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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명)

명효종(明孝宗): 일부일처제를 실천한 유일한 황제

by 중은우시 2008. 1. 30.

글: 주가웅(朱家雄)

 

진나라이래로 중국은 2천여년간 봉건사회였다. 비록 크고작은 수백수천의 황제가 나타났지만, 그중에 현명하고 업적을 남긴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그중에 상대적으로 완벽한 황제는 더욱 희소했다. 명나라를 보면, 명태조 주원장, 영락제 주체는 말할 것도 없이 위대한 황제이지만, 인종(仁宗), 선종(宣宗)도 말할 것이 없다. 그렇지 않다면 "인선지치(仁宣之治)"라는 말이 어디서 나왔겠는가?(아쉽게도 인종은 재위기간이 1년에 불과했다)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남겨진 이미지로 보면 명나라때 황제는 보편적으로 좋지 않다. 대다수는 나쁜 인상이다. 그러나, 이는 실제와 부합되지 않는다. 만일 청나라에서 고의로 왜곡하고 추화시키지 않았다면, 사람들의 명나라황제에 대한 인상은 분명히 좋았을 것이다. 몇 몇 황제는 아주 뛰어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명나라말기의 학자인 주국정(朱國楨)은, 진시황이래의 역대황제중 '현주(賢主. 현명한 군주)'라고 부를만한 사람은 한문제(漢文帝), 송인종(宋仁宗), 명효종(明孝宗)등 손가락으로 꼽을 만하다고 하였다. 청나라때 쓴 <<명사>>는 명나라때의 황제에 대하여 추화(醜化)하였지만, 명효종에 대하여는 비교적 높은 평가를 내렸다: "공검유제, 근정애민(恭儉有制, 勤政愛民, 검소하고 절제하였으며, 정사에 부지런하고 백성을 사랑했다)" 사실상 이런 평가는 거의 모든 명나라 황제가 받을 수 있다. 전술한 5명의 황제 이외에도, 건문제, 영종, 경제, 목종, 광종, 숭정등도 그러했다. 자세히 연구해보면, 사실 헌종, 만력도 모두 이렇게 부를만하다.(주원장의 유훈에는 후대의 제왕들이 반드시 '애민'의 본색을 유지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주우탱(朱佑)은 헌종황제의 셋째 아들이다. 1488년, 나이 18살된 주우탱은 황위를 승계받았으니, 그가 바로 명효종이다. 효종황제는 1505년에 병사하니, 향년 36세때였다. 재위기간은 18년간이다. 그리 길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아주 짧은 것도 아니었다. 효종황제는 일생동은 근정, 관용의 태도로 대신들을 예로 대하고, 백성을 보살폈다. 당시에 조야와 상하에서 모두 그에 대하여 찬양하는 말이 높았다. 오랫동안 명효종은 명나라때 가장 유교적인 원칙에 부합하는 모범적인 황제로 인정받았다. 중국봉건사회의 역사에서 볼 때, 그는 확실히 드물게 보는 모범적인 황제이며 군주의 전형이었다. 실제로, "현주"라는 말에 내포된 것을 보면, 명효종은 중국봉건사회의 모든 제왕중에서 랭킹5위내에 들어야 한다고 보고, 심지어 2위정도에 앉혀도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필자는 재위기간이 23년이었던 한문제를 1위에 놓아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문경지치(文景之治)"의 또 다른 황제인 한경제는 명효종보다 랭킹이 밀린다고 본다. 한경제는 주아부(周亞夫)등 장수들이 칠왕의 난을 평정하면서 무공을 세웠지만, 주아부는 끝이 좋지 못했고, 그는 조착(晁錯)을 억울하게 죽이기도 했다. 게다가 후계자를 선택함에 있어서 한경제는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점도 있다. 송인종을 보자면, 아주 관대하고 인자하며 인망이 있던 황제였다. 그리고, 범중엄등을 기용하여 개혁을 시행했지만, 아쉽게도 얼마다지 못하여 실패하고 말았다. 송인종이 가장 많이 점수를 잃는 부분이라면 대외전쟁에서 연전연패하였다는 것을 들 수 있다. 그래서 송인종도 명효종보다는 뒤로 밀리는 것이 맞다. 이들을 제외하고 또 어떤 황제가 후보로서의 경쟁력을 지니고 있을까? 명인종은 재위에 1년밖에 없어서, 아쉽다. 명선종은 10년간 재위하였고, 문도무략이 있으므로 끼어들만하다. 청나라의 강희, 옹정, 건륭의 몇몇사람은 모두 '문자옥'의 죄과가 있고, 심지어 탐욕스런 간신을 키워준 죄과도 있다. 그래서 현명한 측면에서 경쟁력을 갖추지 못했다. 전체적으로 보면, 필자는 명효종이 중국봉건사회역사상 전체적인 랭킹을 2위에 두어야 하는 현명한 군주였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명효종의 "현명"함은 어떤 측면에서 찾아볼 수 있는가?

