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신공무기(申公无忌)
명나라 홍무연간(주원장의 집권시기)에 관리를 지낸다는 것은 아주 리스크가 높은 업종이었다. 호유용사건과 남옥사건을 거치면서, 명나라에서 피살된 관리만 3만여명에 달하였다. 홍무제의 대명개국공신은 거의 일망타진되다시피 하였다. 서달(徐達), 상우춘(常遇春)등의 사람들도 일찌감치 죽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멸문지화를 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한 사람이 있다. 지위는 신국공(信國公)에 이르고, 일생동안 부귀를 누리며, 일생동안 조심스럽게 살아왔으며, 결국 죽을 때까지 공명을 누린 인물이 있다. 바로 탕화이다.
탕화(1326-1395)의 자는 정신(鼎臣)이며 호주(안휘 봉양)사람이다. <<명사. 탕화전>>에 따르면, 그는 태조 주원장과 같은 골목에서 자랐다. 즉, 탕화는 주원장과 같은 마을일뿐아니라, 같은 골목에서 자랐다는 말이다. 탕화는 "어려서부터 큰 뜻을 지니고, 말타는 것과 활쏘는 것을 즐겼으며, 무리를 이끌며 놀았다. 자라면서 키가 칠척에 이르고 계략이 많았다" 이 문구는 최소한 몇 가지를 알게 해준다. 첫째, 탕화는 어려서부터 포부가 컸다는 것이고, 둘째는 말타고 활쏘는 것을 잘했다는 것이며, 셋째는 지도자가 되고자 하는 욕구가 강했다는 것이다. 즉, 골목대장이었다. 넷째는 키가 크고 지모가 뛰어났다는 것이다. 이로써 볼 때 탕화는 보통사람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탕화는 명태조 주원장으로 하여금 농민혁명에 참가하도록 이끈 사람이라는 것이다. 곽자흥(郭子興)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가슴에 큰 뜻을 품은 탕화는 "장사 십여명을 이끌고 그에게 의탁했다" 그는 전투에서 용감하여 작은 관리가 되었고, "천호를 받았다" 이때 주원장은 여전히 황각사에서 중으로 있었다. 탕화는 옛정을 생각하여, 그의 어릴 적 친구인 주원장에게 서신을 썼고, 의거에 참가해서 같이 부귀를 누리자고 청했다. 그러나, <<명사>>에는 이런 사실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태조본기>>에는 그저 주원장이 '점을 친' 일만 기록되어 있다. "태조는 당시 나이 24살이었는데, 병란을 피하고자 신에게 점을 쳤다. 그런데, 떠나는 것이나 남는 것이 모두 불길하다고 나왔다. 그리하여 주원장은 혼잣말로 설마 내가 거사를 해야 한단 말인가라고 하고, 다시 점을 치니 대길하다고 나왔다. 그날 밤 주원장은 곽자흥의 농민군에 가담했다" 곽자흥은 그의 용모가 뛰어난 것을 보고는 친병으로 삼았다. 주원장은 이때부터 이름을 날린다. 이것은 아마도 주원장이 스스로 농민반란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일 것이다.
그러나, 사료중에는 여전히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전해주고 있다. 예를 들어 <<탕화전>>의 기록에 의하면, 주원장이 곽자흥으로부터 중용된 것은 그의 용모가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이를 보면 곽자흥은 관상을 잘보던 사람이었던 것같다. 그는 나중에 자신이 양녀(이후의 마황후)를 주원장에게 시집보낸다. 그러나, 여러 장수들은 주원장에 대하여 그다지 인정하지 않았는데, 탕화만이 선견지명이 있어서, 일찌감치 그가 황제가 될 것을 안 것처럼 주원장보다 3살이나 않았지만 그를 잘 모셨다. 주원장도 자연히 기뻐할 수밖에 없었고, 탕화에게 아주 호감을 가졌다. 이때부터 탕화는 주원장을 위하여 많은 공을 세우게 된다. 탕화의 공은 아마도 서달이나 상우춘보다는 작겠지만 그래도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공이 큰 신하에 대하여 주원장이 어찌 안심할 수 있었을까? 사료에 의하면 그는 사람됨이 아주 겸손하고, 세심하며 조심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는 공을 탐하지도 않았고, 이익을 도모하지도 않았으며, 상황에 맞게 잘 처신했다. 그러나, 이렇게 보는 것만으로는 정확하지 않다. 탕화가 끝까지 부귀영화를 누린 것은 그에게 큰지혜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한다.
