르고, 저포(樗蒲)라고도 부른다. 던져서 나온 숫자로 승부를 결정한다. 나중에 오목은 양투(兩)로 변화하는데, 입방체로 만들어 6면에 점을 찍어서, 점의 숫자가 1에서 6까지 되게 한다. 당시에는 쌍육(雙六)이라고 불렀다.

 

당나라때, 투자는 독립된 도박도구가 된다. 당나라중엽에 엽자패(葉子牌)가 타나난다. 당나라후기에 투자격(子格)이라고 부른다. 송나라 선화연간에는 골패(骨牌, 宣和牌)를 생산한다. 골패는 상아 또는 상골(象骨, 코끼리뼈)를 이용하여 만들었다. 마자는 금은(金銀)의 수량을 대표한다. 마(馬)는 주마(籌碼, 칩, 말)이라고 한다. 명나라말기 청나라초기에 마조패에서 묵화패(默和牌)가 파생되어 나왔다. 4명이 노는 것이며, 지패는 길이가 2촌, 너비가 1촌, 합계 60장이었으며, 문전, 삭자, 만관의 3가지 화색으로 되어 있었다. 4명이 각각 10장씩 가진다음에 3장을 합쳐서 한짝이라고 하는데, 3짝에 2장을 합친 대패(對牌)를 이루면 승리한다. 패를 이기는 것을 "화(和, 발음은 hu임. 패를 다 맞춘 것을 훌러라고 함. 포카중 훌라의 기원이기도 함)"라고 불렀다. 묵화패는 이미 마작에 아주 근접했다. 그 후에 2개의 묵화패를 합쳐서 놀게 되었고, 패의 숫자는 120장이 되었다. 여기에 뻥()의 개념이 나타났다. 하가(下家, 다음번 차례인 사람), 대가(對家, 건너편에 앉은 사람)가 내는 패고 뻥을 하여 가져올 수 있다. 3장이 연속된 숫자인 경우에 감(坎), 세 장이 같은 패인 경우를 뻥((), 4장이 같은 경우를 깡()이라고 한다. 이리하여 이 놀이의 이름이 "뻥후패(和牌)로 고쳐부르게 되었다.

 

청나라 도광연간에는 동, 남, 서, 북의 바람패(風牌)와 중,발,백이 추가되었다. 운의 확률을 높이기 위하여 2장의 아무 것으로나 쓸 수 있는 패를 추가시키기도 했는데, 나중에 그림이 있는 마작패로 발전하게 된다. 패가 많아지면서, 취사의 조합이 아주 불편했다. 그리하여, 아마도 골패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는지, 패를 탁자위에 세우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그리하여 마작패가 탄생하게 된다.

 

1920년대, 마작은 아시아에서 아주 성행하였고, 구미에서도 유행하였다. 중국은 마작수출대국이 되었다. 수출한 마작패에는 아라비아숫자와 영문알파벳을 써넣었다. 이어서 마작을 하는 방법을 적은 책들, 마작을 하는 방법을 적은 잡지가 아주 유행하였다. 일본에는 마작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단체도 나타나고, 일본에만 3000만명이 마작을 한다. 마작클럽도 있고, 정기적으로 전국 및 세계규모의 마작대회도 개최한다. 서방에서 마작은 동방의 정취가 있는 골동품으로 여겨져서 마작을 하는 사람들과 수장가들에 의하여 정교하게 조각된 마작패는 수집대상이 된다.

 

전문가의 추정에 의하면, 중국에는 3억여명이 마작을 하여, 엄청난 놀이인구를 형성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