 

먼저, 명효종은 성격이 관대하고 선하였다. 어려서부터 양호한 황실교육을 받았으며 양호한 개인적인 수양을 갖추고 있어다. 그는 양호한 유학의 기초를 지녔을 뿐아니라, 문화예술에도 자질이 뛰어났다. 그는 화가이면서, 기악연주가였고, 시인이었다. 그가 금(琴)을 타는 소리를 후손들이 들을 수 없고, 그의 그림도 남아 있는 것은 아주 적은 편이다. 심이어 그가 지은 <<시집>> 5권도 오늘날에는 찾아볼 수가 없다. 이자성의 농민군이 북경을 점령했을 때 혼란중에 없어진 것인지, 아니면 시를 많이 쓰는 것을 자랑으로 삼았던 건륭황제가 질투심에 <<명사>>를 쓴 이후에 명나라때의 사료들과 함께 불살라 버린 것인지 모르겠다. 더욱 중요한 점은, 같은 예술가이지만, 남당의 후주 이욱은 시사를 아주 잘 썼다. 그래도 나라를 망치지 않았던가? 송휘종의 그림은 수준이 대단하다. 그렇지만 역시 나라를 망쳤다. 명나라의 황제를 보자. 같은 예술가이지만, 명선종, 명효종은 이로 인하여 조정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들은 두손으로 양쪽을 모두 붙잡을 줄 알았다. 명나라 황제들의 실력은 이것만 보아도 알 수가 있다.

 

명효종은 재위기간동안 일부 정치제도를 제정하고 완비했다. 예를 들어, <<대명회전>>을 편찬해서, 관리심사제도를 완비했으며 명나라의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발전을 위하여 '제도의 왕'이라고 할 수 있는 주원장의 뒤를 이어 또 하나의 제도적 공헌을 하였다. 명효종은 유신(儒臣)을 존중하고 예로 대했다. 현명한 사람들을 뽑았으며, 서부(徐溥), 유건(劉健), 사천(謝遷), 이동양(李東陽), 왕서(王恕), 마문승(馬文升)등 덕행을 겸비한 신하들이 입각하여 관직을 맡았고, 함께 조정의 정사를 처리했다. 무공측면에서도, 효종은 업적을 보였다. 그는 투루판을 격파하였고, 가욕관 서쪽의 토지를 회수했으며, 하미(哈密)를 경영했다. 이외에 장성을 수리하고, 몽고를 막아냈다. 효종황제는 근검절약을 주창하고, 호화사치를 반대했으며, 그 자신이 이를 실천했다. 형벌은 신중하게 하도록 하였고, 부세를 감소시켰으며, 민생을 보살폈다. 전체적으로 효종의 통치하에서 명나라는 다시 한번 태평성세(역사에서는 홍치중흥(弘治中興)이라 부름)를 맞이한다.

 

명효종에 있어서 독보적인 것을 얘기한다면, 그것은 바로, 그는 개략 중국역사상 유일하게 일부일처제를 실천한 황제라는 점이다. 명효종의 황후인 장씨(張氏)는 하북 창주의 선비집안에서 태어났다. (명나라 중후기의 황후선발제도에 있어서 황후는 일반적으로 평민집안출신이었다. 이로써 황실의 혈맥에서 민간과의 유대를 지속해나가고자 하였다.) 아름답고 총명하며, 활발했던 그녀는 효종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부부간의 정이 깊었고, 효종황제는 황후와 매일을 함께 기거했다. 민간에서 서로 사랑하는 부부와 다름이 없었다. 후궁에는 궁녀들이 수두룩하게 많았지만, 나라를 다스리는데 정력을 집중했던 명효종은 전혀 그녀들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 비록 환관들이 여러번 권유했고, 대신들도 극력 권유하였지만, 명효종은 끝까지 이에 대하여 마음을 흐트리지 않았다. 그는 높은 수준의 유학적인 '극기'를 실천한 것이고, 명나라의 백성들에게 비범한 모범을 보였으니, 그와 같은 미덕은 실로 보기 드문 것이었다.

 

유감스러운 점은 명효종이 한창 나이에 죽었다는 점이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그가 우연히 감기에 걸렸는데, 어의가 진맥도 하지 않고 처방전을 내렸으며, 그 약을 먹고는 바로 코에서 피를 계속 나고 그치질 않아 죽었다는 것이다. 그는 죽어서 태릉(泰陵)에 묻힌다.