사실, 탕화는 얼마나 총명한 인물인가? 그는 어려서부터 큰 뜻을 품고 있었고, '토사구팽'의 원리를 잘 알고 있었다. 홍무제때, 공신들이 하나둘 주살될 때, 특히 호유용사건이 터졌을 때, 무수한 사람들이 연루되었다. 탕화는 가슴이 서늘했을 것이다. 그는 주원장이 가장 걱정하는 것이 공신의 수중에 너무 큰 권력이 쥐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중대한 결정을 한다. 적극적으로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노년을 보내기로 한 것이다. <<명사>>에 따르면, 그가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하자, 주원장이 크게 기뻐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정리대로라면, 그가 떠난다고 했을 때, 주원장은 말려야 했다. 어쨌든, 어릴 때 골목친구이고, 혁명의 길로 이끈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그의 반응은 크게 기뻐했다는 것이다. 그 후에 그에게 여러가지 하사품을 내리고, 그 자리에서 응락한다. 그리고 봉양에 그의 집을 짓게 하고 이것도 그에게 하사한다. 주원장이 보기에, 탕화의 처세가 가장 적절했던 것이다. 모든 관리가 탕화처럼 행동했다면 그가 왜 살계를 펼쳤겠는가?
그러나, 주원장은 여전히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홍무제때 고향으로 물러난 사람들도 여전히 피살되는 운명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리하여, 매번 충성을 다하고, 항상 조심해야 했다. 이것이 고향으로 물러나서 살아가는 기본원칙의 하나였다. 검교들이 출몰하는데 누가 주원장의 시선을 벗어날 수 있는가? 그리하여 ,총명한 탕화는 관직을 사임한 후, 그는 스스로의 행동을 제약했다. 그리하여 결국 주원장도 그에 대한 경계심을 풀었다. 그는 한번도 공신이라고 자랑한 적도 없고, 자손들과 집안노비들을 단속했으며 법도를 지키게 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구실을 잡히지 않았다. 조정일에 대하여는 그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특히 그의 첩이 백여명이었는데, 그가 중병이 든 후에 모조리 고향으로 돌려보냈고, 조정에서 내린 상은 고향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가장 중요한 점은 사료의 기재에 의하면, 탕화가 고향으로 돌아간 후 한가지 원칙을 지켰는데, 그것은 바로 지방관리와 결탁하지 않으며, 정치에 대하여 묻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의 생활은 하루종일 술마시고 바둑두는 것이었고, 산과 물로 놀러다니는 것이며, 자손들과 노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편안하게 살면서 아무 것도 신경쓰지 않는다는 인상을 주었다 이 점에 대하여 주원장은 아주 만족해 하였다.
탕화는 술을 좋아했다. 자고이래로 술은 성격을 어지럽히고, 술때문에 나쁜 일도 저지르게 된다. 사료에 따르면 여러번 탕화는 술이 과한 적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탕화는 술을 마시면서 지나치게 행동한 적이 있지만, 어떤 일은 마치 일부러 그렇게 가장한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탕화전>>에 의하면, '상주를 지킬 때, 일찌기 태조에게 요청한 것이 있는데, 태조가 응락하지 않았다. 술에 취한 후 원망스럽게 말하기를, 내가 이 성을 지키는데 마치 지붕꼭대기에 앉아있는 것같다. 왼쪽을 보면 왼쪽이고, 오른쪽을 보면 오른쪽이다. 이 말을 듣고 태조가 그를 책망했다" 이 사건은 사가들이 탕화의 잘못을 언급하기 위하여 쓴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누가 모르겠는가? 이때의 탕화는 머리가 아주 맑았다. 당시 탕화는 상주를 지키는데, 일찌기 주원장에게 뭔가를 청했다가 허락을 받지 못했다. 우울해서 술을 가득 마시고 원망스러움을 표현했다. 탕화는 공로가 큰데, 뭣때문에 스스로 상을 달라고 요구할 것인가? 필자는 의문이 든다. 사실, 탕화의 이 행동이 의미하는 바는 간단하다. 주원장에 대하여 자신은 무슨 큰 뜻을 가진 것도 아니고, 그저 자그마한 상을 바라는 것일 뿐이며, 이 정도 작은 일로 술마신 다음에 헛소리를 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술취한 김에 하는 말은 그저 나는 자잘한 것만 주면 된다는 내용인 것이다.
또 하나의 방증이 있다. 이것이 이 문제를 설명해주는 것같다. 상주의 민간에 '인구단자(人口團子)'의 전설이 있다. 대체로 이 일과 관련이 있는 것같다. 당시 탕화는 상주를 지키는데, 주원장이 공신을 주살하고 있어, 인심이 황황했다. 대장인 탕화도 스스로 위험함을 느꼈다. 그리하여, 탕화는 자주 술에 취해 스스로를 숨기고자 했다. 그는 왕왕 술마신 후에 정사를 보면서 무고한 사람을 죽이기도 했다. 탕화의 부장은 잘못죽이는 것을 피하고자 가짜 사람머리를 만들어 피빛으로 만들어서 매번 탕화가 술에 취하여 사람을 죽이라고 하면, 가짜머리를 잘라버리곤 했다. 탕화는 취한 눈을 뜨고는 머리칼을 만지면서 크게 웃었다. 다음날에는 모든 것을 잊어버렸다. 비록 그가 사람을 죽이라고 해도, 아무 일이 없이 지나가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부장은 암암리에 명을 내려, 집집마다 가짜 사람머리를 만들어두라고 했다. 혹시라고 탕화가 사람을 죽이라고 명하면 그것을 가지고 대신하라는 뜻이었다. 그리하여, "인구단자"라는 것이 생겼고, 이것이 구정을 지내는 풍습으로 굳어졌다. 탕화의 행위는 무엇을 증명하는가? 그는 술주정뱅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싶었던 것이다.
탕화의 술주정에 대하여, 주원장은 혹시 잘 알고 있지 않았을까? 이는 단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주원장은 그저 흘러가는대로 맡겼다. 논공행상때, 그는 탕화의 잘못을 고의로 들추어내서, 고의로 공을 낮추었다. 다른 사람은 공에 봉하면서, 탕화는 겨우 후에 봉했다. 수년후 탕화는 신국공에 봉해졌다. 주원장이 이렇게 한 것은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탕화처럼 공로가 큰 사람도 이렇게 대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다는 것이다. 탕화는 어떻게 행동하였는가? 그는 더욱 전전긍긍하며 자아반성을 하는 모습을 보였다. 탕화와 주원장은 같이 자라고, 여러해동안 같이 일하면서, 서로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탕화가 이렇게 한 것을 보면 그의 지혜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고, 그의 심계가 얼마나 깊은지를 알 수 있다. 탕화가 고향에 돌아간 후 주원장의 요청으로 다시 동남연해의 일을 맡아 성 59곳을 쌓은 적이 있다. 그후 왜구는 침범하지 못했다. 그는 이 기간동안 그 지역에서 아주 큰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일이 끝나자 그는 곧바로 고향으로 돌아갔고, 전혀 이 지역에 미련을 갖지 않았다.
홍무23년 정월초하루, 탕화는 주원장에게 새해인사를 왔다. 그런데, 갑자기 병이 들어, 말을 할 수 없게 되었다. 홍무27년, 탕화의 병이 위중해졌고, 낫기가 힘들게 되었다. 이때, 주원장이 그 소식을 들은 후, 감개가 무량할 수밖에 없었다. 명사에 따르면, 주원장은 탕화를 남경으로 오게 한 후, 탕화의 손을 잡았다. 그저 머리만 끄덕였다. 홍무제는 눈물콧물을 흘렸다" 이때의 탕화는 이미 말은 할 수 없었고, 그저 머리만 끄덕일 뿐이었다. 탕화는 비록 마음 속으로 하고 싶은 말은 많았을지 모르지만, 말할 수가 없었다. 그 마음의 아픔은 그 자신만이 알 것이다. 이전에 그의 장남인 탕정은 목영을 따라 운남에 갔다가 불행히도 전사했다; 그의 손자인 탕성, 증손자인 탕유도 모두 죽었다; 그의 부하인 영국공인 부우덕도 주원장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였다; 탕화와 부우덕은 사돈간이었다. 그가 무엇을 더 말할 수 있겠는가? 주원장도 마찬가지로 눈물콧물을 흘렸다. 어릴 때의 친구이자, 고향사람들 중에서, 죽일 사람은 다 죽고, 겨우 탕화 하나만 남았다. 세상사람들은 환난은 같이 할 수 있지만, 부귀는 함께하지 못하는 것같다.
홍무28년(1395년) 8월 28일, 탕화는 향년70세로 죽었다. 주원장은 그를 동구왕에 추증했다. 봉양의 조산(방부시 용호공원)에 묻었다. 탕화의 묘는 용자하를 마주하고, 조산봉을 등지고 있어, 산수가 뛰어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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